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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31화 (31/202)

31화. 죽으란 법은 없다

주택 거리는 변종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아스팔트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단단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차의 시동만 켜도 떼를 지어 덤벼들 게 빤했다.

“다른 집으로 건너가서 차 클락션 울려 보는 건 어때요?”

2층 테라스에 기댄 채 주위를 둘러보던 낙조가 말했다. 벽만 잘 탄다면 조용히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홍해화만 조용히 있어 준다면.

“너무 위험해.”

예상한 대로 해화가 먼저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낙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들은 척도 않고서 말했다.

“왼쪽 담이 더 낮으니까 타기엔 쉬울 것 같고. 혹시 진액이 묻어 있을 수도 있으니 제가 가는 게 딱이겠네요.”

“야!”

“그럼 여기서 쟤네 구경이나 계속 할까? 보기만 해도 질리는데.”

낙조는 테라스를 나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대문은 닫아 놓았기에 마당에 들어선 변종은 없었다.

차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운수 좋은 날이길 바랄 뿐이었다. 먼저 망치를 건너편으로 던지고, 팔을 위로 올려 담 위를 훌쩍 넘었다.

“조용하고…….”

주변을 살핀 후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낙조는 망치를 집어들고서 차고가 있을 만한 곳으로 걸어갔다.

“잡초가 원래 이렇게 빨리 크나.”

집을 비워 봤자 겨우 일주일이다. 원래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석구석에 화단과 밭이 있는 걸 보면 꽤 마당에 신경을 쓴 집주인이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 잡초는 낙조의 무릎을 스칠 정도로 자라 있었다.

‘……느낌이 별로야.’

낙조는 뒤를 돌아봤다가 스산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없음에도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

차고로 보이는 곳을 향해 잡초를 헤쳐 걸어갔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차고에 있는 것이라곤 자동차를 수리하는 데에 필요한 공구들과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물건뿐이었다.

‘차고 겸 창고였나.’

일단 일행에게 옆집으로 건너간다고 신호를 보내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였다.

“…….”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건가? 낙조는 자신의 두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면서 생각했다. 시야에 잡힌 것은 분명 잡초였다.

잡초인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낙조는 움직임을 멈추고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유심히 움직이는 곳을 살피니 사람의 인영이 곧 잡혔다.

온몸에 잡초가 무성히 자란 모습이었다. 저것도 변종인가? 낙조는 최대한 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좀처럼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아아악……, 꺼어억.”

소리 보니까 변종 맞군. 낙조는 한편으론 안심하며 망치를 들었다.

“아?”

머리로 보이는 부분을 치기 위해 팔에 힘을 주고 있는데, 사사삭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두 변종의 모습이 사라졌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헛것을 봤나?’

낙조가 허공에 든 망치를 서서히 내려놓았다. 간밤에 있었던 일이 정신을 많이 괴롭혔는지는 몰라도, 피곤함이 극에 달한 건 맞는 듯했다.

왼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캬아악!”

잠깐의 방심은 좋은 사냥감이 되는 방법 중 하나. 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낙조는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며 망치를 휘둘렀다.

퍽, 하고 풀로 뒤덮인 무언가가 맞고 나가떨어졌다. 다만 보통 변종처럼 피부가 물렁거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진흙……, 그래, 똘똘 뭉친 진흙을 부술 때와 비슷한 타격감이었다.

‘잡초가 몸에서 자라난 건가? 어떻게?’

누구도 답해 주지 않을 물음을 떠올리며 다시 덤벼들 것에 대비해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나가 떨어진 변종도 머리를 제대로 맞춘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달려들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사사삭.

소리.

풀과 풀이 스치며 나는 소리다. 낙조는 이번에도 뒤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에 화단으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잡초 사이에서 작은 변종이 펄쩍 공중으로 뛰었다.

파삭!

망치는 정확히 잡초로 무성한 얼굴을 가격했다. 얼굴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망치로 내려치기 직전 뒤집힌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잡초 변종의 머리는 말 그대로 모래처럼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낙조는 신발 위로 떨어진 진흙더미를 털어 내고서 남은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숨을 죽였다.

