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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48화 (48/202)

48화. 파출소

권총 세 자루는 낙조를 제외하고 한 개씩 나눠 가졌다. 남은 총알을 확인하고선 각자 쉽게 꺼낼 수 있는 곳에 총을 감췄다.

“총알이라도 빼고 가자.”

“시간 없어. 아까 본부라는 곳에 보고도 해서 더 늦으면 잡힐지도 몰라.”

해화는 낙조의 오른팔에 박힌 총알을 바라보며 두어 차례 말했지만 낙조는 번번이 거절했다. 낙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회복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몸에 박힌 것을 빼내지 않는 한 새 살이 돋는 것도 아니었기에 해화는 답답한 듯 얼굴을 구겼다.

“잠깐이면 돼. 해 봐서 알잖아.”

“그래, 잠깐이니까 완전히 이 일 끝나고 해결해도 된다고.”

낙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딘가 독을 품고 있는 듯한 눈동자는 여전히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차는 빠른 속도로 신평의 도로를 가로질렀다. 여기저기 갓길에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낙조는 몇 번이고 핸들을 고쳐 쥐었다.

“서랍 좀 뒤져 봐. 약도나 지도 같은 거 있나.”

낙조가 해화에게 말했다. 해화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곁눈질로 흘낏 보니 잡동사니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종이 재질 같은 것은 모두 꺼내고서 하나씩 펼쳐 보다가 작은 종이 한 장을 낙조에게 건넸다.

“약도 같긴 한데, 알아볼 수 있겠어?”

그녀의 우려대로 약도는 지나치게 간소했다. 날려 쓴 글씨와 x로 표기해둔 무기고는 어떤 길로 접근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갖고 있는 정보는 도로명 주소와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 신평교 바로 앞에 파출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낙조는 숨을 고르고서 표지판을 유심히 살폈다.

“이거 강……, 섬진강일 거야.”

약도를 다시 가져가 자세히 훑어보던 해화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대충 그려진 물줄기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선명히 말했다.

“섬진강 맞아. 일단 강을 찾아서 쭉 따라가.”

낙조는 해화의 말에 조금 더 속력을 냈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밤이는 트렁크 쪽을 확인했다. 상자가 흐트러지진 않았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유독 말이 없는 이는 지운이었다. 그를 백미러로 살펴 보니, 지운은 창밖만 바라본 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말을 먼저 걸기에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본부에서 연락을 받고 이미 자신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온 감각이 예민하게 솟은 가운데, 누구를 일일이 챙기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낙조는 신경 쓰이는 지운의 표정에 그다지 무겁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홍지운, 배 안 고파?”

“갑자기 뭔 소리래.”

“어린이 배고플 시간이잖아.”

마침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운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픽 웃고서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낙조도 더 이상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참 도로를 달리던 도중 해화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한쪽 팔을 내놓은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변종이 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멀쩡한 사람을 만난 게 마지막으로 언젠지 모르겠어서.”

“나는 멀쩡한 사람 아니야?”

“언니는 멀쩡하긴 하지만……, 몸이 멀쩡한 편이죠.”

듣고 있던 밤이가 웃으며 물었다. 해화 또한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낙조는 일직선으로 뻗은 차로를 달리면서 해화의 말을 곱씹었다. 밤이를 제외하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을 만난 건 이번이 가장 최근인데, 그마저도 그리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다. 낙조는 점점 아려오기 시작하는 오른손과 팔의 느낌에 핸들에서 손을 떼어 냈다.

“거 봐, 아프지?”

“누나, 저 진통제 좀요.”

“그냥 총알 빼고 가자니까? 가서 또 무슨 일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땐 너가 나 지켜 주면 되지.”

밤이는 별말 없이 약을 낙조에게 건넸다. 물도 없이 거의 씹어 삼킨 낙조는 벙찐 해화를 보고서 옅게 웃었다. 총을 장전하는 법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괜한 부탁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파출소에 도착한 후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녀를 앞세울 생각은 없었다. 단 한 톨도.

“대피소는 아무 일도 없을까?”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운이 문득 말을 꺼냈다. 이미 끊긴 대화인 줄 알았는데, 그는 해화의 말에 많은 생각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운은 자켓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이리저리 매만졌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상처와 병을 치료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서는 가장 멀리 해야 할 물건이기도 했다.

