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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35화 (35/202)

35화. 호수에 잠긴 이야기

마우스 딸깍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수호는 턱을 괸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낙조와 관련된, 혹은 일행으로 파악되는 사람들의 프로필도 깔끔히 정리된 파일을 클릭했다.

[백무흠_중사_보안등급_AA]

군인도 있네. 그리 흥미로운 건은 아니었으나 딱히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파일을 클릭했다.

‘비밀번호?’

고낙조 파일보다 보안 등급은 낮으면서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수호는 같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보았으나 맞지 않았다.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네.’

수호는 바퀴 달린 의자를 쓱 밀어 왼쪽에 있는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무흠, 백무흠…….

이미 켜둔 프로그램에서 백무흠과 관련된 파일들을 찾아냈다. 그가 언제 군에 입대했는지, 부대에 있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충 휠을 내리면서 뚱한 시선으로 문장을 빠르게 읽어내리고 있을 때였다.

“붕어섬 연구소 구조작전부대 병사?”

붕어섬은 또 어디야. 수호의 손이 조금 재빨라졌다. 큰 모니터 위로 GPS가 잡혔다. 전라북도 임실. 조금은 낯설지만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곳. 수호는 위치를 조금 더 확대해 보았다.

“여기에 연구소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이곳으로 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인계받을 때도 ‘붕어섬’에 대한 키워드는 없었다. 수호는 가지런히 정렬돼있는 백무흠의 파일을 하나씩 훑기 위해 비밀번호 탐색에 나섰다.

‘한때 구조작전부대 병사였던 사람이 지금은 수배령이 떨어진 변종과 함께 있다.’

한 문장으로만 지어도 멋들어지는 상황이다. 그 내막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쩌면 고낙조 포획 작전보다 이 부분이 더 수호에겐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을 테다. 수호는 키보드 위로 손을 빠르게 두드렸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런 곳인 줄 알면서도 우리를 데려와요?”

“서연우가 먼저 오느냐, 우리가 먼저 오느냐.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서연우는 이곳에 관심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죠.”

해화의 질문에 무흠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옥정호 붕어섬에 대해선 자세히 모른다는 얘기만 줄줄 늘어놓던 자다. 낙조를 포획하기 수월한 곳으로 데려온 것인지, 아니면 낙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 먼저 파악해야 했다.

“정말 그게 다예요? 여기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낙조가 무흠에게 물었다. 무흠은 동그랗게 모인 일행을 훑어보더니 말하기를 주저했다.

“말씀해 보세요.”

낙조는 체념한 듯 한 번 더 물었다. 신뢰 같은 것은 접어 두기로 했다. 이곳에 그렇게까지 악을 쓰며 와야 했던 이유가 궁금했다. 전우를 잃고,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나를 이곳에 데려와야 했던 이유.

“그건……, 천천히 아시게 될 겁니다.”

동휘가 무흠 대신 대답했다. 그는 소총을 꽉 쥔 채 번득이는 눈빛으로 낙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이곳에서 해부하라고 시키든가요.”

“절대 아닙니다.”

낙조가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를 노크하듯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무흠이 곧장 대답했다. 그는 꽤 복잡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낙조 씨를 실험체로 쓰려는 센터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데려왔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그럼 뭔데요.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설득해 봐요.”

“센터에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숨겨야 했습니다.”

“정당한 이유는 될 수가 없는데요.”

낙조는 피곤한 눈을 하고서 무흠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신을 살리려고 했던 모든 행동들이 동료애보단 지시를 따르기 위해 이루어진 것들이라. 전우애보다 덜한 우정일까.

청주에 가지 않는다고 했어도 이곳에서 피를 뽑고 여러 실험을 했을 건 분명했다. 관리자들이 살아있었다는 가제 하엔.

“어쨌든 실험을 하려고 했겠죠. 홍해화도.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해주면서.”

낙조의 말에 해화가 움찔거렸다. 지운은 해화의 어깨를 감쌌다.

“여기도 변종에게 당했으니, 이젠 어떡할 거예요. 어떻게 보고하실 건데요.”

자꾸만 말에 가시가 돋쳐 나갔다. 낙조는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떠냈다. 무흠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채널을 맞추고 몇 번 누군가를 불렀지만 지하라 그런지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는 동휘를 남겨 두고 위로 올라갔다. 동휘는 말없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섰다.

