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사라진 5년과 돌아오다
수호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폴더에 쌓인 파일들은 자그마치 백오십여 개가 넘어갔다. 하나하나 읽을 시간이 없다고는 했지만, 백무흠이 등장하고부터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몇 년 전부터 식물과 교배시키는 실험을 한 거야.’
[58. 중국에서 훌륭한 샘플이 도착했습니다. 혈액순환이 일반인보다 300퍼센트는 더 빠르고, 피도 맑습니다. 비린내는 거의 나지 않으며 12시간 동안 피를 뽑아도 빈혈 증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뭘 하려고 하는 거야?’
[74. 피마자 실험자들은 이제 거의 의욕을 잃은 듯 보입니다.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하죠. 보고서는 금방 완성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6. 피마자 실험자들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부작용 증세를 보입니다. 온몸의 털이 빠지고 공격성이 높아졌습니다. 부작용이 없는 한 명은 그대로 실험실에 두고, 모두 격리시켰습니다.]
[87. 말씀하신 대로 피마자 실험은 보류로 돌렸습니다. 남은 한 명은 전신마취 후 약물을 섭취시켜 기억을 지우겠습니다.]
[91. 곧 가습식물 교배 실험이 시작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성공한 사례가 워낙 많으니 안건은 금방 통과될 것입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부작용이 없는 한 명에 대한 얘기는 87번 파일로 끝났다. 그를 어떻게 했는지, 어디로 가게 두었는지는 그 어디에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보안 등급을 최우선으로 끌어올렸다고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정말 요점만 적은 얘기들이었다. 이것만 갖고선 그곳에서 정확히 어떤 실험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수호는 마지막 파일까지 모두 읽고 나서 로그아웃했다.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GPS 칩을 심었다고 했지.’
고작 자신이 열어 본 파일은 동굴 입구에서 발견한 돌멩이 하나 정도의 얘기일지도 모른다. 더 엄청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없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다.
GPS 추적 시스템을 켠 수호는 잠시 고민했다. 백무흠의 위치를 알아내면? 백무흠은 고낙조와 같이 있을 게 빤하니까 바로 서연우에게 보고하고? 그게 제대로 된 과정일까?
백무흠에게 GPS가 달려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면? 아, 그게, 프로그램 뭣 좀 만지다가 보면 안 될 것 같은 게 있어서 보다가 알아냈습니다! 하냐?
수호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막상 GPS 추적 시스템을 켜놓고 보니 백무흠의 이름을 검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자꾸 멈칫거렸다.
“어디 있는지만 보는 거야, 그냥, 살아 있는지만.”
수호는 작게 중얼거리면서 무흠의 이름을 두드렸다. 곧 시스템이 돌아가고, 위성에서부터 인식된 위치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가슴이 점차 빨리 뛰었다.
“금수호 씨, 오늘은―”
“―어어어어어어, 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연우가 큰 화면에 띄워진 GPS 추적 시스템을 보고 말을 멈췄다.
아, 씨발 왜 하필 이때 들어오냐.
수호는 고개를 돌리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추적을 끝낸 시스템은 무흠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그가 있는 위치를 알렸다.
[대한민국 전라북도 임실군 운안면 옥정호 붕어섬]
‘붕어섬……? 구조작전부대로 투입됐던 곳이잖아.’
수호는 눈을 크게 뜨고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저게 뭐예요?”
연우가 수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백무흠, 이란 이름에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수호를 다그쳤다.
“찾았어요? 저기에 백무흠이 있다는 거냐고요.”
“그게, 그러니까.”
“빨리 말해요!”
“네, 네. 그렇다네요. 프로그램이.”
수호는 두 손을 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난 모르겠다.
연우는 수호에게서 확답을 얻자마자 센터 내를 모두 연결하는 수화기를 들었다. 곧 버튼을 꾹꾹 누른 연우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소장님, 찾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큰 스크린에 띄워진 백무흠의 얼굴에 고정돼 있었다.
“전라북도 임실군 운안면 옥정호. 붕어섬입니다. 당장 군사 풀어 주세요. 오늘 안으로 잡아야 합니다.”
수호는 두 눈을 감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언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처럼 마음 한쪽이 뻐근했다.
*
무흠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조용히 낙조와 밤이만 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둘을 자료 연구실을 지나, 접근금지 시켜 놓은 온실하우스로 데려갔다. 무흠은 그곳에서 녹색에 얇은 이파리가 여러 갈래로 뻗은 식물을 뿌리채 뽑아냈다. 이파리는 삼엽충의 껍질의 무늬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파리를 두어 개 뜯더니 씹어 삼켰다.
“야.”
“준비하는 겁니다. 5년 동안, 그 누구한테도 해본 적이 없는 얘기라.”
그는 하우스를 나가 작은 종이와 라이터를 꺼내더니, 종이 위에 이파리를 찢어 넣고 종이를 말았다. 낙조는 그 끝에 불이 붙는 걸 지켜보면서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2016년 5월 26일, 실험체한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연구소에 구조를 하러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 이상했단 건……, 너무 고요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연구소장과 연구원들이 우리를 반겨 줬습니다. 구조 요청을 한 사람들 같지가 않았죠.”
운을 뗀 무흠의 눈은 약간 풀려있었다. 항상 단정해 보이는 듯했지만 어딘가 비틀린 시선을 숨기지 않았던 눈매는 은은한 살기를 띄웠다.
