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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26화 (26/202)

26화.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다른 때와는 달리 지운은 말이 없었다. 모두가 그 이유를 얼핏이라도 알기 때문에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지운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른 새벽이었다. 낙조를 제외하고 모두가 자고 있었다. 낙조는 구부정하게 앉아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지운을 바라보았다.

“깼네.”

“몇 시야?”

“두 시.”

낙조는 기지개를 한 번 쭉 켰다가 조용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운은 두 손을 내려다 봤다가 수면유도제를 하나 더 집어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도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더 먹으면 안 된다.”

낙조가 물통을 빼앗으며 말했다. 지운은 무시하고 알약을 입안에 넣었다. 순간 낙조가 한 손으로 지운의 볼을 눌러 거의 넘어갈 뻔한 알약을 빼냈다.

“더 잘 거야.”

지운이 약을 뺏기자마자 중얼거렸다. 낙조는 약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여기 뜰 거야.”

“어디로 가는데.”

대답하는 지운의 목소리에서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낙조는 참담한 기분을 꾹 누르고서 대답했다.

“전북 임실.”

“왜?”

그렇게 물으며 낙조를 바라보는 지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낙조는 대답 대신 지운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보초를 서는 경비를 빼곤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사방이 고요했다. 낙조는 그나마 쌩쌩하게 돌아가는 자판기 곁에서 대화 소리를 줄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뭐 마실래?”

“아니.”

“그럼 코코아나 마셔.”

낙조는 동전을 넣고서 종이컵에 따뜻한 코코아가 쏟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지운은 자판기 옆에 쪼그려 앉아 멍한 눈을 깜박였다.

“뜨겁다.”

낙조가 코코아를 건네주며 말했다. 지운은 두 손으로 종이컵을 받아들곤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낙조는 율무차를 하나 뽑고서 벽에 기대어 섰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까?”

지운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낙조는 달다 못해 끈적거리는 율무차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이게 빨리 끝나지 않는다면…….”

“사실 나는 안 봤어. 진동휘 상병님께 눈 가려 달라고 했거든.”

“그랬냐.”

“근데 내 손으로 한 거잖아. 안 봐도 상상이 너무 잘 가.”

지운은 종이컵 윗부분을 앞니로 아득아득 씹으며 말했다. 거스러미가 낀 듯 갈라진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낙조는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내가 용기가 없었어. 미안하다.”

낙조가 중얼거린 말에 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가만히 낙조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아저씨가 미안하냐. 내가 한다고 했는데. ……아, 할머니 보고 싶다. 우리 할머니, 나 보고 싶어서 어떻게 지내시려나.”

“내가 해야 했어. 끝까지 내가 책임졌어야 하는 건데.”

“아저씨 나 위로해 주러 온 거 맞아?”

“아기 부모님한테 미안해도 잘한 거야. 너 아니었으면 아무도 결정 못 내렸을 거고.”

지운은 반 넘게 남은 코코아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이 묽어졌다. 손이 조금씩 떨렸다. 낙조는 못 본 척 종이컵을 매만졌다.

“고생했다. 무서웠을 텐데.”

“……무서웠어.”

지운이 물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이 너무 얇아서……, 한 손에 잡히고도 남, 았어. 어흑, 흐윽, 아기 몸이, 너무, 작아, 서, 흐으윽…….”

낙조는 종이컵을 내려놓고 왼팔을 뻗어 지운의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였다. 불규칙적으로 마른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지운은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먹었다.

*

“트럭이랑 바꾸기로 했습니다. 짐칸이랑 앞이랑 소통도 안 되잖습니까.”

무흠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낙조는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서 앞에 놓인 검은색 SUV를 바라보았다.

“아니, 트럭이랑 이거랑 가격이 같아요?”

보다 못한 낙조가 한 마디를 꺼냈다. 무흠은 모르는 척 운전석에 올랐다.

“음식이랑 물도 좀 얻었고, 결정적으로 낙조 씨 어디로 가는지 비밀로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걸 믿어요?”

창문을 내리고서 하는 말이 고작 저거였다. 낙조는 머리가 띵 울리는 느낌에 이마를 짚었다. 처음엔 믿음직스러운 군인이라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사람 속을 터지게 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 듯했다.

“자, 갑시다. 갈 길이 멉니다.”

무흠의 말에 쭈뼛거리던 병사들이 짐칸에 올라탔다. 해화와 지운은 뒷좌석, 낙조는 조수석에 앉았다.

