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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44화 (44/202)

44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는 것들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낙조는 온몸을 감싸고 도는 힘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 준다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졌다. 통제할 수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보호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반면에 너무 흥분한다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 되려 몇 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미 낙조의 손가락엔 이파리가 뻗쳐 있었고, 가느다랗게 몸을 모아 바늘처럼 한 변종의 머리를 뚫은 후였다. 하나가 당하자 머리를 까닥거리기만 하고 있던 변종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녹아내린 잇몸과 흘러내리는 치아들이 눈에 담겼다.

“키아아악.”

“께에에에엑.”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낙조는 동휘가 켠 라이트에 의지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시야 안에서만 움직여야 했다.

‘정리정돈을 한다고 생각하자. 한 번에 빨아들이는 청소기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하나씩 치우는 거야.’

낙조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변종과 거리를 조절하면서 공격하는 게 중요했다. 당장이라도 피부를 물어뜯을 것처럼 다가오는 무리는 대부분 나무껍질에 뒤덮여 있었다. 머리를 뚫은 놈과 같은 종자들인 듯했다.

‘운 좋게 뚫었다고 해도 더 두꺼운 놈들이 있을 거야. 찌르는 것보다 더 간편한……, 총처럼 무언가를 쏘면……, 쏴. 하나씩 다 뭐든 꺼내서 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 안에서 액이 끓기 시작했다. 다만 전처럼 뿌리는 게 아닌, 액체가 한 방울씩 만들어져 고체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총탄을 장전하듯 이파리가 형태를 다시금 갖추었다. 낙조는 권총을 쥔 것처럼 손을 검지를 앞으로, 엄지를 위로 뻗고서 방아쇠를 당길 준비만 남겨 뒀다.

‘다 쏴 버려.’

속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허공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퍽!

“까으아아아악!”

가까이 있던 변종이 괴로운 울음을 퍼뜨리며 풀썩 쓰러졌다. 손에서 발사된 게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저 단단한 껍질들을 단번에 뚫을 만큼 뾰족하거나 단단한 것이라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다.

손바닥 안에선 계속 액체가 끓고, 작은 덩어리들로 쪼개지고 있었다. 약초의 효능이 다할 때까지 이 능력은 무한이라는 뜻이었다. 낙조는 최대한 급한 맘을 먹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퍽, 퍽, 퍽!

정확히 머리만 조준하면 될 일이었다. 낙조는 허공의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반동으로 튕겨 나가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았다. 거대한 성벽 같았던 변종의 무리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속도를 조금 더 내야 해.’

낙조는 빈틈이 생긴 곳을 향해 굴러 직접 변종의 소굴에 들어갔다. 강하게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붙잡는 변종들을 향해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손바닥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상병님! 총 좀 쏘십시오!”

빛이 한곳에 고여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얼어붙어 있는 걸까. 낙조는 팔꿈치로 달라붙은 변종의 머리를 찍어 내리며 소리쳤다.

“그아아아아악.”

“구에에엑, 웨에에엑.”

진액이다. 낙조는 몸을 왼쪽으로 굴러 변종이 토해 내는 진액을 피했다. 금세 진액으로 뒤덮인 바닥 위로 변종들이 발을 디뎠다.

“상병님!”

다시 한번 동휘를 불렀다. 빛은 비치고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낙조는 뜨겁게 달구어진 손바닥에도 신경 쓰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려는 변종들은 죄다 머리통이 뚫려 비척대며 넘어졌다.

“존나게도 많네, 망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변종들은 발로 짓눌렀다. 비를 몇 번 맞으며 단단해진 건지, 이제는 한두 번 짓밟는다고 머리가 터지지 않았다. 낙조는 가쁜 호흡을 정리하려 노력하면서 팔꿈치로 바닥을 기었다. 수십 발은 쏜 것 같은데, 아직도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의 변종이 남아 있었다.

“상병님, 안 들립니까!?”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퍽, 퍼억, 푹, 찌걱……. 제각기 다른 파열음을 내며 쓰러지는 변종들을 밀어냈다.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 혹여 동휘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즉사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치명상을 입히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빨리, 더 빨리……’

낙조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꽉 붙잡고 허공의 방아쇠를 길게 잡아당겼다. 동시에 손바닥에서 튕겨지면서 만들어지던 덩어리들이 연발로 쏴지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타타, 파파파파팍, 퍽, 파악, 파팍!

연기만 피어오르지 않을 뿐, 손바닥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과열된 상태였다. 낙조는 이를 악물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다가오는 변종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점차 힘이 빠져나가려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허겁지겁 다시 약초를 코에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켰다. 아직 은은하게 남은 향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머리가 잠시 돌아 어지러웠지만 다시금 중심을 잡고 설 수 있었다.

타타타탁, 퍼퍽, 펑, 팍, 파파팍, 팡!

어느 놈은 머리가 터지기도 했고 어떤 놈은 다리가 잘려나가 상체만 남아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덩어리가 날아가기도 했다. 낙조는 있는 힘껏 방아쇠를 계속 당기면서 손이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을 참아 냈다.

“아악!”

너무 전방과 좌우만 주시한 탓이었다. 뒤에서 달려든 기척을 느끼지 못한 낙조의 목덜미를 변종이 깨물었다. 피부를 파고드는 게 느껴지는 순간 손을 뒤로 뻗어 머리통을 날려 버린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진액이 피에 섞여 몸에 들어갔을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낙조는 물린 곳을 왼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손바닥에 피가 얼룩져 묻어 나왔다.

“상……, 상병님……!”

