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데스 카운트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낙조는 여덟 살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실내화 가방을 돌리며 아파트 앞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아래로 닫힌 방충문 너머로 노묘가 된 치치가 햇빛을 쬐고 있었다. 자신의 발소리에 현관 쪽으로 달려 나온 듯했다.
‘엄마’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출장을 끝내고 막 돌아오셨다며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어머니가 가벼운 가방을 벗겨 주며 배고프냐 물으셨다. 낙조는 손을 씻고 치치를 끌어안은 채 점심이 만들어지길 기다렸다.
가을을 맞는 잎사귀들이 바람에 슥삭거렸다. 작은 손으로 고릉고릉 소리를 내는 치치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을 만지니 어쩐지 잠이 오는 듯했다. 엄마, 나 졸려. 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꿈속의 꿈에선 황홀한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아저씨?”
흐릿한 시야에 이제는 익숙한 천장이 들어왔다. 낙조는 느리게 두어 번 더 눈을 떴다 감았다. 미미한 불빛이 굴곡진 채 눈앞을 흔들었다.
“고낙조!”
입을 뗄 여력이 없었다. 낙조는 대답 대신 눈에 조금 더 힘을 줘 보았다. 그제야 조금씩 눈앞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남매가 나란히 곁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좀 늦었네. 상처가 깊어서 그런가.”
밤이의 목소리였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붕대로 싸인 오른손이 보였다. 얼마나 잤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입안이 말라 입술을 떼는 것도 벅찼다. 낙조는 마른침을 겨우 삼키고서 겨우 입을 열었다.
“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운이 물을 적신 휴지로 낙조의 입술을 먼저 닦아 주었다. 입술을 적신 후 해화가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입안으로 넘겨주었다. 낙조는 조금이나마 갈증이 해소되자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군인은?”
밤이가 벽에 기댄 채 물었다. 어깨의 총상을 확인했고 진동휘 없이 혼자 돌아왔으니 대략 정황은 추측할 수 있다. 낙조는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론을 먼저 전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청주에서 또 군대가 올지 몰라요.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고, 여기 떠야 돼요.”
“군대가 왜 또 와? ……그 새끼가 신고했어, 우리?”
해화가 벌컥 소리를 높였다. 낙조는 눈을 굴려 벽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어쩔 수 없이 끄덕였다.
“개씨발놈이!”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아저씨?”
해화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이마를 박았다. 지운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낙조에게 물었다. 정신이나 몸이나 상당히 피곤했지만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낙조는 아예 상체를 일으켜 헤드에 기대곤 천천히 입을 뗐다.
“감염됐을 거야. 변종에게 잡혔으니까.”
“아저씨는……, 왜 쏜 거야?”
“야, 보면 몰라? 몰래 신고하려 했는데 얘가 방해하니까 죽이려고 했겠지!”
끙끙 소리를 내던 해화가 왈칵 소리를 질렀다. 지운은 몸을 움츠렸다가 못말린다는 식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밤이는 몸을 움직여 책상을 정리했다. 수북하게 쌓인 모든 서류를 들고 가진 못할 텐데. 낙조는 밤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그리고 누나. 그거 효과 좋았어요.”
“누나? 나?”
“어, 네.”
“그래.”
자료를 뒤적이며 정리하던 밤이가 낙조를 뒤돌아보며 되물었다. 멋쩍게 수긍하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정리를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남매는 같이 지낸 지 몇 시간 만에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밤이는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일부러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었고, 맘처럼 속내를 간파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식물을 갖고 가야 해.”
묵묵히 짐을 싸던 밤이가 중얼거렸다.
“온실 하우스에 있는 거, 하나씩은 챙겨야 해. 그래야 여기서 멈췄던 실험을 다시 할 수 있어.”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만 둔 이유가 있을 텐데.”
“실험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 둔 거야. 우리한텐 이유가 있고.”
지운의 질문에 밤이가 대답하며 낙조를 바라보았다. 낙조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거스러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밤이에게 자신의 몸을 실험하게 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운 건 낙조 자신이었다. 저 대답에 서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낙조는 붕대로 싸인 오른손 손바닥을 내려다 봤다.
*
“그냥 포기해.”
“닥쳐!”
거친 숨을 색색 몰아쉬며 연우가 찢어지듯 외쳤다. 무흠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얇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샘플로 사용한 낙조의 피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우는 날이 갈수록 초조해했고 무흠의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일 때마다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무흠의 혈액에서 리신 성분이 검출됐을 땐 조금 우려하긴 했으나 대부분 성공하리라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프로젝트 팀 분위기는 초상집과 다를 게 없었다. 그걸 바로 곁에서 보고 있자니 조금 고소하단 생각이 들었다.
“너를 살려 둘 이유가 있었을 거야. 분명히 뭐가 있었으니까…….”
“그걸 지금까지 못 찾아내면 실패라고 봐야지.”
“안 닥쳐?!”
연우가 잘근잘근 씹고 있던 손톱을 떼고 소리쳤다. 무흠은 눈 하나 꿈쩍 않고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며칠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흠의 몸은 영양제 몇 개로 버티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버텨 줄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흠의 피에서 리신 성분이 검출된 이후 실험실은 한 번 뒤집어졌었다. 연우는 무흠의 몸에 남은 흉터가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알았다. 무흠이 이전에 비슷한 실험을 당한 적이 있었나. 연우는 급하게 무흠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위쪽에선 연우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어떤 실험을 거쳤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과정을 알아야 지금 무흠을 병기로 만들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줄일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다고 했으면서……!’
