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37화 (37/202)

37화. 수상한 편지

“옛날엔 실험소로 쓰였다?”

옥정호 붕어섬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한 수호는 빠르게 줄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한 문장에서 스크롤 내리는 걸 멈췄다.

“무슨 용도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는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 무슨 실험을 진행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어차피 고낙조 목격 신고 연락은 지금까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연우에게 정리하여 올릴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었다.

[관리자 권한 필요]

무지막지하게 받은 파일 속에서 자그마한 창 하나가 스크린 위로 떠올랐다. 수호는 깜박이는 창을 보고서 살짝 미소 지었다.

“너구나?”

찾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른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명쾌하게 방 안을 울렸다. 수호는 빠르게 프로그램에 접속하여 파일에 걸린 권한 등급을 수색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이제껏 파일에 걸린 보안 등급이 관리자까지 올라간 적이 없었는데. 파헤칠수록 제게 즐거움을 주시네요.

수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까만 창에 온갖 코드를 입력했다. 이곳도 보니까 아주 광산이네, 광산이야. 수호는 센터에서 보관하고 있는 온갖 자료들을 수색하면서 즐거움에 몸을 떨었다.

[보안 접속]

얼마 가지 않아 구식으로 보이는 프로그램의 창이 떴다. 창에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아이디 카드 넘버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로그인이 되는 형식. 수호는 창을 옮겨 나열돼 있는 모든 넘버를 읊다가 ‘master’가 적힌 아이디를 확인했다.

[확인중입니다.]

보통 ‘로그인 중입니다’라고 하지 않나? 꽤 오랫동안 돌아가는 로딩 창에 수호는 등받이에 몸을 묻고서 찬찬히 프로그램이 재생되길 기다렸다.

[‘관리자’로 프로그램에 접속합니다. 자료 관람 기록은 로그아웃 시 모두 자동 삭제됩니다.]

“뭐야?”

꼭 에러 창이 뜬 것처럼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곧 화면이 바뀌더니 데이터가 숫자 순대로 정렬돼 목록에 떴다. 파일명은 숫자로만 구성돼 있었다.

“하나하나 볼 시간 같은 게 없는데.”

수호는 작게 불평하며 아무 파일이나 열었다.

[14. 고아인 5세 남아를 돌보고 있습니다. 말도 잘 듣고, 주는 대로 잘 먹습니다. 말은 할 줄 모르나, 글은 읽을 줄 압니다. 실험을 앞두고 가장 건강한 상태로 만드는 중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쓴 편지인 듯했다.

“그래서 그 ‘실험’이 뭔데?”

무표정한 얼굴로 글을 읽은 수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소득 없는 조사는 시간만 날리는 꼴이다.

[19. 첫 성공입니다! 완벽한 수중식물은 아니지만 뇌에 뿌리가 내린 걸 확인했습니다. 이제 호흡기관을 실험할 예정입니다.]

“수중식물……?”

수호는 짐짓 진지해진 시선으로 파일을 읽었다. 식물, 뿌리. 지금 이 세상에선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이지만 이 파일은 몇 년 전에 생성된 파일이다. 이런 재난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인데.

[21. 말씀해 주신 대로 구조작전부대 대원들이 도착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장성한 청년들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실험을 시작했습니다만, 아쉽게도 모두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원들을 시켜 변종들은 호수에 넣었습니다. 어차피 새 실험체들이 도착했으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우스의 휠을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수호는 빠르게 파일의 생성날짜를 확인했다.

2016년, 5월, 26일.

백무흠이 사라진 해다. 수호는 누가 올까 싶어 문밖을 확인하곤 문을 걸어 잠갔다. 관계자에게 들키는 순간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건 오감으로 알아차렸다.

“하나만, 하나만 더 보는 거야.”

수호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중얼거리면서 파일 목록을 훑었다. 내용대로라면 구조작전부대로 투입됐던 대원들이 실험체로 쓰였다는 말이 된다. 그중에 한 명이 백무흠이었고.

그럼 백무흠도 이 사태가 일어나기 전 변종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와 관련된 실험을 받은 적이 있다……, 라는 말이 된다.

