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웃는 가면을 벗긴 후
긴급 연락망은 어떻게 하든 청주에 있는 센터로 연결된다. 수화기를 들면 녹음된 음성메시지가 재난에 대한 안내를 하고, 가까운 대피소 위치나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알려 주는 상담원들과 연결시켜 준다. 그 외에 수배인 목격 신고는 아주 마지막에 안내를 하는데, 0번을 누르면 곧장 수호에게로 전화가 간다.
고낙조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진 이후부터 백무흠이 잡혀 온 이후까지 수호에게 직접 신고 전화가 온 적은 없었다. 다른 밤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다. 백무흠에 관련된 자료들을 읽고 있던 수호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다 식은 커피만 들이켰다.
그때 유일하게 바깥과 연결된 전화기가 울렸다. 수호도 처음으로 들어보는 벨소리였다. 스크린에 띄워진 무흠의 기록을 읽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 시간에?’
시간을 확인한 수호는 잠시 망설였다. 처음으로 온 신고 전화임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받기가 꺼려졌다. 전화벨 소리가 두세 번 더 울렸을 때, 수호는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예, 말씀 하십시오.”
-고낙조, 고낙조 목격자입니다. 신고 좀 하려고 하는데요.
“……예. 어디서 목격하셨죠?”
상대는 숨이 찬 목소리로 황급하게 말했다. 말 사이사이에 거친 숨소리가 가득 끼어 있었다. 수호는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붙인 채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러나 상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백, 치직, 무흠……, 중사……, 거기 있는 거, 치직, 칙, 맞습니까.
수호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조금 말이 끊기긴 했지만 분명 상대는 백무흠의 이름을 대고 있었다. 수호는 곧장 컴퓨터를 옮겨 신호가 어디서 잡히는지 확인했다.
전라북도 임실군……. 뒤는 끝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낙조를 잡으러 갔던 군대가 갔던 곳 근처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백무흠의 증언으로는 모두 이미 탈출시켰고, 자신 혼자 그곳에 남았다고 했다. 아마 탈출했다던 무리 중 한 명일 게 분명했다. 수호는 누가 들어오지 않나 문 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백무흠 중사……, 는 현재 센터에 있습니다. 신원이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고낙조도 함께 있습니까?”
-먼저 말해요. 백무흠 중사 지금, 치직, 치지직……, 게 됐습니까. 말해요, 빨리! 신고하면 바로 내일 데리러 올 수 있습니까? 그것만 말하면 다 말한다고요.
“그건 제가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 아니라, 제가 도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하시고, 성함이랑 어디에 계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신고하겠다고요! 목격, 치지직. 백무흠 중사, 백무흠, 치직……, 떻게 됐는지, 알려 달라고!
수화기 너머에서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소리를 지르던 이는 잠잠해졌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백무흠 중사에 대해, 치직……, 알아내서 대답, 칙……. 내일 바로……, 칙, 치지직, 구조할 수 있는지도.
그리고 전화는 맥없이 끊겼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식은땀이 맺힐 만큼 긴장한 순간이었다. 수호는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위치 추적을 시작했다. 전화가 걸려온 곳은 옥정호 근처 어느 카페였다.
‘옥정호 근처면 탈출했다고 볼 수가 없는데. ……아직 그곳에 있는 거 아니야?’
수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걸 연우에게 바로 보고한다면 곧장 군대가 출발할 것이다. 전화를 걸어온 이에게 백무흠에 대해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아도 일은 곧장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손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구실 E에서 봤던 백무흠과 연구원들에게서 속속들이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줄 수는 없다. 상대는 백무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수호 자신이 그런 그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할 이유는 없었다. 백무흠이란 인간에 대해 아는 건 파일로 읽은 기록뿐이다. 덧붙여 연구실에서 봤던 백무흠의 모습은 원초적인 두려움과 약간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그는 살아 있다.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만 전해도 내 책임은 다한 게 아닐까. 수호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주저하는 것은 잠깐이었다. 곧 그는 수화기를 들고 좌표에 연결된 번호로 신호를 걸었다.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곳에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게 우선이었다.