스스슥, 사삭.

그리 먼 곳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잡초가 움직이는 곳을 보며 어느 정도 변종의 이동반경을 예측할 수 있었다.

‘대문 쪽이다.’

화단에서도 대문은 멀지 않았다. 낙조는 빠르게 다가오는 잡초 변종의 머리를 단단히 부술 생각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변종이 대문 위로 뛰어올랐다. 낙조는 놓치지 않고 머리 쪽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깡!

망치는 변종의 머리가 아닌 철로 된 대문을 맞췄다. 고요했던 동네에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장 대문 밖에서 변종들이 울음을 흘리며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일부러?’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까지 만난 변종은 지능을 사용하지 못했다. 비가 올 때 밖을 찾아 나가는 것 말고는 도구를 사용한다거나 유인을 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는데.

“큭!”

오만하게 또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낙조는 왼쪽에서 뛰어드는 그림자를 보면서 급히 몸을 돌렸지만, 이미 멱살이 잡힌 후였다. 잡초로 뒤덮인 변종에게선 풀 냄새가 강하게 났다. 지독하리만치.

“흑, 허억…….”

변종은 진액을 토해 내지 않고 낙조의 목을 졸랐다. 이것 또한 다른 변종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던 행동. 낙조는 망치를 쥔 손을 올려 그대로 잡초 변종의 옆머리를 부수었다.

파사삭.

기습적인 공격까지 생각하진 못한다. 겨우 숨통이 트여 가쁜 호흡을 정리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낙조를 불렀다.

“고낙조 씨! 건너 오십시오!”

무흠이었다. 그는 테라스에서 모든 걸 지켜본 듯했다.

“대문이 부서질 것 같습니다! 수가 너무 많아요!”

동휘가 옆에서 외쳤다. 낙조는 다시 망치를 집 마당으로 먼저 던지고 담을 넘었다. 담 위에 살짝 발을 걸친 채 거리를 내다봤을 때, 낙조는 개미떼처럼 모인 변종들의 머리통을 볼 수 있었다.

*

“변종이었습니까?”

“네. 근데……, 확실히 달랐습니다.”

옆집으로 모여드는 변종들을 내려다보면서 낙조가 말했다. 얼굴과 몸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진흙 알갱이를 털어 내니 한숨이 곧 차올랐다.

“어쩌죠. 길이 아예 막혔는데.”

“차를 두고 담을 넘으면서 걸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무흠의 말에 낙조는 그를 한 번 흘겨봤다가 테라스 난간에 이마를 박았다.

“아…….”

“낙조 씨 탓 아닙니다.”

동휘가 곁에서 어깨를 두드렸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러면 이 위험한 여행도 끝날 텐데.

우우우웅, 웅-

“무슨 소리야?”

난간에 이마를 박은 채 한탄하고 있을 때, 멀리서 공사장에서나 들을 법한 소음이 들려왔다. 해화가 먼저 말을 꺼냈고, 낙조도 슬그머니 눈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거…….”

“불도저잖아.”

지운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낙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넣어뒀던 안경을 꺼내 썼다. 알에 금이 갔지만 멀리 있는 형태를 알아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저게 왜…….”

지운의 말대로 주택가 길목 끄트머리엔 불도저가 있었다. 누가 조종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주택가 도로가 꽤 넓은 덕분에 불도저는 길목에 쉽게 접어들었다.

“다 쓸어버리는데요?”

동휘가 웃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낙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라스에 박고 있던 이마를 매만졌다. 지금 다 같이 보고 있는 거 맞지? 나 혼자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불도저는 말 그대로 거침없이 변종들을 앞으로 쓸어담았다. 속도가 느리긴 해도 길가에 서 있던 변종들은 잔디기계에 썰리듯 짓밟히고, 깔리며 몸이 동강났다.