[27. 모든 실험체에게 GPS 추적기 칩을 심었습니다. 대원들에겐 바이러스를 막을 항체를 주사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수중식물은 이후로 미루고, ‘피마자’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철컥.

피마자, 란 단어에 의아함을 품고 있을 때, 문고리가 철컥 돌아갔다. 물론 잠가놓았기에 문이 열리진 않았지만 수호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죽였다.

똑똑.

“금수호 씨. 문 열어요.”

연우의 목소리였다. 수호는 급히 프로그램에서 로그아웃한 후, 완전히 종료시켰다. 허겁지겁 뛰어가 문을 여니 연우가 삐딱하게 선 채로 수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을 왜 잠가요?”

“아니, 그게…….”

“설마 이런 곳에서 이상한 짓 같은 걸 하고 싶진 않겠죠. 신고할 거예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고낙조 목격 신고 같은 건 안 왔어요?”

“한 통도요.”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연우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 듯 악에 받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간 수호의 머릿속에 ‘GPS 추적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백무흠도 그 칩을 심었다면, 지금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을 땐 가만히 있는 게 좋다. 수호는 입술 거스러미를 손으로 뜯으며 연우가 방에서 나가길 기다렸다.

*

“총, 총 내려놓으세요, 상병님.”

지운이 겁먹은 목소리로 동휘를 불렀다. 동휘의 시선은 낙조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봐도 마찬가지였다. 해화는 낙조를 떼어 내려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만 좀 하라고! 도대체 뭐하는 건데!”

해화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낙조는 무흠의 목을 조르듯 멱살을 힘껏 쥐었다가 두 손을 풀었다. 그제야 무표정으로 낙조를 겨냥하고 있던 동휘도 총구를 내렸다. 낙조는 가파른 호흡을 내뱉으면서 입을 열었다.

“고낙조 씨가 궁금해하고 있는 게 뭔지는 알고 있지만, 대답은 해드리지 못합니다.”

무흠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낙조의 공격이 갑작스러웠음에도 그는 꼭 예상이라도 한 듯 여유로웠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무흠은 미동 없는 눈동자로 낙조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이곳으로 누군가 온다는 것, 구조대를 기다리기엔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뿐입니다.”

“장난하지 말고! 아까, 아까 애들 봤을 때도 당신들 둘만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건데. 우리를 걸고 내기라도 했어? 어?!”

“과학자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고낙조 씨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홍해화 씨도 마찬가지고요.”

낙조는 참지 못하고 무흠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무흠의 고개가 돌아갔다. 동휘가 낙조에게 다가서려 하자, 해화가 그 앞을 막았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낙조는 가쁜 숨을 고르면서 아무 말도 없는 무흠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구조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무흠은 불신만을 낳았다.

“주먹다짐 끝났니?”

문가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낀 채 밤이가 말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딱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보여 줄 게 있어. 고낙조, 들어와.”

밤이는 자료실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낙조는 여전히 말이 없는 무흠을 응시하다가 자료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들처럼 싸움질이나 하고……, 여기까지 사이좋게 온 보람이 없잖아.”

그녀는 꼭 선생님처럼 말하면서 파일을 뒤적거렸다. 낙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곁에 서 있기만 했다.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아졌고,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할 수만 있다면 오른팔만 잘라 청주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이게 뭐라고, 이 짓을 하면서…….

“여기 잘 봐. 2016년 5월 실험 기록이야.”

밤이가 목소리를 낮춘 채 한 곳을 가리켰다. 글자가 작아 낙조는 허리를 숙여 그녀가 가리킨 곳을 잘 살펴보았다.

[백무흠/29세/남성/피마자]

그곳엔 무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쉿.”

낙조가 놀라서 허리를 펴자 밤이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낙조는 닫힌 문밖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밤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마자……, 죽음의 물질이라 불리는 ‘리신’이 씨앗에 다량 포함돼 있는 식물이야. 씨앗 말고도 열매가 터질 때 나오는 먼지도 독하지.”

“…….”

“피마자로 무슨 실험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남자가 여기서 피실험자였다는 건 사실이야. 무슨 의도로 여길 데리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분란은 일으키지 마. 같이 데리고 다니는 저 군인은 내가 알아볼 테니까.”