거의 호소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이제 몇 마리 남지 않았다. 낙조는 다시 손을 들어야 했다. 숨은 가쁘고 심장은 쉬지도 않고 요동쳤다. 방심한 탓에 부상까지 입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낙조는 조금 흔들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 안에서 끓는 느낌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남은 것은 다 뱉어 내야 했다.

‘다 명중시켜야 해.’

아랫입술을 깨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퍽, 한 마리가 뒤로 넘어갔다.

“캬아아아악!”

이미 한쪽 다리는 잘려 나간 변종이 바닥을 기어 오며 괴성을 내질렀다. 낙조는 손을 내려 정확히 놈의 이마를 겨누었다. 겹겹이 쌓인 나무껍질을 뚫고, 그 사이에서 진액이 팍 튀어 올랐다.

퍽, 퍼억……, 탁, 팍!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바닥에 남은 열감과 오른손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낙조는 겨우 자리에 서서 방아쇠를 당겼다.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항상 이딴 식이지, 개 같은 거.”

손바닥에 남은 고체 덩어리가 없었다. 아무리 허공의 방아쇠를 당겨봐도 아무것도 나가지 않았다. 낙조는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자신에게 달려드는 변종을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힘을 쓰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고개를 돌렸다.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곳으로. 어둠 속에서 빛이 터지고 있는 곳은 분명 동휘가 서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곳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저 카페 앞에 세워진 입간판 위에 소총 하나가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낙조는 입간판 쪽으로 달렸고, 변종은 낙조가 뒤튼 방향을 따라 쫓아왔다. 소총을 낚아채고 몸을 돌리는 순간 변종의 찢어진 입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탕!

다행히 장전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총알은 변종의 가슴을 꿰뚫었다.

“키엑……, 께에엑, 에에으아아악.”

두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변종은 크게 벌린 입을 바르르 떨면서 낙조를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나무껍질 사이로 보이는 두 눈알이 희번덕거렸다. 놈은 곧 숨을 가쁘게 내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낙조는 그제야 총을 떨어뜨렸다.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상을 입은 듯 빨갛게 부은 손바닥 위로 물집이 포자처럼 다닥다닥 올라와 있었다.

“진동휘……, 진동휘.”

낙조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다 죽은 목소리로 동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손바닥이 아파 기어갈 수도 없었다. 카페 벽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카페 입구는 꼭 닫혀 있었다. 안에서 걸어 잠갔는지 열리지도 않았다. 낙조는 힘없이 창문을 응시했다. 쓸 수 있는 손은 왼손뿐이었다. 주먹을 쥐고 창문을 두드렸다. 세 번째로 내려칠 때,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신고하겠다고요! 목격 신고요. 백무흠 중사, 백무흠 중사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 달라고!”

깨진 유리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떨어진 소총을 주워 플래쉬로 안을 비췄다. 이리저리 휘젓다가 빛이 멈춘 곳은 동휘가 서 있는 구석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한 손에 들고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곧 빛이 자신의 온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동휘가 천천히 몸을 돌려 세웠다.

“…….”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백무흠 중사에 대해 어떻게든 알아내서 대답해주십시오. 내일 바로 날 구조하러 올 수 있는지도.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동휘는 낙조와 눈을 마주친 채 마저 남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창문이 깨지길래 변종이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

“이걸 생존력이라고 해야 하나, 수명이 길다고 해야 하나.”

동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낙조는 들고 있던 소총을 깨진 창문 너머로 던졌다. 아무렇게나 구르는 플래쉬가 이리저리 사방을 비췄다. 그림자가 태풍에 휩싸인 것처럼 돌고 돌았다.

“내 앞에선 끝까지 안 지려고 하는 거, 다들 약속이라도 했나. 나한테 다들 왜 이러실까.”

낙조가 설핏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말에 동휘의 눈썹이 살짝 비틀렸다. 낙조는 창가에 몸을 겨우 기대어 선 채로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우습냐. 쉬워 보여? 지금까지 산 것도 운빨 같아?”

“영웅인 척하는 건 씨발 너지! 나나 중사님도 할 수 있던 일들이야. 니가 특별하다고 망상에 빠진 걸 남 탓을 하네, 이 개새끼가.”

“남 탓하는 건 너잖아. 남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우세해 보이고 싶은데 막상 그럴 힘은 없고, 그러니까 정치질 하면서 가르치려고 들지. 미안한데 나 그렇게 좆밥 아니다.”

“씨발놈이 뭐라는 거야, 뒤지고 싶어 진짜?”

동휘가 눈을 부릅뜨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미 몸에 남은 힘이 없기 때문에 반항할 생각은 없었다. 코앞까지 동휘가 다가왔을 때, 낙조는 그저 눈만 겨우 뜨고 있을 정도로 힘이 빠진 상태였다. 동휘가 거칠게 낙조의 멱살을 잡아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내가 씨발 뭐? 정치질을 해?”

“니가 그렇게 백무흠을 살리고 싶었으면 백무흠의 계획이고 뭐고 너도 나 내팽개치고 뛰어들었겠지. 너도 숨어 있었잖아. 내가 나가려는 거 붙잡은 게 누구야. 같이 구석에 짱박힌 게 누구냐고.”

“개새끼가!”

동휘가 낙조의 몸을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낮은 창턱 때문에 몸이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유리조각이 살갗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죽어, 씨발아!”

동휘가 악을 지르며 소총을 쥐었다. 어슴푸레 뜬 시야 속에선 총을 든 동휘가 아른거릴 뿐이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손에 힘을 주는데, 순간 전화벨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여기 가만히 있어.”

동휘는 낙조의 배를 한 번 걷어차고서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낙조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서 바닥을 더듬었다. 곧 손안으로 커다란 유리 조각 하나가 잡혔다. “여보세요?” 동휘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잘그락, 유리 밟는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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