마침내 불도저가 낙조의 일행이 있는 집 근처까지 왔을 때, 낙조는 운전자를 볼 수 있었다. 까만 피부에 잔근육이 여기저기 붙은 몸. 셔츠 하나와 청바지. 대충 묶은 중단발의 머리. 무흠보다 겨우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변종을 쓸어 담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낙조가 있는 테라스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야, 손 흔들어!”

해화가 두 팔을 뻗어 흔들며 말했다. 소리는 지르면 안 될 것 같고, 구해달라는 신호는 보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낙조와 일행을 빤히 응시했다.

“어, 어? 변종 올라가요!”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뒤에 따라붙은 변종이 불도저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낙조가 외치자 그녀는 익숙하게 옆에서 스패너를 들더니 창틀을 쥐고 올라오는 놈들의 머리를 주욱 밀어 떨어뜨렸다. 터뜨리지 않는 걸 보니 진액에 감염된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길목의 끝까지 모인 변종들을 다 모은 다음 갈래길에서 불도저를 멈춰 세웠다. 그리곤 장비에서 내리더니 무언가가 담긴 병을 꺼내 변종들에게 뿌렸다. 액체에 닿은 변종들은 저마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치다가 곧 축 늘어졌다.

“저 여자 뭐야.”

지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해화는 조용히 자리에 서서 박수를 쳤다.

곧 여자는 다시 불도저에 올라 낙조가 있는 집 앞까지 후진으로 돌아왔다. 낙조와 일행은 곧장 짐을 챙기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대문을 여니 여자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운들이 좋으시네. 왜 이 길에만 떼거지로 있나 싶어서 와 본 건데.”

“감사합니다, ……근데, 아까 뿌리신 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낙조가 물었다. 여자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아아, 하고 대답했다.

“양잿물. 보통 애들보다 좀 더 센 거긴 한데.”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만들었는데?”

여자는 별 것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담배를 몇 번 빨더니 뭔가 생각난 것처럼 낙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너……, 몇 살이니?”

“네?”

“어려 보이기는 하는데. 몇 살이야.”

“스물, 스물아홉입니다.”

얼떨결에 나이를 내뱉은 낙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자는 그 모습을 깔깔거리며 구경했다. 한참 웃던 여자는 불도저에서 내렸다.

“잘 생겨서 한 번 물어봤어. 근데 나이 차이가 쫌 나서 별로다. 음, 그쪽은 몇 살?”

여자가 이번엔 무흠을 향해 물었다. 무흠은 대답 없이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근데, 직접 그런 걸 어떻게 만드세요?”

잠시 정적이 스쳐 지나갈 때 낙조가 입을 열었다. 겉으로만 봐도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었다. 중장비를 아무렇게나 움직일 수 있고, 바이러스가 퍼진 지 일주일 만에 감염경로를 알아내고, 변종의 약점까지 파악하여 그 대비책을 세운 사람이다.

여자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가방을 꺼내 메고서 말했다.

“집 가서 얘기할까? 다들 배고파 보이는데 밥 좀 먹고.”

“감사하지만 저희가 갈 데가―”

“―조금만 있다가 가요. 뭔가 중요한 걸 아는 사람 같아요.”

낙조는 무흠의 손목을 붙잡고 속삭였다. 무흠은 그리 달갑지 않은 듯 얼굴을 굳혔으나 낙조의 결정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차 좋다?”

여자가 주차해 놓은 차를 보고 감탄했다. 그녀는 동휘와 함께 뒷칸에 탔다. 두 명의 빈자리를 그녀가 차지한 것이다. 그녀는 가방을 감싸 안은 채로 길을 안내했다.

“여기가 집이에요?”

차가 멈춘 곳은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2층짜리 주택 앞이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안 무너져. 여기 근처엔 변종도 없고.”

여자가 열쇠로 문을 따고 말했다. 모두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낙조가 먼저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과 변종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

“너 근데 안경, 고쳐야겠다.”

“아, 괜찮아요.”

“고쳐 줄게.”

여자가 낙조의 안경을 가져가며 말했다. 정말 이 여자는 어떤, 무슨 사람일까. 위험한 호기심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온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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