연우는 소장을 원망하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흠의 입으로 직접 사연을 들으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쓸 데 없는 일이었다. 무흠은 애초에 그곳을 어떻게 알았고, 왜 가게 되었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낙조와 해화와 거의 같은 증상이나 현상을 몸에 지닌 이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확률도 무척 적었다. 백신이든 치료제든 성과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했다. 무흠이 잡혀 온 것도 나름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연우의 모든 계획이 뒤틀리고 있었다.
‘숨기는 이유라도 알아야 추측을 하는데, 아무것도 알려 주지를 않으니…….’
어질러진 책상 위를 내려다보며 연우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무흠에게 시도헸던 실험들, 그에 따라 줄줄이 잇따른 실패의 결과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자료들을 내려다보는 연우의 눈길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남은 낙조의 피와 변종의 피를 담아 놓은 진열장 쪽으로.
‘완전체로 복사를 할 수 없으면 부분만 복사해도 상관없잖아.’
위험한 생각이 무심코 눈앞을 스쳐갔다. 연우는 천천히 변종의 피를 담은 메스 실린더 쪽으로 손을 뻗었다.
*
무기가 필요했다. 낙조가 모두를 지켜 낼 수 있다는 확률이라거나 각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률이 백 퍼센트에 미치진 못했다. 낙조는 일행 모두가 어느 정도 공격과 방어하는 수단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을 좀 벗어나서 무기로 쓸 만한 걸 좀 찾죠.”
밤이를 도와 온실 하우스에서 27개 품종의 개량된 품종을 분갈이한 후 낙조가 제안했다.
“운이 좋으면 총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미 다 털리지 않았을까?”
지운은 그리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반문했다. 낙조는 쉽게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밖에 수가 생각보다 많아. 지금 갖고 있는 걸론 못 당해내.”
기름이 가득 찬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변종들을 밀어낼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틈새를 노려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근데 진짜 군대가 올까?”
“확인 차라도 한 번은 올 거야. 안전한 곳을 찾는 게 나아.”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
“찾아 봐야지.”
지운은 내심 지하실을 떠나는 게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시간을 이리저리 미루다가 군대와 충돌할 수도 있게 된다. 무흠이 만들어 준 숨구멍을 그런 식으로 파괴시키고 싶진 않았다.
“……저번에 음식 가지러 갔을 때, 중형차 두세 대, 정도 봤는데.”
지운이 어렵사리 입을 떼어 냈다. 해화는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대 정도는 얻어 걸리겠지.”
“지체하지 말고 바로 준비하자. 해 지기 전에 머물 집 하나라도 찾자고.”
해화의 말을 밤이가 받아쳤다. 그녀는 곧장 분갈이를 해 놓은 식물들을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짐을 쌌다.
동휘의 침대 귀퉁이에 놓인 짐들은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낙조는 쓸모 있는 것만 찾자, 라는 심정으로 동휘의 가방을 뒤졌다. 가방에서 나온 건 작은 노트와 단검, 더러워진 군복이 끝이었다. 낙조는 작은 노트를 가만히 쥐고 있다가 살며시 몇 장을 넘겨 보았다.
「바 2471
신평면 가덕로 665 신평 파출소 밤 9시」
노트엔 몇몇 장소가 적혀 있었는데, 가장 마지막 종이에 적힌 장소와 시간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급하게 쓴 것처럼, 글씨체는 엉망이었다.
신평이면 임실에 있는 곳이다. 차로 간다면 그리 멀지 않을 테다. 낙조는 물끄러미 그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생각했다. 진동휘가 왜 이곳을, 어떻게 알고 적어 놨지?
‘혹시 신고하기 전 내통하는 무리가 또 있었나.’
낙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곤 조용히 주소가 적힌 종이를 찢어 반으로 접은 후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나 하여 다른 전화번호나 주소가 적힌 종이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남은 종이는 모두 깨끗했다.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진동휘가 좀 의심스러운 행동 한 적 있어?”
짐을 거의 다 싸 가던 지운에게 물었다. 지운과 함께 카페 거리를 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의심을 해볼 만한 행동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운은 낙조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각자……, 나눠서 물건 찾아보자는 얘기를 계속 하긴 했어. 근데 시간 때문에 그런가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긴 했지.”
“혼자 뭐 했는지는 몰라?”
“……뭘 중얼거린 것 같긴 했는데, 나는 아저씨랑 무전 치는 줄 알았어. 아니야?”
“그 새끼 다른 무리랑 접촉했던 것 같아. 그러다 안 풀려서 우리 신고한 거일 수도 있고.”
낙조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가방을 들었다. 자신의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간다면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벌릴 틈이 없었다. 낙조와 지운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화와 밤이도 조용히 짐을 마저 챙겼다.
“그런데 그럴 시간이 있었을까? 우리 내내 같이 있었잖아.”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지.”
지운의 물음에 낙조는 가볍게 대답하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곧 해가 질 테다. 석양이 이 땅 전체에 빨려 들어가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낙조의 급한 발걸음을 좇아 지운이 따라 올라갔다.
‘파출소라면 무기고가 있어. 무기고를 담당한 놈들은 어떻게 알아냈지?’
생각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물안개가 뿌옇게 올라온 호숫가에 서서, 낙조는 조용히 보트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