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23화 (23/202)

23화. 평택 대피소

“계획은 있어요?”

무흠과 나란히 앉은 낙조가 물었다. 산길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무흠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다였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한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저렇게 청주로 보내면, 분명 우리 잡으라고 지시 떨어질 텐데. 아니면 중사님은 같이 잡혀서 감옥 가시거나…….”

“이런 세상에서 무슨 감옥을 가겠습니까. 있는 힘껏 도망쳐야죠.”

“큰 그림을 보면 우리 다 잡혀가는 장면밖에 안 떠오르는데요.”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낙조 씨는 조금……,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더 최악인 상황을 겪기 싫으니까 미리 방어를 하는 거죠.”

“한 마디도 안 지시고.”

낙조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 보니, 해화와 지운은 잘 따라오고 있는 듯 보였다.

대피소로 가는 게 맞긴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우가 해화의 이파리를 떼어 내 가져간 게 마음에 걸렸다. 그곳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어떻게든 자신이나 해화를 잡으려 할 텐데.

비탈길을 내려갈 땐 조금 초조하기까지 했다. 대피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쓸 데 없는 의심마저 피어났다.

사실 이게 서연우와 중사가 짠 판이라면? 대피소로 가는 척해놓고 그곳에서 붙잡히게 되면 어떻게 하지.

복잡한 생각에 쉽사리 눈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오래도록 말이 없는 낙조를 향해 무흠이 물었다.

“또 이상한 생각 하고 계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중사님이 우리를 도울 이유를 못 찾겠어요. 굳이 그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래도 되나요?”

낙조의 대답에 무흠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저 여유 있는 미소마저 짜증날 지경이었다. 무흠은 한동안 웃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그럽니다.”

“그러면 부사관까지는 왜 다셨어요. 군인에게 필요한 믿음 아닙니까?”

“같은 것을 지키더라도 어떤 믿음으로 지키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 낙조는 한참 무흠을 소심하게 노려보다가 대화를 거두었다. 어떤 식을 이용하든 이 대화에서 이길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곧 산을 내려오니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에 들어섰다. 운전병이 십 분 정도 남았다고 얘기했다. 낙조는 조금 긴장한 채로 주먹을 쥐었다.

“그럼 중사님도 같이 대피소로 가는 건가요?”

“체포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있을 겁니다. 여기 책임자가 저와 아는 사이라 그나마 긴장 좀 푸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여기로 온 겁니다.”

무흠은 그제야 평택을 선택한 이유를 얘기했다. 낙조는 종종 스쳐 지나가는 주택들을 둘러보며 숨을 가득 들이켰다. 길가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대피소에 가 있거나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자동차와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를 들었는지 저 앞쪽에서 군복을 입은 이들이 총을 무장을 한 채 문 앞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평택 제 2대피소]

작은 현수막이 걸린 곳은 실내체육관이었다. 문을 제외한 곳은 철조망이 가득 둘러져 있었다.

“제가 먼저 내릴 테니 신호를 드리면 나오십시오.”

무흠은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모든 소음이 차단된 듯 고요했다.

*

제대로 갖춰진 대피소의 내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대피소 입구에서 입장 명단을 작성했다. 낙조는 이름을 쓰는 란에서 무흠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흠은 입모양으로 ‘다른 거’라고 중얼거렸다.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도담지’라고 썼다.

“도담지가 뭡니까?”

“아저씨 다람쥐야?”

“설치류인 줄 몰랐네.”

명단을 쓰고 들어오자마자 무흠부터 시작하여 지운, 해화가 한 마디씩 터뜨렸다. 동휘도 웃음을 참고 있는 건지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해.”

“평범한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막상 고민하게 된다니까, 그 상황 되면?”

낙조는 인상을 쓰고 말했으나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체육관 내부는 셀 수 없을 만큼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무흠은 책임자를 잠깐 만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저기 왼쪽에서 세 번째 천막으로 가시면 됩니다.”

안내를 맡은 남자가 천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낙조 일행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천천히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천막 안엔 이부자리나 침낭이 있었고 버너, 식기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음식은 매일 아침 여덟 시, 오후 열두 시 삼십 분, 오후 여섯 시에 나눠드립니다.”

이곳을 관리하는 듯한 여자가 일행의 수를 세더니 음식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무장하셨네요?”

여자는 해화가 든 골프채, 지운의 망치를 보고 말했다.

“무기는 조금 이따 반납하세요. 사람이 많은 곳이라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갑자기 변종들이 쳐들어오면요?!”

