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혼자였다면 할 수 없는 말
“평택 제 2대피소 출입자 명단에 고낙조란 사람은 없대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지.”
“근데 흔적은 남기고 갔더라고요. 변종을 식별해서 처리한 남자가 있었대요. 거기 군인이랑 관리자까지 다 검사해서.”
“진짜 멍청하네. 어떻게 됐대요?”
“그 뒤는 모른대요. 관리자가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어디로 간 것 같긴 한데 어디로 간 건지는 모른다네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게 얼마 만이던가. 연우는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마시면서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그녀가 가져온 낙조의 피 샘플은 최상위 보안 등급에 걸쳐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곧 해화에게서 뜯어낸 이파리의 성분 결과도 나올 참이다.
청주는 안전하고 조용했다. 태양열 에너지로 모든 동력을 돌릴 수 있었고 자체 네트워크가 구성돼 있어 메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가끔 변종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긴 하지만 샘플로 잡아둘 것을 생각하면 두려울 일도 아니었다.
‘백무흠 씨 자존심이 어디까지 가나 봅시다.’
연우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미소 지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메일 한 통이 와 있었다. 해화의 이파리 성분 조사 결과였다. 연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의 제목을 클릭했다.
“…….”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연우의 눈동자가 빠르게 문서 안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갔다.
[샘플 001E 바이러스 84.51% 멸균]
[샘플 002D 바이러스 97.05% 멸균]
연우가 가져온 변종의 피에 해화의 피를 섞었을 때의 결과였다. 연우는 조용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소장님 좀 뵙고 올게요.”
메일을 전달한 후 연우는 급히 연구실을 떠났다.
‘홍해화는 무조건 잡아야 해. 고낙조가 창이 된다면, 홍해화는 방패가 될 수 있어.’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가운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
“옥정호 붕어섬?”
지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실이란 지역도 치즈가 유명하다는 것밖에 모르는데, 섬이라니.
해화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정확하게 얘기해 달라는 표정으로 무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낙조는 조금 피곤한 기색만 빼면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미 무흠과 얘기를 마친 건지, 그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연구소……, 다른 연구소로 갔을 거예요. 섬에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연구소를 탈출할 때 연우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무흠은 낙조에게 붕어섬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관광명소지만, 딱 하나 있는 주택의 지하로 들어가면 상상 이상의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연우가 말한 섬도 그곳이 아닐까. 혹시 청주에서 장소를 알아내 미리 군대를 보내 놨으면 어떡하지? 낙조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낙조, 고낙조!”
“……아, 어.”
“아파서 멍 때리는 거야?”
“아니.”
해화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대화에 임했다. 이곳에 사람이라곤 이들밖에 없었지만, 꼭 누가 들을 수도 있을 것처럼 무흠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얘기했다.
“옥정호라고, 인공호수에 있는 섬이 있습니다. 모양이 금붕어를 닮았다고 해서 붕어섬입니다. 거기에 딱 하나, 주택이 있는데……, 지하실은 연구소랑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딱 두 명뿐입니다.”
“중사님이랑 아는 사람이에요?”
“둘 다 모릅니다. 그 장소의 위치와 용도만 알고 있습니다.”
“근데 다짜고짜 가자는 거예요 지금!?”
해화가 언성을 높였다. 무흠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조금 여유를 두다가 말했다.
“누가 먼저 가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먼저 가느냐, 서연우가 먼저 가느냐.”
일순간 해화의 입이 다물렸다. 연우의 이름이 이곳에서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데일밴드로 감싼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 전에 고낙조 씨가 잡히느냐, 안 잡히느냐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무흠이 덧붙였다. 낙조는 무흠을 한 번 힐끗 바라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평택 대피소에서 빠져나간 건 지금쯤 알았을 겁니다. 어디로 갔느냐를 모르니 그걸 생각할 텐데, 내일 내로 답이 안 나오면 수배령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슨 수배령을 내려요?”
지운이 턱을 괸 채 말했다. 무흠은 어두운 거실 등 아래서 차근차근 대답했다.