“거기서도 막 이상한 사람들이 먹을 거 빼앗고……, 약한 사람들 괴롭히는 거 아니야?”

“대피소엔 그곳을 통솔하는 사람들이 있어. 무기도 군인들이 갖고 있고. 평택에서 봤잖아.”

“그때 아저씨가 변종 알아서 안 잡아 줬으면 거기도 이미 다 쑥대밭 됐을걸. 변종에 대한 대책이 확실히 안 세워져 있잖아.”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일을 벌렸다면 우리가 이렇게 쫓기고 있지도 않았겠지.”

지운은 하나하나 차분하게 말을 막아서는 낙조의 대답에 질린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는 파출소에 가까워질수록 굉장히 부산스러워졌다. 조금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낙조는 왼쪽에 놓인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예상을 못했을까? 붕어섬 연구소에는 그렇게나 많은 변종 식물들이 있었는데.”

“…….”

“심지어 사람을 데리고 실험까지 했어.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는 알았을 수도 있지. 알고 한 짓이라면, 이건 실수가 아니라 계획 중 일부야.”

밤이가 낙조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붕어섬에서 챙긴 식물들을 생각하면서 조용한 목소리고 말했다.

“근데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느냐, 그게 문제지.”

곧 ‘신평 초등학교’가 적힌 표지판이 드러났다. 낙조는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할 준비를 하면서 밤이의 말을 들었다.

“백무흠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물어봤어야 했어. 그렇게 시간이 없을 줄 몰랐지만…….”

“기억이 없었다잖아요. 끔찍한 그 시간을 되살려서 옥정호까지 간 것만 해도 이미 그 사람한텐 엄청난 고통이었을 거라고요.”

“그렇게 일일이 다 신경 쓰면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못 밝혀내. 미안한 마음이야 들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끝이야. 거기서 뭘 더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해. ……그리고 너, 지금부턴 네가 안 죽이면 네가 죽는다는 거 알아둬라.”

밤이는 따가운 말투로 말했다. 잠깐이나마 풀어졌던 공기가 다시금 얼어붙었다. 낙조는 말을 멈추고서 천천히 차의 속력을 줄였다. 오른쪽으로 초등학교가 스쳐 지나갈 즈음이었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자.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다시 오는 거야.”

차의 시동까지 완전히 끄고 각자 준비를 할 때였다. 신평 입구를 지키던 일행에게서 빼앗은 무전기가 갑자기 치직거리며 말을 건네왔다.

-야, 너희는 저쪽으로 가고. 늬들은 초등학교 앞으로 가. 야, 통제소. 통제소, 안 들리냐?

아마도 본부로 추측되는 곳에서 온 무전이었다. 낙조는 가만히 무전기를 귀에 가져다 댄 채 그가 내리는 세세한 명령을 숨 죽여 들었다. 해화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무전기에서 건너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아, 이 새끼들 어디로 튄 거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무전을 끝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시커먼 정적이 차 안을 뒤덮었다. 낙조는 무전기를 주머니에 넣고서 밤이가 주었던 남은 이파리를 쥐었다.

“내가 앞장설게. 고낙조 너는 최대한 뒤로 빠져 있어. 애들이 죽자고 달려들 것 같으니까.”

밤이가 지운의 총까지 장전해 주며 말했다. 능숙한 손놀림에 낙조가 가만히 밤이를 지켜보다 물었다.

“총 다룰 줄 알아요?”

“길게 설명하기 싫으니까 그냥 말할게. 나 육사 출신이다.”

잠깐 흐르는 정적에도 밤이는 아무렇지 않게 차에서 내렸다. 곧이어 모두 차에서 내리자, 밤이는 멀리서부터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손전등 빛을 보고 사격 자세를 취했다. 웃음기가 완전히 빠진 그녀의 얼굴 위로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졌다.

“최대한 고낙조 엄호하는 게 목표다. 고낙조 너는 무기고까지 최대한 몸 사리고.”

“……네.”

지운은 어디를 조준하고 쏴야 하냐며 밤이에게 물었지만 밤이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는 듯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손전등 불빛이 정신없이 좌우로 왔다갔다 거리며 사방을 비추었다. 밤이는 맨 앞에 서서 초등학교 벽 쪽으로 몸을 옮겼다. 나무 사이사이에 각자의 몸을 숨기고서 천천히 그들이 범위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듯했다.