지운이 망치를 꼭 끌어안고 물었다. 여자는 그럴 일은 없다는 듯 확신하는 눈으로 지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올 일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많지는 않지만 구역마다 CCTV를 설치하는 중이고, 경비도 삼엄합니다. 밖과는 다릅니다.”

“그, 그래도…….”

“성함이, 홍지운 씨? 무기 반납고에서 반납 제대로 하셨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숨겼다가 들키면 일행에게도 같이 책임을 물을 테니 잘 반납해 주세요.”

그녀는 얄짤 없이 대답하곤 낙조의 천막을 떠났다. 지운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으아아, 하고 하품하듯 길게 신음했다.

“아니 절대 안 들어올 거란 법이 어디 있어. 안 그래, 아저씨?”

“적어도 여긴 거기보단 안전해 보인다.”

“어디?”

“처음 갔던 데.”

“아. 맞아. 거긴 군인들도 별로 없어 보이던데.”

지운은 낙조의 말에 동조했다가 잠시 조용해졌다. 무얼 생각하는지 가만히 깜박이는 눈이 곧 묽어졌다.

“할머니 괜찮으시겠지?”

“야, 재수 없는 소리 하면 진짜 죽어.”

망치를 끌어안고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해화는 지운의 혼잣말에 버럭 성을 냈다. 그간 부모님의 얘기는 없고, 할머니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는 걸 보니 할머니와의 애착 관계가 큰 듯했다.

“아저씨도 걱정되겠다,”

“뭐가.”

“가족들이나, 친구들.”

“음…….”

잠시 뜸을 들였다. 이들에게 자세히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 얘기해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어두컴컴하기만 한 지난 날들을 억지로 꺼내 들여다 보는 건 낙조 자신에게도, 이들에게도 그리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모님 안 계셔.’ 딱 한 마디만 하면 되겠지만 이들이 보일 반응에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이젠 귀찮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자신의 곁에 오래 있던 사람이 없었다. 사랑을 하고 싶어서 연애에 목 매단 적도, 우정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을 잘 챙기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떠나고 난 이후엔 인간관계를 정리해 더 심해졌다. 천성이 게으른 탓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도 너무 서툴다고. 나는 잘하는 게 왜 하나도 없지. 낙조는 잠시 생각하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저씨, 혹시 내가 실수한 거야?”

낙조가 대답 없이 웃자 지운이 심각하게 물어왔다. 낙조는 그를 놀려줄까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내저었다. 언젠가 얘기할 때가 오겠지. 지금 이런 상황에서 더 어색한 장면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해화는 구석에서 붕대를 갈고 있었다. 연우가 뜯어낸 곳엔 피딱지가 앉았다.

“연고 발라.”

“약 바르면 잎 날 때 더 아파. 사람 몸에 쓰는 약이라 그런가.”

해화는 그렇게 말하고 새 붕대로 꼼꼼히 발목을 감쌌다. 지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울분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누나 너는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냐!?”

“말해서 뭐하게. 알아서 좋은 거 하나도 없어.”

해화는 딱 잘라 말했다. 지운은 해화가 자신의 상태를 말해 주지 않은 게 퍽 섭섭했는지 서운한 얼굴로 입을 쭉 내밀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아, 재수 없는 말투. 낙조는 고개를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투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간만의 휴식을 방해당한 기분이었다.

“낙조 씨, 잠깐 얘기 좀.”

“또 나예요?”

“요주의 인물이시지 않습니까.”

저거 비꼬는 거 맞지? 낙조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그를 잠깐 노려보았다. 무흠은 엷게 미소를 띈 채 낙조가 일어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

“관리자와 얘기했는데, 대피소 안에서 출입금지 구역이 있답니다.”

“그게 저랑 무슨 연관이 있어서…….”

“낙조 씨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흠은 그렇게 말하면서 낙조를 건물 뒤쪽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군복을 입은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낙조를 보고서 가볍게 인사했다. 낙조도 허리를 살짝 숙였다.

“여기, 들어오시면 됩니다.”

임시로 쳐둔 천막의 문을 걷고 남자가 먼저 들어갔다. 입구는 다른 병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낙조는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남자가 가리킨 것은 노란 진액 덩어리였다. 낙조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무 같은 것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덩어리는 변종이 토해 내고 시간이 조금 지났는지 단단해 보였다.

“이거…….”

낙조가 입을 뗐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됐다. 낙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어왔다.

노란 진액이 사방에 튀어 있고, 덩어리가 있고, 그 덩어리는 굳었고…….

쿡, 쿡.

낙조는 나뭇가지 끄트머리로 덩어리에 전체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포자를 쑤셔 보았다. 예상대로 덩어리는 이미 굳어 나뭇가지가 박히지 않았고, 반응하는 건 덩어리에 붙어 있는 포자였다.