“편의점 때 일 기억 나실 겁니다. 그런 사람이 그들뿐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생존이 걸린 세상에서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무언가를 포상으로 내걸 겁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변종뿐만이 아니라 개떼처럼 달려드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낙조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무흠이 하는 얘기가 귀로는 들렸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나를 데리고 거기까지 가려고 하지? 변종이 무섭지 않은가? 감염될까 봐 두렵지도 않고?
외톨이처럼 떠도는 생각이 낙조를 잡아먹었다.
“고낙조 씨.”
“…….”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흠은 꺾인 풀처럼 생기 없어 보이는 눈동자를 보면서 천천히 얘기했다.
“고낙조 씨 잘못 하나도 없습니다. 아까부터 죽상을 하고 있길래.”
“중사님은 안 무서워요?”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낙조는 조용해진 식탁을 둘러보지도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짓밟은 것 같은 눈으로 무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하지도 않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고. 변종 되면 어떡하려고요.”
“아저씨.”
지운이 낙조의 옷소매를 잡고 끌었다. 그러나 그는 지운에게 맞춰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렇게 항상 자신이 넘쳐요?”
“고낙조.”
해화도 보다 못해 낙조를 불렀다. 무흠은 대답 없이 가만히 낙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모두 무사히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 한두 명은 죽을걸요. 아니, 다 죽을 수도 있다고요. 싹 다!”
“우리는 안 죽습니다.”
무흠이 말을 끊고 얘기했다. 낙조는 잠시 멈춰 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무섭다고 해요.”
낙조는 얼굴을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죽기 무섭다고 하고, 도망가시라고요…….”
얼굴을 감싼 손엔 잇자국이 가득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동휘가 손을 뻗어 낙조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낙조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저희, 끝까지 같이 있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동휘는 그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빚진다는 일을 요 며칠 새 자주 겪게 됐다.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런 삶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던 인생이었는데.
그동안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짓밟힌 컴컴한 기억들이 낙조의 손가락에서 거품처럼 터져 올랐다.
살아 있어 달라, 그 말이 낙조에겐 너무 어려웠다. 자신의 존재를 원망하지도 않는 이 사람들이 서글프도록 미웠다.
*
―후, 후. 전원 부대에게 알린다. 이름 홍해화, 나이 미상, 여성, 발목에 풀잎이 자라는 증상을 겪고 있다. 고낙조의 일행으로 추정된다. 발견 즉시 생포하고 보고하도록. 전원 부대에게 알린다…….
새벽 여섯 시. 평택 대피소를 떠날 때 관리자에게서 건네받았던 무전기에서 놀랍지 않은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무흠은 소파에서 잠든 해화를 응시했다. 붕대로 꼭 감아 놓은 그녀의 발목도.
거친 파도에 맞서 나아가는 항해가 역사에 남기 좋은 법이다. 무흠은 조용히 무전기를 전투조끼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뜨고 있었다.
어떻게 해화의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던 차였다. 낙조의 손발에 난 잇자국은 멍만 빼면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목에 난 잇자국은 꽤 깊었는지 잔상이 남았다.
“옷 갈아입으세요. 군복에 뭐 묻었을지도 모르고…….”
욕실에서 씻고 나온 해화가 무흠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젖은 머리를 털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중사님 탈영병이시잖아요.”
계단을 올라가며 한 말에 무흠은 잠시 허탈하게 웃었다.
*
아침 치고 하늘이 어두웠다. 차에 오르며 다들 비를 걱정했다. 기상청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당장 한 시간 뒤의 날씨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비가 오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맨 뒷칸에 앉은 동휘가 말했다.
“그때 보셨잖습니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밖에 나가서 비만 맞는 거.”
“그 후가 문제죠. 우리가 그때까지 임실에 도착하지 못하면? 밖에서 떼로 덤비는 변종들 다 어떻게 감당해요.”
지운이 고개를 돌려 반박했다. 아무래도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다 보니 소요 시간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사람이 보이기 전까진 움직이지도 않고, 진짜 식물처럼 서 있기만 하니까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고…….”
지운은 차창에 이마를 댄 채 중얼거렸다. 바이러스가 퍼진 지 겨우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그새 낙조를 죽일 뻔했던 괴이한 변종이 나타났다. 정말 나무나 풀처럼 서서 자신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있다.