“병사분들께선 안 불편하세요?”

해화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병사들은 괜찮다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근데 왜 임실이에요?”

“숨어 살기 좋은 곳입니다.”

대피소의 문을 빠져나가며 무흠이 말했다. 어차피 고속도로는 상황을 알 수도 없으니 국도를 돌고 돌아가야 했다.

만약 군인이라도 만나서 신원조회를 하게 된다면 큰일이므로,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약도를 보면서 길을 찾았다. 무흠은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 약도를 본다며 웃었다.

아주 혼자 신났지. 낙조는 속으로 꿍얼거리면서 약도를 들여다보았다.

대피소 근처엔 확실히 변종이 보이지 않았다. 당분간은 안전하겠어, 그곳은. 나름 마음을 안심시킨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람 없는 거 빼곤 변한 게 아무것도 없네.”

작게 중얼거리자, 해화가 그러게, 하고 받아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무흠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노래 재생 버튼을 눌렀다.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and just like the guy whose feet are too big

for his bed nothing seems to fit……

단조로운 박자에 맞추어 익숙한 멜로디가 차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노트북 보셨습니까?”

무흠이 차를 몰면서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낙조는 조금 뒤늦게 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백 중사님 그 영화 보고 엄청 우시지 않으셨습니까.”

뒤쪽에서 동휘가 외쳤다.

“이 사람이?”

낙조가 의외라는 듯 몸을 돌려 되물었다. 동휘는 무흠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몸을 구긴 뒤 그렇다고 말했다.

“야, 내가 그거 얘기하고 다니지 말랬지.”

백미러를 통해 뒤쪽을 보며 무흠이 말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낙조는 참 나, 하고 무흠을 한 번 흘깃 쳐다봤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사는 잘 몰라도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와 이제는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잠깐 눈 붙여도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느리게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차 멈춰 봐요.”

“무슨 일―”

차가 멈추기도 전이었다. 낙조는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날렸다. 차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잠깐 들렸지만 도로 밑으로 떨어지면서 여기저기 부딪치느라 금세 잊어 버렸다.

“윽.”

도로 옆엔 물이 거의 말라 흙바닥이 보이는 냇가가 있었다. 낙조는 입안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 낸 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 위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미쳤습니까?”

무흠이 정중하게 욕을 갈겼다. 낙조는 그들을 올려다보다가 자신이 보았던 것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꼭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본 게 진짜였나. 세상이 이렇게 뒤집히고 나서부턴 이런 의심을 가질 때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바랐다.

“…….”

그런 기대는 언제나 부응하지 않고.

“고낙조!”

해화가 소리쳤다. 낙조는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커다란 포자 덩어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게, 저게 뭐야.”

“고낙조! 가지 말라고!”

뒤늦게 포자를 발견한 무리들이 각자 비명을 내질렀다. 무흠과 병사들은 곧장 도로에서 뛰어내려 낙조의 곁으로 다가왔다. 낙조는 팔을 뻗어 그들이 자신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멀리 떨어져 계세요.”

“예?”

“저는 안전하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잖아요.”

낙조는 그렇게 말하곤 무흠과 병사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할 때까지 팔을 거두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이 열 걸음 정도 떨어졌을 때, 낙조는 주위에 있던 주먹 크기의 돌을 들었다.

터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진액이 묻어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쥔 돌을 툭 튀어나온 포자 위로 긁었다. 스스슥, 포자는 힘없이 부스러졌다. 이상한 점은 포자만 부스러지고 진액이 안에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툭.

한 번 더,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돌로 덩어리를 긁은 낙조는 무언가가 돌에 걸린 것을 느꼈다. 물컹하기도 하고, 어딘가 단단해 보이기도 하는 촉감은 낯설었다.

“낙조 씨,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흠이 뒤에서 말했다. 낙조는 쥐고 있던 돌멩이를 버리고서 큰 돌을 찾아 주위를 헤맸다.

“고낙조 씨!”

“안에 뭐가 있어요. 움직인다고요.”

낙조는 정신없이 주위를 살피다가 꽤 큼지막한 바위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곤 주저하지 않고 포자 덩어리 위로 바위를 찍어 내렸다.

바삭, 푸스슥, 툭.

“끄으으으으…….”