-여보세요.
아까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수호는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백무흠 중사…….”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우당탕, 하고 수화기가 어딘가로 내던져진 소리가 들렸다.
*
낙조는 동휘의 어깨를 잡아 돌려 테이블 위로 곧장 찍어 눌렀다. 아주 얇은 끈 하나로 버티고 있는 정신이었지만 두 눈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에 쥔 유리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을 동휘의 목 근처에 두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 신고하면 너는 특혜로 청주에 가겠지. 죽을 걱정 없이.”
“이, 씨발, 놔, 큭!”
왼쪽 팔로 조금 더 세게 동휘의 목울대를 짓눌렀다. 동휘는 컥컥대며 낙조의 팔을 쥐어뜯었다. 낙조는 꿈쩍도 않고서 동휘를 내려다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손끝이 점점 굳었고 목덜미 가까이에 다가온 유리 조각의 냉기가 고스란히 온몸을 압박했다. 동휘는 겨우 숨만 턱턱 내뱉으면서 몸을 떨었다.
“내가 가만히 잡혀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덮어씌운 죄책감 때문에?”
낙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내뱉는 단어는 비틀림 하나 없이 정확했다. 낙조는 조금 더 가까이 유리 조각을 동휘 쪽으로 기울였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가끔씩 날카로운 부분이 동휘의 살갗에 닿았다. 그때마다 동휘는 짐승의 이빨에 씹히는 것처럼 흠칫거렸다.
“내가 네 속을 모를까 봐? 백무흠 중사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고, 너는 안전한 소굴로 기어 들어가겠다 이거 아니야.”
“씹, 놓, 으라고……!”
“백무흠이 죽었다면 너야말로 고맙겠지. 우리 신고하고 들어왔다는 것도 감출 수 있을 테니까.”
단어를 갈기갈기 뜯어먹는 듯한 발음이 동휘의 숨통을 더욱 옥죄었다. 낙조는 유리 조각으로 아주 살짝 동휘의 목덜미를 베었다. 따가운 감각에 동휘가 발버둥 쳤다.
“익, 개새, 끼야, 허윽.”
“신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씹새끼야.”
낙조는 그대로 유리 조각을 테이블에 쾅 찍고서 몸을 일으켰다. 동휘가 허겁지겁 숨을 들이키며 몸을 들썩거렸다. 낙조는 가만히 동휘를 내려다보다가 허공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무사하십니까?
“백무흠 중사, 살아 있습니까?”
-……예. 저,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가 도와드릴 수―
건너편에서 답을 들은 낙조는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전화선을 모두 뽑았다. 그때까지도 동휘는 켁켁거리면서 몸을 뒹굴고 있었다.
낙조는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소총을 들었다. 여러 생각이 겹쳐 떠올랐다. 이곳에서 사람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떠들썩해질 일은 없다. 이미 두 번의 전화로 청주에선 위치를 파악했을 수도 있다. 더 크게 본다면, 진동휘의 질문 때문에 자신의 일행이 아직 이곳에 있다는 걸 추측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용서라거나 벌을 내린다는 위치에 자신이 올라 있는 건 아니었다. 진동휘도 복수심과 자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을 테고 지금까지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잘 포장한 것에 대해선 칭찬도 해줄 수 있었다. 다만 그의 행동이 몰고 올 것이 자신의 일행을 향한 공격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다들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생각하면 용서할 수가 없으나 감히 그들을 대표하여 벌을 내릴 처지는 아니다. 낙조는 금방이라도 놓아 버릴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동휘의 덜미를 잡아챘다. 이미 겁에 질린 동휘는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놔, 씨발, 놔 이 새끼야!”
“존나 시끄럽네, 진짜…….”
낙조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잠긴 카페 문을 열었다. 수두룩하게 널린 변종들을 발로 걷어차며 동휘를 질질 끌고 나왔다.
