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부자 (2)
“수호야! 커피!”
“어, 누나 고마워요.”
수호의 시스템 실을 자주 들락날락거리는 연구원 한 명. 백무흠이 실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서연우가 왜 그리도 홍해화와 고낙조를 갈망하는지 알게 해준 사람. 그녀는 백신 개발 프로젝트에 가담하고 있으면서도 수호를 꽤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댔다. 수호는 그걸 한 귀로 흘리는 척하면서 모두 주워 담았고.
“어우, 우리 팀장님 진짜 가끔 보면 무섭다니까.”
그녀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아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몸을 떨어 댔다.
“뭐, 또, 왜요?”
수호는 스크린에 띄워놨던 백무흠의 프로필을 아래로 내려두고서 모르는 척 물었다. 사실 그녀를 붙잡고 캐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수호의 말에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저러다가 사람 죽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죽지 않을 만큼 영양제 투입하면서, 계속 피 뽑고 뭘 또 주사하고, 관찰하라 그러고, 억지로 먹이고……. 아니,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데도 무섭다니까. 잡혀온 그 양반은 눈 시뻘겋게 뜨고 소리 하나 안 내고.”
“……듣기만 해도 무섭네요.”
“그지? 야, 진짜 실제로 보면 장난 아니야. 잡혀온 그 남자 군인이라면서. 근데 뭔가, 좀 특이한 케이스랄까? 일반인은 아닌가 봐. 뭐 전에 약물 과다 복용을 했는지는 몰라도 혈액 검사 때 이상한 물질이 나와서.”
“이상한 물질이요?”
“어머, 나 또 여기까지 얘기해버렸네. 그냥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리 팀장님 배로 우리 굴리잖니. 나 화장실 간다고 하고 여기 온 거야. 숨통 막혀서. 고낙조랑 똑같은 샘플을 넣어도 효과가 없으니……, 뭐, 팀장님도 위에서 엄청 깨지겠지.”
거기까지 들은 수호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백무흠의 혈액에서 예상치 못한 물질이 나왔다. 고낙조에게 주사한 똑같은 샘플을 넣었는데도 변화가 없다. 그럼 백무흠이 5년 전 실험을 당할 때 이미 몸에서 특수한 물질을 거부한다거나 멸균시켜 버리는 항체가 생겼다는 건데.
연구원은 컵을 잘근잘근 씹다가 가 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오늘도 꽤 괜찮은 수입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수호는 백무흠의 프로필을 다시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보안 등급이 최대치로 걸린 파일이 없나. 아니면 이상하게 파일명을 지었다든가.’
눈을 가볍게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거기서 어떻게 찾아내느냐가 관건이지. 수호의 손이 쉴 틈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백무흠, 백무흠, 백무흠……. 그 이름에 관련된 것은 모두 읽어 봐야 했다. 서연우 그 작자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전까지.
*
동휘는 정신을 차린 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가 기억은 나냐고 물었을 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낙조와 눈이 마주쳤지만 사과는 없었다. 둘 모두 내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낙조는 그저 동휘가 자신을 어느 정도 원망하는지 추측할 뿐이다. 아마 밤이가 멈추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밉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그동안 그 마음을 감추고 지금까지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가.
해화와 지운은 알게 모르게 서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굳이 면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얼굴에 덕지덕지 데일밴드를 붙인 낙조의 얼굴을 보면서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새 손톱이 많이 길었구나. 손톱깎이가 있었는지 내일 찾아봐야겠다. 낙조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주무십니까.”
커튼 너머로 인영이 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낙조를 불렀다. 일부러 커튼을 걷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휘의 그림자였다. 낙조는 협탁 위에 놓인 안경을 쓰고선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겁이 난다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한다면 한 번은 거쳐야 했을 일이었다. 낙조는 대답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커튼을 걷자 서늘한 표정을 한 동휘와 눈이 마주쳤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그는 먼저 등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동휘의 두 손은 텅 비어 있었다. 낙조는 짧은 순간에 그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동휘는 호숫가에 서서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낙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의 입이 먼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중사님에 대한 영웅담을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릴 만큼 중요한 일에 투입된 병사 수도 너무 적었고, 그때 봤던 중사님의 얼굴은 제가 생각하는 영웅이랑은 거리가 멀었거든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수많은 비리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나라가 이렇게 되고 나서……, 중사님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동휘는 차분했다. 무흠에 대해 얘기하는 목소리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한 것처럼 어긋나지도 않았다.