“네 명밖에 없네. 다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앞서 가.”

밤이는 해화와 지운에게 속삭거리곤 손전등을 든 놈의 머리부터 조준했다.

탕!

“뭐야, 어디야!”

“저기, 저, 담 옆이다!”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딜 보나 민간인이었다. 무기고를 점령했다고 해서 저렇게 방심하고 맨몸으로 돌아다니니까 죽지. 밤이는 허겁지겁 총을 꺼내드는 놈들 중 가장 어리버리를 타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한 번 더 맞추고서 나무 뒤에 등을 기댔다.

“가.”

밤이가 낙조에게 신호를 보냈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무를 따라 난 길을 달렸다. 가로등도 꺼진 길은 어두웠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별 탈 없이 파출소에 도착할 터였다.

‘이제부턴 내가 해야 해.’

등 뒤로 총소리가 난무하는 게 들렸지만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낙조는 손에 쥐고 있던 이파리를 코끝에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제 정신이 잠깐 흔들리는 현상은 익숙해진 듯했다. 어지러운 것도 잠시뿐이라 생각하니 힘이 빠지지 않았다.

조금밖에 달리지 않았는데 파출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엔 경비를 맡은 듯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낙조는 몸을 낮게 움츠리고서 손을 오므렸다. 진동휘의 뒤를 쫓아 밖에 나갔을 때처럼, 단 한 방으로 저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힘이 필요했다. 모든 힘을 손바닥 안에 가둔다는 생각으로 두 눈까지 감고서 이파리가 형체를 갖추기를 기다렸다.

“고낙조, 뭐 해?”

해화가 심상치 않게 오므라드는 이파리를 보고 물었지만 낙조는 대답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릴 뿐이었다. 완전히 이파리로 감긴 오른손이 전보다 더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손바닥 안에서 말리는 탄알도 훨씬 큼지막했다. 아무리 갈겨 봐도 세 발 정도면 손바닥이 다 타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낙조는 해화와 지운에게 뒤로 조금 물러나라고 손짓하곤 천천히 총구를 파출소 앞으로 겨누었다.

끓는 피가 역류하듯이 손바닥 안에서 회오리를 쳤다. 낙조는 뜨거운 물에 폭삭 젖은 것 같은 손이 떨지 않게 왼손으로 손목을 받치고서 망설임 없이 검지를 안쪽으로 당겼다.

피슛, 펑!

“으아악!”

“아악!”

커다란 알이 낙조의 손끝을 비집고 나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것은 경비원들 사이로 정확히 떨어졌고, 굉음을 내면서 산산조각 났다. 실제 총알과는 물질이 달라 파편처럼 사람의 살갗을 찢진 못했지만 파급력은 엄청났다. 땅을 흔드는 충격에 넘어진 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낙조는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내면서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펑! 파파파팍!

“아아아아악, 불이야!”

“물, 물 어디 있어! 끄아아악!”

조금 더 달구어진 두 번째 탄은 사방으로 터지면서 이미 녹아 있던 진액과 맞닿으며 불꽃을 일구어냈다. 끓는 기름처럼 톡톡 튀어나간 불꽃은 놈들의 몸에 달라붙었고, 그들은 이내 불에 휩싸여 물을 찾으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거나 바닥을 굴렀다.

‘한 발은 아껴 놓자.’

낙조는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엔 성공했다고 생각하곤 손을 내렸다. 손바닥에서 지글거리며 살갗이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새 살이 완전히 올라오기도 전에 더 큰 짓을 저질렀으니 손이 얼마나 훼손됐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화와 지운은 완전히 넋을 잃은 채 불에 갇힌 놈들을 바라보았다.

“가자.”

낙조가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말했다. 최종 목적지는 무기고였다. 곧 뒤따라 온 밤이가 파출소 앞의 광경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고낙조 작품이야? 장관이네.”

“누나 맘에 들 것 같았어요.”

낙조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힘없이 무기를 놓고 쓰러진 이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총들을 주웠다. 손바닥은 무언가에 닿기만 해도 따가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낙조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고낙조다! 쏴!”

발을 들이자마자 안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낙조는 손을 펼치고 몸을 돌렸다. 탕,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뚫고 여기저기서 빛이 반짝거렸다. 동시에 수십 개의 총알이 이파리를 관통하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방심했다. 낙조는 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지켜보는 일행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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