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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42화 (42/202)

42화. 내부자 (1)

밤이는 집중하여 연구할 게 생긴 건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자료 보관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떤 걸 보고 있느냐 물어도 어물쩡 대답하며 넘어갈 뿐, 정확하게 제시해 주진 않았다. 무흠이 청주로 잡혀가고 며칠이 지났다. 쾌활했던 분위기는 많이 식었다. 무흠의 부재에서 시작된 동휘의 침묵이 큰 이유를 차지했다.

붕어섬에 도착했던 첫날에 발견한 시신은 신원만 확인하고 호수에 던졌는데, 왠지 모르게 시신이 누워 있던 게 꺼려져 웬만하면 그 바닥을 밟지 않았다. 낙조는 점심을 가볍게 먹고 자료 보관실과 연결된 온실로 가 볼까 싶어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십니까.”

동휘의 목소리였다. 그는 남은 탄알 개수를 세고 있었다.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낙조는 보관실 문으로 연결된 복도 쪽으로 말없이 빠지려다 입을 열었다.

“뭐 좀 보려고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상병님께 보고해야 합니까.”

“비밀이 생기는 건 좋지 않습니다.”

꼭 명령어가 입력된 로봇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무흠의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컸을지는 대략 알지만, 동휘는 아예 그를 대신하는 것처럼 일행들을 감시하는 행동올 보였다. 관찰과 감시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네요. 혼자 도망치는 비겁한 짓 같은 건 안 하니까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자료 보관실을 지나쳐 오면서 낙조는 밤이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방해가 될까 싶어 굳이 무얼 묻진 않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려주겠지. 그렇게 온실에 들어섰다.

진동휘는 무흠의 대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걸까? 낙조는 텁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생각했다.

‘백무흠이 신도 아니고, 뭔 놈의 대리자야.’

각양각색으로 피어난 잎사귀들을 헤쳐 나가면서 낙조는 풀 냄새가 아닌 향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이 나는 쪽으로 끌렸다. 꽃에서 이런 향기가 나나?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하우스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큰 나무를 지나 끝부분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고낙조 씨! 어디 계십니까!”

입구 쪽에서 동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뭇잎과 여러 식물의 이파리에 시야가 막혀 그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다. 낙조는 잠깐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향에 이끌려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게 뭐야.”

길의 끄트머리에 도달했을 때 나타난 건 거대한 유리관이었다. 유리관은 죄수와 면회를 할 때 나누어진 칸처럼 서로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낙조는 그곳을 손으로 어루만지다 유리관 안에 놓인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겉보기엔 남다를 것 없는 넝쿨이었다. 다른 점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굵기가 더 굵고, 크고, 아주 긴……, 넝쿨이었다. 넝쿨에 달라붙은 이파리는 다 시든 것처럼 풀이 죽어 있었는데, 꼭 어린이의 손처럼 자라다 만 크기에 다섯 갈래로 나뉘어 있어 이유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럼 향기가 나는 곳은 어디냐. 낙조는 천천히 눈을 굴려 넝쿨의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손을 닮은 이파리가 달려있는 것 빼고는 다른 게 없는……,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고?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눈을 빠르게 깜박이자, 낙조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또 헛것이 보이나.”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변종을 떠올렸다. 요 며칠은 별 탈 없이 지낸 것 같은데, 괜히 이상한 향을 맡았다고 몸이 스스로 환각을 불러 일으킨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낙조는 이마를 짚은 채 다시 유리관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낙조 앞 유리에 완전히 달라붙은 넝쿨 위로 사람의 입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입술이라고 하기엔 주름이 너무나도 많고, 두툼한 껍질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안엔 길이가 제각기 다른 이빨이 무언가를 씹는 것처럼 딱딱거리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온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던 향이 더욱 강해졌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내리누르는 향의 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유리관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그 범위로 도망가야 한다고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같은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씨발, 어딜 가!”