“변종을 처음 본 병사들은 당연히 당황하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른 분대장이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중사님만 아주 침착하셨습니다. 마치 시뮬레이션을 미리 겪은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어떻게 하면 한 번에 변종을 처리할 수 있는지, 몸을 숨기기엔 어떤 장소가 좋은지……, 병사들에게 지시 내리는 것부터 통솔하는 힘까지 모두,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동휘의 말로 전해 듣는 무흠은 지금껏 봐 왔던 그의 모습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무흠의 행동과도 아주 닮아 있었다.
“평택 대피소에서 임실로 가기로 한 날, 중사님께서 직접 이곳에서 겪었던 일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은 동료들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고. 두 번째로는 그곳에 당신과 홍해화 씨를 안전하게 숨기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쯤이면 그곳은 잊혔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낙조는 호수의 표면에 비친 동휘의 잔상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이 너무 어두워 그의 인영만 흘낏 스칠 뿐, 그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휘는 서서히 뒤를 돌아 낙조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나는 왜 중사님이 희생하면서까지 당신을 살려야 할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중사님만큼 리더십이 있거나 통찰력이 높은 사람이 아니니까. 변종을 맨몸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이유가 중사님의 목숨과 비례하다고 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홍해화도 마찬가지야. 둘이 얌전히 청주로만 갔으면 이러고 있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뭐가 그렇게 어마무시해서 다들 감싸 안고 난리냐고!”
“상병님, 일단 중사님을 구할 방법을―”
“내일 긴급 연락망으로 청주에 신고를 넣을 겁니다. 전화해서, 중사님이 무사한지 확인할 겁니다. 위치가 탄로나든 나는 이제 상관없어. 홍해화랑 도망가려면 내일이 지나기 전까지 떠나. 이게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정이니까.”
자신의 세상을 받쳐 주고 있던 기둥 하나가 무너지면 어떻게 사람이 기울어지고 망가지는지 알 수 있다.
동휘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한참 낙조를 노려보다가 먼저 지하실로 내려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이후에도 낙조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이곳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눈이 서서히 깜박였다.
*
“그러니까 혈액 구조부터 달라졌다고……, 고낙조, 듣고 있어?”
“아, 미안해요.”
“아까부터 완전 그냥 맛탱이가 갔네. 잘 들어. 지금은 네가 원하는 대로 네 손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지만, 얘가 전두엽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네가 손한테 끌려다닐 수가 있다고.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 통제할 힘을 길러야 해.”
“계속 자라나는 것 같은데……, 성장을 막는 건 어렵나요?”
“네가 계속 살아 있는 한 어렵지. 너랑 같이 영양분을 나눠 먹고 있는 사이인데. 아, 그리고 그 손에서 자라나는 식물의 표본이 뭔지 알아내긴 했어.”
밤이는 낮은 목소리로 종이를 뒤적거렸다. 여러 식물 이름들이 적힌 종이를 훑던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낙조는 밤이의 말을 들으면서도 지난밤 동휘가 남긴 말 때문에 쉽사리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털어 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퍼포리아 사라세니아. 식충식물이야. 벌레를 먹는 식물. 기본 유전자는 얘라서 모양도 얘랑 비슷하게 나오는 거야. 여기에 뭘 섞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다른 기생식물이 섞였겠지.”
식충식물……. 낙조는 밤이가 가리키는 식물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통 모양에 핏줄 같은 붉은 무늬가 새겨진 식물이었다. 자신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것과 모습이 상당히 일치했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 봐줘서 고마워요.”
“어디 가. 너한테 도움 좀 되는 냄새 찾고 싶다며.”
자리를 뜨려는 낙조를 붙잡고 밤이가 낙조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손을 펴 보니 솔잎같이 생긴 이파리 몇 장이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향이 죽지 않도록 종이나 휴지에 꽁꽁 싸매 놔. 무슨 효과를 발휘할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있는 연구 결과로 추측해 봤을 땐 활동성이 아주 높아진다고 하니까……, 몸을 더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생각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 주는 거지.”
낙조는 잎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떠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무흠이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린 곳이라면 숨길 수 있는 한 끝까지 숨겨야 했다. 어쩌면 자신의 한계와 함께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도 있었다.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낙조에게 필요한 희망의 이름은 그것뿐이었다.