“악, 아아악!”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해도 낙조의 오른손에 감도는 힘을 이길 순 없었다. 동휘는 악을 써대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 소리가 근처를 지박령처럼 맴도는 변종들이 들을 거란 생각도 못하고.
“이렇게 하는 거야.”
낙조가 입을 뗐다. 옥정호에서 붕어섬까지 갈 수 있는 보트는 하나. 보트까지는 몇 걸음이 남지 않았다. 낙조는 삐걱대며 걸어오는 변종 한 마리를 보면서 동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둘 다 감염되기 직전에 돌아가서, 선택을 받는 거지.”
“무슨, 무슨 선택, 씨발!”
“홍해화가 누구한테 자기 풀을 줄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씨발, 누구 맘대로!”
“아니면 혼자 뒤지시든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낙조가 동휘를 변종의 앞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아스팔트 위로 구른 동휘는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변종 한 마리 너머로 수 마리가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고 팔꿈치로 바닥을 기어서 낙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개새끼야, 내가 니 신고했어? 안 했잖아. 안 했다고. 입 벙긋 안 했다고! 중사님 상태만 알려달라고 한 거 들었잖아, 새끼야!”
“너는 단 한 번도 중사님한테 충성한 적 없어. 살려고 지랄을 한 거지.”
“씨, 씨발 그게 잘못됐어!? 군대 끌려 들어와서 갑자기 세계가 뒤집어졌는데! 내가 살려고 뭘 하든 씨발 그게 잘못됐냐고!”
동휘는 낙조의 발목을 꽉 붙잡은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변종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뒤를 한 번씩 돌아보면서 울부짖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돌아가서, 돌아가서 내가 다 말할게. 그러니까 나 데려가. 나 좀 데려가. 어?”
“너도 할 수 있는 일들이라며.”
“……총, 총을 줘야지! 나는 너처럼, 너처럼…….”
동휘는 낙조의 바지를 붙잡고 겨우 일어선 다음 말을 얼버무렸다. 낙조는 왼손에 쥔 총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나처럼?”
낙조와 동휘를 발견한 변종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하찮은 말싸움 따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낙조는 서늘한 눈으로 보트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가 한숨을 쉬었다.
“네 군번줄은 누군가 발견해 주길 바란다.”
“뭐? 야, 야 씨발! 나도 데리고 가라고!”
소란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낙조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말싸움에 자신을 붙잡고 있는 동휘를 뿌리쳤다. 그는 낙조와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아예 몸을 던져 총을 두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내 거야! 내가 여기서 그냥 뒤져줄 것 같아?!”
“사는지 죽는지 이젠 내 알 바가 아니지.”
낙조는 왼손을 뒤로 가리며 동휘를 걷어차려 했었다. 그러나 총구가 자신에게 겨눠져 있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동휘의 시선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급하게 손을 떼고서 총구를 잡고 위쪽으로 올리려는 찰나였다.
탕!
동휘의 배를 걷어참과 동시에 총알이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눈을 깜박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뒤로 넘어졌다. 호수로 내려가는 길목 끄트머리에 서 있었던 터라 몸이 사정없이 밑으로 굴렀다. 오른쪽 어깨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돌부리에 걸려 멈췄다. 낙조는 그제야 눈을 힘겹게 들어 올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휘는 배를 맞고 넘어진 상태에서도 손을 덜덜 떨며 자신을 조준하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끝까지…….’
이를 악물고 왼쪽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붙잡았다. 스친 정도가 아닌지 손이 어깨가 닿자마자 짓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트를 타자.’
낙조는 몸을 웅크린 채 정착해 있는 보트 쪽으로 다가갔다. 위쪽에서 동휘가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으아아아악!”
보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귀를 찢는 비명이 들렸다. 낙조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변종들에게 온몸이 붙잡힌 동휘가 눈을 부릅뜨고 낙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딪친 시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곧 얼굴까지 뜯긴 동휘의 몸 위로 변종들이 노란 진액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낙조는 비틀거리면서 보트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물안개가 낀 호수를 가로질렀다. 피가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두 눈과 온몸이 무거웠다.
‘총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그 생각을 끝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