모두에게 속은 기분이었다. 해화와 지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서연우와 갈라질 때 했던 무흠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피만 뽑을 겁니까? 청주로 가서, 변종과 함께 가둔다거나, 일부러 바이러스를 몸에 투입하거나 하는 계획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미 서연우의 계획을 아는 듯 줄줄 말했었지. 아마 엿들었거나 서연우가 미리 무흠에게 흘렸을지도 모른다. 백무흠은 어느 쪽에서든 출중한 인물이니까.

“너희가 둘러본 쪽은 어땠어?”

밤이가 침묵을 깼다. 지운은 어, 하고 말을 늘였다가 대답했다.

“자료 보관실이 엄청 많았어요. 이런저런 그림이라거나 샘플을 보관하는 냉장고? 같은 것도 있었고요. 아, 식물을 키우는 온실 하우스도 몇 개 봤어요.”

“살아 있는 건 없었고?”

“네. 시신도……, 변종한테 당했다기보다 스스로 죽은 것 같았어요. 입안에 총이 들어 있었거든요.”

지운은 조용히 자신이 본 것을 얘기했다. 밤이는 가만히 서서 지운의 얘기를 들었다. 해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무흠이 무전기를 들고 되돌아왔다. 그는 이곳을 아는 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주변에 변종이 어떻게 투입됐는지 살펴보고, 다시 연락이 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란 지시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요.”

낙조가 물러나지 않고 되물었다. 무흠이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물어야 했다. 도대체 당신의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이 난장판에서도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하려는 이는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알게 되실 겁니다. 직접 만날 테니까.”

무흠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선택했다.

“언제 오는데요? 오면, 어디로 가요?”

아무 말도 않고 있던 해화가 무흠에게 물었다. 무흠은 무전기를 주머니에 넣고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만약 청주로 가는 거면, 나 중사님 죽일 수도 있어요.”

지운이 해화를 가로막고 말했다. 악과 한이 서린 눈빛이 정확히 무흠을 향해 있었다.

“청주는 절대 아닙니다.”

무흠은 결단코 그럴 일은 없다는 듯 얘기했다. 저런 확신이 오히려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낙조는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에 마른침을 억지로 삼켜냈다.

“자료 보관실에 뭐라도 있을 거야.”

밤이가 말했다. 그녀는 열린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낙조는 밤이의 뒤를 쫓았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

“이야……, 경력이 화려하네.”

무흠의 파일에 걸린 비밀번호를 해킹하는 건 수호에게 일도 아니었다. 낙조의 파일도 순식간에 열 수 있었으니. 차근차근 무흠의 프로필을 읽던 수호는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지근해진 카모마일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휠을 아래로 내렸다. 표로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 안엔 무흠이 그동안 어떤 부대에 있었는지, 무슨 업적을 달성했는지, 또 무슨 작전에 참여했는지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이런 사람이 왜 고낙조에게 붙었을까. 수호는 찻잔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다거나.

가만히 연도별로 정리된 무흠의 프로필을 보던 수호가 문득 마우스 휠을 멈췄다. 마우스 커서가 깜박였다.

“…….”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던 무흠의 행적이 딱 끊긴 시점이 있었다. 5년 동안.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수호는 황급히 그 이전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전라북도 임실군 운안면 옥정호……]

붕어섬 연구소 구조작전부대 병사로 투입됐을 때다. 그리고 2년 동안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무흠은 2021년 4월에 부대에 복귀했다. 지난 행적은 그 어떤 프로필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모든 파일을 뒤져 봤지만 그 시간은 모두 비어 있었다.

“도대체 뭐냐…….”

수호는 낮게 중얼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는 성격을 건드려줘서 고맙네요.”

그리고 그는 다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2016년부터 2021년 3월까지의 시간을 정리해 볼 작정이었다. 옥정호 붕어섬 연구소에 관한 모든 정보를 털어 내면, 무언가가 나오겠지.

*

“실험에 사용하는 재료도 잘 정리돼있네.”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던 밤이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자료 보관실은 누가 딱히 난장판을 피운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연도별로 정리된 파일들. 책상 위엔 네임태그가 붙은 USB들이 즐비했다.

“변종이 여기까진 못 들어온 건가.”

밤이의 추측은 단순했다. 그러나 한 귀로 흘려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낙조는 처음 자신들이 갔던 왼쪽 길을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아까 거기, 다시 가 볼게요.”

“너 혼자는 안 돼. 또 이상한 짓 하면?”