낙조는 입을 다문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무흠은 무엇이 계속 걸리는지 무전기를 힐끔거렸다. 앞자리에 앉은 둘이 말이 없으니 차 내부도 점차 조용해져 갔다.
오른손이 제발 움직이지 않길, 또 어제처럼 무언가에 홀리지 않길 바라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슷한 풍경이 끝없이 지나갔다. 종종 무리에서 떨어진 변종이 보였다. 그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오늘은 노래 안 틀어요?”
침묵을 견디다 못한 지운이 무흠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아, 잊고 있었습니다.”
무흠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정적 후, 경쾌한 밴드의 연주가 시작됐다.
Do you remember
The 21st night of September?
Love was changin' the mind……
“오늘이 며칠이지?”
“……9월 22일.”
“여러모로 끝내주네.”
지운은 억지로 웃으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노래는 다 듣기도 전에 끊겼다. 차도 천천히 멈추었다. 무흠은 시동까지 끄고서 전방을 주시했다. 앞자리에 앉은 낙조 또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게, 뭡니까?”
동휘가 겨우 입을 뗐다. 낙조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2차선 도로의 중앙선에 걸쳐져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웩, 구더기.”
지운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뒷걸음질 쳤다.
극악무도할 정도로 신체가 훼손된 변종의 최후를 보는 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변종이어도 어느 정도 치명상을 입으면 죽는다, 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나온 입장이었다.
다만 이 변종은 완전히 변이된 후에 죽은 것인지, 아니면 변이되기 전에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게 요점이었다.
피부에 돋아난 나무껍질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포자가 피어난 곳도 없었다. 자세히 변종을 살펴보던 낙조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언제 죽였든 굉장히 악질이라는 건 알겠네요.”
곁에서 함께 살펴본 무흠도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는 사각형으로 갈라 내장을 다 꺼내 놓았고, 눈알을 파내 입안에 집어 넣었다.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변종이었다 한들.
“중사님.”
뒤에서 주위를 살피던 동휘가 무흠을 불렀다. 그는 도로 위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흠은 동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 길로 이어진 2차선 도로 중앙선 위엔, 일정한 간격마다 시신이 놓여 있었다. 꼭 누군가가 표시를 해놓은 것처럼.
“이 길로 가도 되는 거 맞습니까?”
동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길밖에 없어. 마주치지 않길 바라거나 길이 엇갈리길 바라야지.”
“길이 여기밖에 없다고 하셨으면서 엇갈리는 건 뭡니까.”
“길이 아닌 곳으로 갈 수도 있잖아?”
무흠은 뻔뻔하게 말하곤 차로 돌아갔다. 낙조는 가장 오래도록 변종을 관찰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보아도 완전히 변이됐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변이된 상태였다면 칼을 복부에 찔러 넣었을 때 진액이 터져 주위에 흩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도로는 너무나 깨끗했다. 핏자국도 없었다.
“이미 다 저렇게 만들어 놓고 도로에 일부러 버린 거예요.”
조수석에 올라타며 낙조가 말했다. 무흠은 오른쪽으로 살짝 핸들을 돌리며 악셀을 밟았다. 동휘와 봤던 대로 일정한 간격으로 변이 진행이 덜 된 시신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번엔 긴장감으로 가득 찬 침묵이 돌았다. 동휘는 총알의 개수를 셌다. 과연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음, 이런.”
잘 간다 싶었던 차가 서서히 속력을 늦추었다. 무흠이 탄식하는 소리에 모두가 숨소리를 죽였다.
2톤은 되어 보이는 트럭 한 대가 중앙선 위에 주차돼 있었다. 무흠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악셀에 발을 올려놓았다. 트럭의 운전석 문과 짐칸의 한쪽 문이 열려 있었다.
“살려 줘요! 나 아니라니까! 나 안 물렸어!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청테이프로 포박당한 남자 한 명이 짐칸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볼 위엔 나무껍질이 검버섯처럼 피어나는 중이었다. 남자는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살려 달라고. 그 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닫힌 문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그의 눈에 칼을 꽂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