바위는 겉을 완전히 감싼 포자를 짓이기고 안에 있는 덩어리를 정확히 건드린 후 떨어졌다. 낙조는 포자가 떨어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

순간 토기가 일었다.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포자가 감싸고 있던 것은 하나의 공처럼 말린 사람들이었다. 팔과 다리가 구분되지 않고, 머리도 정갈하게 뭉쳐 있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감은 실타래처럼 사람들의 몸뚱아리가 뒤섞여 있었다.

모든 이가 변종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나무껍질이 돋은 팔도 있었고, 그저 시퍼렇게 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 다리도 있었으니까.

“낙조 씨?”

“오, 오지 마세요.”

낙조는 한 손으로 다가오려는 무흠과 병사들을 저지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냥 지나가는 게 좋겠지?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뭉쳐서…….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포자가 벗겨진 곳에서 팔 하나가 쑥 나와 낙조의 손목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윽!”

순간적으로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틸 수 있었으나 만약 그대로 끌려갔다면 저 덩어리에 곧장 먹혔을지도 몰랐다.

하필 잡혀도 오른손이 잡혀서. 낙조는 움찔거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하지만 낙조를 잡은 손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마치 덩어리가 된 모든 사람들의 힘을 공유하듯 여러 사람들이 낙조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윽, 으…….”

피가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파리가 빨리 피어나지 않았다. 진액의 냄새는 분명 나는데, 이파리는 눈치를 보듯이 조금씩 자라났다. 겨우 형태를 잡을 정도로 이파리가 자랐을 때, 낙조는 오른팔에 힘을 쏟아부었다. 그대로 포자가 떨어져 빈 곳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어, 어…….”

제대로 꽂아 넣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손이 빠지지 않았다. 낙조의 주먹이 살덩이에 파묻힘과 동시에 근처에서 여러 개의 손이 튀어나와 낙조의 손목에 매달렸다.

“미치겠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주먹은 점점 살덩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힘을 줄수록 낙조를 잡아당기는 힘도 거세지고 있었다.

“……아, 아저, 아저씨!”

위에서 기함한 지운의 외침이 들렸다.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안다고. 나도 보인다고. 낙조는 진땀을 흘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살덩이의 위쪽에서 얼굴 하나가 기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살덩이의 늪을 파헤치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잇몸까지 드러난 입안은 새빨갰다. 저 머리가 핵심인가.

잡힌 낙조의 손목을 삼키려는지 입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얼마나 살을 짓씹어 먹었는지, 잇새에 살가죽이 득실득실했다. 혓바닥 너머에선 노란 진액 특유의 썩은 냄새가 풍겼다.

탕, 탕!

총성이 울렸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동휘와 무흠이 살덩이를 향해 침착하게 조준하고 있었다.

“혼자 수습이 안 되면 좀 도와 달라고 말을 하십시오.”

“포자가 몸에 들어가면 바로 감염이에요! 떨어져요!”

“하여간 잔소리는.”

“죽고 싶어서 그래요!?”

낙조는 무흠과 동휘가 물러날 때까지 뒤로 가라 소리쳤다. 둘은 함께 뒤로 조금 물러나 쉼 없이 움직이는 입을 조준했다. 낙조는 그 순간에도 끝없이 생각했다. 진액이 터지면 어떡하지? 포자가 날리면…….

탕!

동휘의 총알이 먼저 날아갔다. 총알은 아슬아슬하게 아랫입술에 박혔다.

“끼아아아악!”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순간 낙조의 손을 잡고 있던 힘이 풀렸다. 낙조는 황급히 오른손을 빼낸 후 거친 숨을 다스렸다.

‘직접 접촉하지 않는 게 좋아.’

다시 살덩이 사이에서 손이 쑥쑥 나와 낙조를 찾기 시작했다. 낙조는 고속도로 위에서 느꼈던 분노를 생각하며 천천히 손바닥 안쪽이 뜨거워지는 걸 기다렸다.

그러나 처음 보는 변종의 모습에 당황해서인지 맘처럼 액이 끓지 않았다. 낙조는 심호흡을 하기 위해 입으로 짧게 숨을 내뱉었다.

“어, 어?”

“고낙조 씨!”

“아저씨!”

사방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모든 생각이 증발 된 듯 사라졌다.

살덩이에서 여러 개의 얼굴이 눈을 까뒤집은 채 입을 벌리고 낙조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 하는 소리를 낼 새도 없었다. 살덩이는 그대로 낙조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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