다리에 힘이 풀려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낙조의 목을 팔로 조였다. 단단한 팔뚝이 몸을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낙조는 겨우 눈을 올려 자신을 잡아챈 이를 올려다보았다. 동휘였다. 그는 어딘가 초점이 나간 눈을 하고서 낙조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상, 병님, 컥, 이것, 놔, 윽.”

뒤늦게 두 손으로 동휘의 팔을 긁고 떼어 내 보려 했지만 힘이 워낙 단단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른팔에 잔잔하게 숨겨져 있던 힘도 발휘되지 않았다. 동휘는 낙조의 목을 조인 채 하우스 구석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몸부림을 치느라 몇몇 식물의 줄기나 이파리가 뜯겨 바닥에 떨어졌다. 끌려가는 자국이 흙 위로도 남았다.

‘이 새끼 진짜 돌았나? 처음부터 따라온 건가?’

구석에 다다르자, 동휘는 낙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겨우 숨통이 트여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쏟아 내는데, 난데없이 구타가 시작됐다. 동휘는 낮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낙조의 배를 걷어찼다. 낙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손을 뻗어 바닥의 흙을 쥐었다.

「저희, 끝까지 같이 있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지랄하고 있네. 지랄하고 있어. 낙조는 순간 스쳐간 동휘의 말을 떠올리면서 손에 쥔 흙을 위로 뿌렸다.

“악, 이 개새끼가!”

정확히 눈에 들어갔는지 구타가 멈췄다. 낙조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숨을 골랐다. 왜인지는 몰라도 넝쿨의 향기를 맡은 이후부터 몸에 힘이 돌지 않았다. 정신만 제대로 차린다면 맞붙을 수도 있었겠지만, 진동휘의 눈은 이미 맛이 나간 상태였다.

‘냄새 때문이야.’

낙조는 이유 없이 그와 온실에서 구르며 애들처럼 주먹이나 날리고 싶지 않았다. 겨우 한쪽 눈을 뜬 동휘가 다시 낙조를 잡아채려고 하는 순간, 낙조는 허리를 굽혀 동휘의 왼쪽 옆구리 사이로 피했다.

“거기 안 서!”

어디가 나가는 길이었지? 온실 안은 온통 비슷해 보이는 식물뿐이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막히는 길로만 가지 않으면 될 텐데. 동휘의 격양된 목소리가 온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정도면 송밤이 그 사람도 들었을 텐데. 낙조는 의아함을 가지면서도 그의 손을 피하느라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긁히고 베이며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무렵 시야에 온실 문이 들어왔다. 꽉 다물린 문을 보고 낙조는 조금 더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억센 손아귀가 낙조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끌어냈다.

“씨발, 너 때문에 다 죽었어! 너 하나 때문에!”

동휘는 낙조를 넘어뜨리고 배 위에 앉은 후 멱살을 쥐어 틀고서 소리쳤다. 핏발이 터질 것처럼 선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낙조는 동휘가 내뱉은 절규에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니가 얌전히 청주만 갔으면 다 살았을 건데! 죽어야 할 이유도 없이 다 죽었다고! 그 어린 애들이, 너 때문에…….”

주택에서 변종들에게 당한 이등병들을 말하는 듯했다. 낙조는 멱살을 쥔 동휘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떨어뜨렸다. 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다. 살덩이에 짓눌렸던 날 밤, 무흠에게 무섭지 않으냐고 토로했던 마음이 기어코 온몸을 짓뭉갰다.

“중사님이 왜 미끼를 자초하셔야 했는데! 너는 변종 수십 마리도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숨으란다고 숨냐? 그거 군인 몇 명이나 된다고!”