군데군데에서 포자가 증식하는 중이었다.

낙조의 머릿속에서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포자 변종이 떠올랐다. 그 여자는 변하기 전에 그랬었다. 물리지도, 만지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온몸에 포자가 올라왔었지.

낙조는 몸을 뒤로 물러 세운 후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다들 코랑 입 막으세요. 마스크 있으시면 쓰시고.”

낙조의 말에 무흠과 관리인이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왜요, 보신 적 있습니까?”

“진액에서 포자가 자라는 거예요. 몸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진액이 묻은 포자는 아주 작은 형태라, 어떻게든 몸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낙조의 말에 관리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거, 발견한 지 얼마나 됐죠?”

낙조는 급히 관리인에게 물었다. 그는 숫자를 세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한 이, 이틀 정도 됐습니다.”

“접근한 사람은요?”

“그건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안 돼. 낙조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떠냈다. 접촉자가 있다면 분명 몸에 포자가 침투했을 게 빤했다. 이때까지 감염 증상이 보이지 않은 것뿐이다. 사람마다 감염 속도는 다르니까.

“이거, 토한 변종은 찾았나요?”

“이 덩어리를 토한 변종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있던 변종은 모두 사살했습니다.”

그럼 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 변종은 주변에 거의 없다는 거다. 하지만 포자가 문제였다. 낙조는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며 천막에서 나갔다.

“처음에 발견했을 땐 어느 정도 크기였습니까?”

“저렇게……, 뒤덮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새끼손톱 크기 정도였습니다.”

“그럼 이틀 만에…….”

낙조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액 덩어리를 토하는 가장 일반적인 변종, 그리고 포자 변종. 그럼 덩어리에 포자가 피어나는 유형은 두 개가 뒤섞였다는 말인가?

쉽사리 정리하지 못해 말을 잇지 못하는 낙조를 바라보고 무흠이 말을 걸었다.

“낙조 씨, 위험한 겁니까?”

“지금 이 대피소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죠?”

“대략 천 명 정도는 됩니다.”

천 명을 일일이 검사할 시간 같은 따윈 없다. 이틀이라면 몸을 잠식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지금까지 고요한 게 이상할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면 안 됩니다. 일단 몸이 간지럽다거나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난 사람을 찾아야 해요. 최대한 침착하게 알리세요. 그리고 감염 증상이 비슷하게 나타난 사람들을 다른 곳에 모이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은 어떡합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무흠이 물었다.

“……제가 들어갈 겁니다. 그 안에.”

낙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

대피소에 있는 모든 인력이 동원되었다. 무흠은 천막에 남아 있던 동휘를 비롯한 병사들을 데려왔다. 해화와 지운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자세히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에겐 간단한 검사라고만 안내했다. 그들이 혹여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낙조는 관리자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병사 두 명이 따라붙었다.

겨우 텐트 다섯 개를 돌았을 무렵,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불쾌한 예감이 머리 위로 꽂혔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허리를 폈다. 느낌이 오는 곳은 복도로 향하는 곳이었다. 화장실로 통하는 길이었다.

진액에 가까워지거나 닿지 않는 이상 몸은 반응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까지 낙조 가 스스로 확인한 실험 결과였다. 그저 몸이 피곤해서 느껴진 통증일 것이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묘한 기운이 폈다. 천천히 화장실 쪽으로 다가갈 때였다.

“윽.”

낙조가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이파리가 터져 나올 것처럼 손끝은 간지러웠고 힘이 절로 들어갔다.

잠시 낙조가 걸음을 멈추자 뒤따라오던 군인 두 명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낙조는 대답 대신 시선을 화장실로 돌렸다. 남자화장실 끝칸 하나만 문이 닫혀 있었다.

천천히 끝칸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안에서 잠겼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문, 열 수 있습니까?”

낙조가 물었다. 군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열쇠를 찾아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후, 후. 평택 제 2대피소. 긴급 명령이다. 응답하라.

무전기를 들고 있던 관리자가 버튼을 누르고 대답했다. 낙조의 관심은 오직 닫힌 문에만 꽂혀있었다.

―청주 신종바이러스연구센터에서 알린다. 이름 고낙조, 나이 20대 후반, 남성, 면역체계가 형성된 변종으로 추정. 뒷목을 살짝 덮는 검은 머리, 키는 180대. 평택 제 2대피소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하니 긴급수색하여 생포한 후 보고하라. 오바.

“…….”

낙조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무흠은 지금껏 관리자 앞에서 자신을 낙조라고 불렀지. 무전기를 든 관리자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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