밤이는 조곤조곤 말하고서 파일을 덮었다. 그리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파일을 구겨 넣었다.

2016년.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왜 당신의 이름이 있지. 어째서 이곳에.

무흠에겐 직접적으로 묻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낙조가 자료실을 나왔다. 지운이 무흠과 동휘는 잠시 밖으로 나갔다고 얘기했다. 낙조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생각하려고 하지 마. 그럼 몸만 고생하고, 피곤하기만 하니까.”

해화가 낙조에게 말을 건넸다. 낙조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응, 하고 대답했다.

*

한때 실험자들이 누웠을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는 건 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칸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누군가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낙조는 결국 몸을 일으켜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계절에 맞지 않게 이불은 얇았다. 한기가 조금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붕어섬에도 낙조 씨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무흠과 이곳에서의 연관성을 먼저 찾는 게 중요했다. 처음 수도권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흠은 이렇다 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서연우와 갈라질 때도 그는 당당하게 맞섰다. 그 모든 행동들이 이곳에 오기 위한 것이었는데, 당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누구를 기다리겠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말 함정이라면 어떡하지?’

여태껏 괜찮은 척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차마 말하지 못한 걱정이 있었다. 낙조는 당장이라도 청주에서 보낸 군인들이 쳐들어올까 봐 마음을 쉽사리 놓지 못했다.

‘꼭……, 세뇌당한 사람처럼 말했어.’

자신이 멱살을 잡고 밀쳤을 때, 무흠은 그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얌전하게 낙조의 폭언을 듣고서 차분히 자신이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그 대답은 어떻게 보면 보통 무흠이 말하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코앞에 무흠을 둔 낙조에겐 조금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꼭 컴퓨터에 입력한 명령어대로 말을 하는 느낌.

거기까지 생각하자 골치가 아파졌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바람이나 쐴까 싶어 조심스럽게 슬리퍼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칙, 치칙, 칙.

“안 들리십니까?”

무흠의 목소리였다. 낙조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무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무전기를 든 채 누군가와 계속해서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답이 없었다. 꼬인 잡음이 멈추지 않자, 결국 무흠은 무전을 포기하고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안 주무세요.”

낙조가 입을 열었다. 무흠이 고개를 돌려 낙조를 바라보았다.

“잠이 안 옵니다. 왜인지 저기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

무흠이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무흠이 깊게 잠든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주무시게요?”

낙조가 작은 의자에 앉아 물었다. 무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허공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잠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럽니다.”

*

다음 날 아침, 밤이는 낙조와 해화의 피를 뽑았다. 그녀의 지식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낙조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밤이 뿐이었다.

그녀는 자료 보관실과 실험도구가 있는 실험실 여러 개를 돌아다니면서 오전을 내리 바쁘게 보냈다.

식물을 키운다는 온실 하우스엔 처음 보는 종의 식물이 많았다. 밤이는 모두 개종시킨 거라면서, 독성이 있을지도 모르니 들어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해화 씨, 다리 좀 보자.”

“아……, 네.”

해화도 밤이의 합류를 꺼리는 편은 아니었다. 밤이는 생각보다 실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해화의 발목을 봤을 때도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항체를 가진 인간이 벌써 두 명이나 있다는 건, 더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아직 발견만 못한 거고.’

밤이는 항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그리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의 몸이 막지 못하는 바이러스가 있고, 그걸 또 이겨 내는 사례가 생겨나는 것일 뿐,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섭리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며 얘기했다.

“음……, 새 품종이다.”

“새 품종이요?”

“겨우살이랑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잎사귀 모양이나 향이 달라. 겨우살이과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줄기 기생식물은 아니야.”

밤이는 파일에 해화의 발목에서 피어나는 이파리를 확인하며 자세한 생김새와 특징 같은 것을 적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바이러스를 막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느냐, 이걸 봐야 하는데.”

밤이가 이파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직 우리가 못 둘러본 곳이 많죠?”

가만히 있던 낙조가 입을 열었다. 지운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좀 둘러볼게요. 밧줄 같은 거 없나?”

“……이쪽으로 가면 있습니다.”

고민하는 얼굴로 낙조를 바라보던 무흠이 앞장섰다. 낙조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곧 둘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어둠에 묻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