*
동휘는 일찍이 잠들겠다며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낙조는 이불 안에 물건들을 쌓아 놓고 자신이 누운 척 이불을 덮었다. 그리곤 먼저 몰래 밖으로 나가 주택 현관 쪽에 숨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숨죽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동휘는 소총까지 메고서 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홀로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넜다. 그의 보트 엔진 소리가 꺼질 즈음 낙조는 보트 쪽으로 달려갔다. 남은 보트에 발을 올리려 하는 순간, 동휘가 엔진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낙조는 한숨을 짧게 내뱉고 다시 한번 호수에 몸을 던졌다.
숨을 다시 쉬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고통이 뒤따랐으나 한 번 겪어본 것을 해내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낙조는 호수 깊이 들어가 유유히 헤엄쳤다. 멀찍이서 이전에 보았던 아이들이 유치를 딱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진 않았다. 낙조는 조금 서둘러 물에서 몸을 빼냈다.
젖은 몸이 무거웠다. 게다가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을 베어 내듯 날카로웠다. 낙조는 이를 악물고 동휘가 갔을 법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전화기가 있는 곳을 찾아갔을 것이다. 저번에 카페로 물건을 구하러 갔을 때 전화기의 위치를 미리 봐 놓지 않았을까. 카페마다 전화기는 있을 테고, 선만 끊이지 않았다면 긴급 연락망으로 청주에 신고 전화를 거는 건 충분하다.
동휘와 지운이 갔었던 방향은 오른쪽. 낙조는 옷에서 물을 짜내면서 조금 조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카페 내부엔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건물까지 가기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낙조는 주변에 변종의 기척이 들리지는 않나 살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씨발, 좀 걸려라, 걸리라고…….”
한쪽 문이 열린 두 번째 건물에 도착했을 때, 문틈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조는 몸을 납작하게 웅크리고서 투명한 유리 벽 너머를 살폈다.
카페 카운터 안쪽에 선 동휘가 수화기를 들고서 버튼을 계속 누르는 게 보였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지, 그는 욕을 내뱉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내려놓았다를 반복했다.
“이 씨발!”
십여 분이 지나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휘는 전화기를 통째로 들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쾅,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고요했던 주변은 울렸다. 낙조는 혹여 변종의 귀를 건드리진 않았을까 싶어 더욱 주위를 경계했다.
곧 동휘가 소총을 쥐고 건물을 나왔다. 그는 다음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낙조는 그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쯤 몸을 움직였다. 반쯤 걸어갔을까, 안개에 뒤덮인 시야에서 총소리가 난데없이 들려왔다.
탕, 탕!
총소리는 동휘가 앞서고 있는 곳에서 터졌다. 낙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쪽으로 뛰었다. 곧 새카만 시야에서 사격 자세를 취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동휘가 보였다.
“뭐야, 씹, 어떻게, 어떻게 쫓아왔어.”
“조용히 해요. 주변에 변종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둘의 사이로 두꺼운 껍질이 몇 겹이나 쌓인 팔이 불쑥 내밀어졌다. 동휘가 흐업, 하고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가로등도 켜지지 않는 거리라 그런지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낙조는 동휘와 조금 거리를 벌린 채 소리쳤다.
“플래쉬 켜요!”
그의 소총에 플래쉬가 장착돼있던 걸 봤기에 망정이었다. 낙조의 외침에 동휘가 서둘러 불을 켰다. 순식간에 환해진 시야에 낙조는 막힌 숨을 토해냈다.
“허…….”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저 소리를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포위당한 건 낙조와 동휘였다. 수십 마리가 서로 똘똘 뭉친 채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고 있었다.
「몸을 더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생각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 주는 거지.」
낙조는 주머니에 쑤셔 놓았던 휴지 뭉치를 꺼냈다. 겹겹이 싸놓은 뭉치를 풀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처음 맡아 보는 향이 콧속을 강하게 찔렀다. 눈물이 조금 맺힐 만큼 강한 향이었다. 낙조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떠냈다. 물에 고여있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몸을 휘감는 힘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려는 느낌이 들었다.
안전고리가 빠진 수류탄이 허공을 헤집고 날아가는 기분. 낙조는 그것이 된 감각을 들이키며 변종 떼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