“그들은 실험체들을 뒤에 모아 놨으니 호수에 던져 달라고 했습니다. 연구원들이 말한 실험체들……, 어제 고낙조 씨가 만난 변종들일 겁니다. 제가, 제 손으로, 던진 아이들입니다.”
종이를 빨아들이는 무흠의 시선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입으로 쏟아내는 이야기임에도, 꼭 눈에 담아뒀던 지난 시간들을 토해 내는 것처럼.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원들 모두 실험체가 되었습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실험체 말입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저를 제외하고 다른 대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기억나는 말로는 격리를 시킨다……, 그 말뿐이군요.”
낙조는 무흠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다. 구석에 미동도 없이 쪼그려 앉아있는 변종, 아니, 그의 전우.
“기억이 다시 시작됐을 땐 5년이 흘러 있었습니다. 저는 환대를 받으며 부대에 복귀했습니다. 중사를 달았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대원들은 작전 중 모두 전사했고, 저 혼자 살아남았다는 영웅담이 부대에 떠돌았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연기에 무흠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 무흠은 길게 연기를 내뱉곤 남은 이파리를 낙조에게 건네주었다.
“용기를 내고 싶을 때 쓰면 좋습니다.”
“……그럼 중사님이 말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예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무흠의 무거운 목소리가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어림짐작했다. 무흠이 직접 꺼낸 이야기가 과연 진짜인지는 판가름할 수 없지만, 이곳에 남은 기록까지 그가 미리 조작해두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전적으로 피해자인 무흠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제 대원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면 해서……. 기억 나는 곳이, 이곳뿐이라서.”
중사의 책임을 물음과 동시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는 것. 그간의 공백은 자신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으니 훈장의 무게만큼 입을 무겁게 관리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무흠은 붕어섬에 다시 왔다. 그를 둘러싼 많은 의혹들을 짊어진 채, 부서진 석고상의 조각들처럼 어질러진 기억을 끌어 모아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낙조 씨와 해화 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무흠은 낙조와 밤이에게 사과했다. 밤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지운이 있었더라면 ‘그래도 동료분들을 찾았잖아요!’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 줬을까.
“사과를 하려면 죄송합니다, 하고 끝내야죠. 뭘 뒤에 구구절절 붙입니까?”
밤이가 따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낙조가 조용히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밤이는 매서운 눈매로 무흠을 응시했다. 무흠은 밤이의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한 번 더 낙조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무흠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낙조는 지운만큼 살갑지 못했고 위로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무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낙조는 무흠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이 받은 이파리를 다시 무흠에게 내밀었다.
“저도 말아 줘요.”
이곳은 안전하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변이 없는 한 계속 몸을 숨기며 해화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로도 낙조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흠은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채 낙조를 바라보다가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이미 조금 취한 상태인 그는 느리게 잎을 말았다. 낙조는 그가 붙여주는 불을 빨아들이곤 눈을 질끈 감았다.
“팔 걷어 봐.”
그때까지 말이 없던 밤이가 주사기를 들고 무흠에게 말했다.
“어쨌든 실험당했던 거면 몸에 물질이 남아 있을 수 있어. 피마자. 맞지? 독성 물질이 있는 놈이야. 갑자기 픽 쓰러지면 호수에 던져 버린다.”
툴툴거리는 어투였으나 정말로 그러지 않을 거란 걸 무흠과 낙조 모두가 알았다. 그녀는 뽑은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다른 용액과 섞어 반응을 확인했다.
“피는 멀쩡하네. 무슨 인간병기야? 5년 동안 말도 안 되는 실험을 당했는데.”
“아마……, 제 몸에 뭘 넣었을 겁니다. 정상인처럼 보여야 하니까.”
낙조는 정수리에서 연기가 새어나가는 느낌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술에 만취한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몸의 중심을 잃은 듯 시야가 휘청거렸다.
“어어…….”
“낙조 씨, 괜찮습니까?”
“얘 완전 맛 갔는데?”
무흠과 밤이가 주고받는 목소리도 멍멍하게 울렸다. 낙조는 고개를 털어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분명 무흠은 용기가 필요할 때 사용하라고 했는데, 용기가 아닌 다른 힘이 몸속에서부터 기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잠, 잠깐만요.”
낙조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무흠이 그 몸을 부축해주려는 순간, 낙조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붉은 이파리로 변해 벽을 세게 날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가루가 날렸다.
“와, 저건 무슨 식물이래.”
“근데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은 없었는데…….”
무흠이 곤란하다는 듯 웃으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낙조는 여전히 머리를 붙잡은 채 오른팔을 뻗고 있었다.
“무흠 씨, 이거……, 급할 때 쓰기 좋겠는데요.”
“그 전에 낙조 씨가 정신을 좀 차리는 게……, 어, 방금 내 이름 부른 건가? 친밀감이 좀 높아졌나 봅니다.”
낙조는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몸이 똑바로 중심을 잡길 기다렸다. 몇 번 길게 호흡하고 나자 정신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른팔은 가시지 않는 흥분에 꿈틀대고 있었다.
“야, 고낙조, 좀 더 보여줘 봐!”
밤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쾅!
“아저씨, 누나!”
한참 밤이가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리더니 지운이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가장 먼저 표정을 지운 무흠이 자리에서 나아가 물었다. 지운을 뒤이어 해화와 동휘도 따라 달려왔다. 동휘가 외쳤다.
“누가, 누가 왔습니다. 지하실 문을 부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