“설마 중사님이랑 같이 가라고요?”

“그래도 가장 판단력 좋은 사람이야.”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서로를 잘 알았어요.”

“똑똑한 사람들끼리는 그런 게 좀 통해.”

밤이는 능청을 떨며 낙조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제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무흠을 보면서 낙조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 우리가 가 보지 못한 곳까지 얘가 가 보고 싶다고 하네. 중사님이 좀 맡아 줘야겠어. 나는 자료 좀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밤이는 무흠을 믿는 걸까? 그녀의 연구대상은 나인데도? 낙조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무흠도 곧장 수긍하진 않았다.

“갑시다.”

그가 플래시 라이트를 들고 자리를 뜨자 밤이가 다시 한번 낙조의 등을 떠밀었다. 낙조는 어쩔 수 없이 무흠의 뒤를 따라야 했다.

빈방을 지나고 또 지나, 자신이 정신을 잠시 잃었던 곳까지 지나자 긴장이 조금씩 서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무흠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낙조 또한 그에게 굳이 말을 걸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은 한 명을 찾아야 합니다.”

문득 무흠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두 명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한 명이 이쪽에 있을 거란 확신이 있나요?”

“길은 두 개뿐이니 반반입니다.”

무흠은 어두운 길을 비추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은 어둡고 스산했다. 지하라 그런지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꼭 동굴을 지나는 것처럼 찬바람이 살갗을 긁고 지나갔다. 낙조는 긴장한 몸을 굳힌 채 무흠의 등만 응시했다.

“…….”

무흠이 걸음을 늦추더니 완전히 멈춰 섰다. 낙조 또한 걸음을 멈추고서 슬쩍 앞을 바라보았다.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물은 이미 한가득 고인 상태였다. 무흠은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보았다.

“호수 물입니다.”

무흠이 말했다. 낙조는 비좁은 틈을 비집고 나서서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톡, 톡. 일정한 시간을 두고 떨어지는 물은 차가웠다.

“천장에 금이 갈 정도로 안에서 무슨 충격이 있었던 걸까요.”

낙조가 중얼거렸다. 무흠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가 주먹을 쥐었다.

“밖에서 충격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호수 안에서……, 공격을 했단 말인데요.”

“변종이 물 안에서도 숨을 쉽니까?”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예요?”

낙조는 물을 받은 손을 털어 냈다. 호수로 들어가서 확인할 수도 없고……,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낙조의 눈빛이 변했다.

갇힌 방 안에서 가스가 살포됐을 때도 나는 살았다. 갑자기 숨통이 열리는 기분이었지. 소독제가 몸에 들어왔을 때도 어쩌면,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다시 호흡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습식물의 세포를 이용해 몸이 스스로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실험이었어요.」

처음 연우를 만났을 때 그녀가 환풍구 안에서 들려줬던 얘기가 생각났다. 낙조는 멍하니 서 있다가 앞서 가려는 무흠을 붙잡았다.

“호수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묻는 무흠에게, 낙조는 천천히 시선을 맞추고서 얘기했다.

“할 수 있어요.”

낙조가 낮게 중얼거리자 무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낙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돌아 다시 입구로 뛰어갔다. 그러나 반도 못 가서 무흠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무흠은 낙조의 팔을 잡고 물었다.

“호수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간다는 겁니까.”

“금이 갔다는 건 이미 균열이 시작됐다는 거예요. 아시잖습니까. 또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물이 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확인해야 해요. 아니면 저 안에 잠겨 죽어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십시오. 호수 안에 변종이 있으면, 낙조 씨가 당할 수 없을 만큼 많다면 어떡하려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중사님 지시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낙조는 차갑게 말하고 붙잡힌 팔을 빼냈다. 하필 오른팔이었다. 욱신거릴 정도로 세게 잡은 팔을 문지르며 낙조는 입구로 뛰었다. 무흠은 이번엔 쫓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서 점점 가빠져 오는 숨을 느꼈다. 물이 고인 지점은……, 적어도 삼십 미터는 헤엄쳐야 한다.

낙조는 겉옷과 안경, 신발, 양말을 벗은 후 한쪽 발을 호숫물에 넣었다. 아무래도 가을에 접어들다 보니 물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낙조는 주먹을 꽉 쥐고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풍덩!

살갗을 곧장 파고드는 추위 사이로 캄캄한 호수의 속살이 눈앞에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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