동휘가 소리를 지를수록 목소리가 갈라졌다. 낙조는 점점 더 강하게 조여 오는 숨통에 겨우 숨을 내뱉으면서도 가만히 동휘만 바라보았다. 동휘는 멱살을 쥔 채 주먹으로 낙조의 얼굴을 세게 쳤다. 한 마디씩 내뱉으면서 날아오는 주먹에도 낙조는 가만히 있었다. 퍽,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씨발, 잘못했다고 말이라도 해 봐! 다음은 나냐?! 나 죽는 거 보면서 묵념이라도 할 거야, 이 개새끼야!”

퍽! 쨍그랑!

순간 주먹이 멈췄다. 끊임없이 주먹을 내리치던 동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곤 낙조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낙조는 눈을 떠 위를 바라보았다. 한손엔 깨진 유리 조각을 든 밤이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주변엔 깨진 화분 조각이 즐비했다.

*

“냄새에 홀린 거야.”

“그런 것 같았어요.”

찢어진 입가를 소독하며 밤이가 말했다. 낙조는 덤덤하게 수긍했다.

“그런 것도 변종이라고 볼 수 있나요?”

“원래 그게 오리지널일 수도 있지. 냄새로 사람을 조종하고, 인체의 일부분을 따라하고.”

여기서 개발한 새로운 품종이 최초의 변종이라는 말이었다. 낙조는 입안에 고인 피를 휴지에 뱉어내고서 침대에 가만히 누운 동휘를 바라보았다.

“거기 끝까지 들어갈 줄은 몰랐네. 나도 처음 봤을 때 이상하다 싶어서 바로 빠져 나왔거든.”

“말을 좀 해 주시지.”

“내 탓이냐?”

“아뇨…….”

아무리 변종의 냄새에 홀린 것이라고 해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홀렸다고 해서 평소에 생각지도 않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분명 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마 무흠이 잡혀간 이후부턴 더욱 심해졌을 게 빤했다.

“변종의 향에 인간이 홀리는 건 이례적이잖아요.”

“그러니까 유리관에 가둬 놨겠지. 내가 요즘 보고 있는 자료도 저 넝쿨 관련 자료야.”

“얻은 게 있어요?”

“……폭력성을 극대화 시킨다는 결과밖에 없어. 아직까지는. 실험 시도는 엄청 많은데, 할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갔나 봐.”

밤이는 마지막으로 낙조에게 안경을 건네주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볼이 얼얼했다. 입안도 다 터진 것 같았으나 괜히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낙조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결과 하나가 더 있어요.”

“어?”

“제가 그 냄새를 맡았을 땐, 손이 변하질 않았어요. 힘도 못 쓰고. 완전히 무력화 상태가 됐다고 해야 하나.”

“…….”

“나를 사람이 아닌, 변종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놈이 저 온실 전체를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저 모든 식물들은 개량된 품종이다. 어떤 실험 하에 개발된지는 모르지만, 온실을 가득 채운 향에 모두 취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은 내릴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입을 막고 손발을 묶고 있는 것처럼.

“일단 유리관을 가리는 게 좋겠어.”

“저기…….”

“어?”

유리관을 가릴 만한 천을 찾으려면 쓰지 않는 이불 커버를 모두 벗겨 내야 했다. 밤이는 바로 행동에 옮기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조는 쓰지 않는 침대 쪽으로 가려던 밤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밤이의 시선이 낙조 쪽으로 돌아왔다.

“내가 변종이면, 왜 나는 중사님이 연잎을 태울 때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변종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새로운 품종일 수도 있는 거지.”

밤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낙조는 힘없이 쥐고 있던 밤이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럼 나한테도 통하는 냄새가 있을까요?”

낙조가 조용히 밤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테이블 스탠드 불빛 하나만이 은은하게 낙조의 옆얼굴을 비췄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그런 냄새요.”

밤이는 아무 말 없이 낙조의 얼굴을 내려다 봤다. 아슬아슬한 침묵이 둘을 감쌌다. 꼭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밤이의 눈빛이 낙조의 온몸을 스쳤다. 마른침이 고였다. 낙조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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