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21화 (21/202)

21화. 가장 가까이 있던 진실

청주로 출발 하루 전.

새벽 두 시 삼십 분.

무흠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우가 주사한 약의 효과는 이미 떠나갔지만 그 생생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눈에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이런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고? 무흠은 오른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린 후 손바닥을 뒤집었다가 주먹을 쥐었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왜 서연우는 자신에게 낙조의 힘을 체감하게 만들었을까. 이런 힘을 갖고 싶으냐고? 우정 같은 것이 어디 있냐고.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복도로 나가니 스산한 바람이 발목을 감쌌다. 연우의 실험실은 복도 끝에 있다. 아침 일찍 청주로 출발해야 하니 이 시간 쯤이면 자고 있을 테다.

역시나 불은 꺼져 있었다. 무흠은 조심스럽게 실험실의 문을 열었다. 넓은 책상 위로는 여러 장의 이면지가 쌓여 있었는데, 하나 같이 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상태였다.

사람 형태와 신장의 위치를 모두 그려 넣은 후, 각각 어느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 쓴 종이를 가장 먼저 집어들었다.

“이게 다 뭐야…….”

무흠은 낮게 중얼거리며 다른 종이를 집었다. 이번엔 세포를 그린 듯한 그림들이 즐비한 종이였다. 무흠은 알아보지 못하는 용어들이 나열돼 있었다. 시간마다 세포가 어떻게 변하는지 기록한 건가?

“…….”

스탠드 등 하나만 켜고서 종이를 한참 뒤적거리던 무흠은 유독 문장과 그림이 많은 종이 한 장을 찾아냈다.

[혈액에서 진액이 검출되는 일반 변종과 다름. 수분 함유량 많음. 항체가 일반인보다 30배는 넘는 것으로 확인.]

연우의 필체였다. 급히 적었는지 글씨는 뚜렷하지 않았다. 무흠은 마저 남은 문장들을 읽었다.

[물려도 감염이 되지 않는지 확인 필요.]

[고낙조의 항체와 맞닿은 바이러스는 3분을 넘기지 못하고 분해됨. 감염되지 않을 확률이 90%는 넘는 것으로 확인.]

[샘플 피 부족. 고낙조의 오른손은 변종의 진액에 반응. 변종과 같이 두고 실험 필요.]

[힘을 모두가 쓸 수 있는 방법 모색.]

[1L의 진액을 투여했을 때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을까? 청주에 가면 필히 실험해볼 것.]

낙조의 피 샘플과 그로 연구한 세포 그림들이 빼곡하게 담긴 종이엔 연우의 생각이 과감하게 적혀 있었다. 무흠은 빠짐없이 그것들을 읽고서 종이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살아 남으려면 힘을 얻어야죠. 중사님은 무엇을 지키고 싶으신데요?」

연우가 자신에게 낙조의 피를 주사한 후 한 말이 떠올랐다.

“문명을 지키려면……, 그런 힘을 모두 나눠 가져선 안 됩니다.”

무흠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무흠은 급히 스탠드 등을 껐다. 금세 어두워진 실험실 안에서, 무흠은 정리되지 않아 어지러운 옆 책상 아래에 몸을 숨겼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연우였다. 그녀는 몇 시간 전 무흠에게서 뺏은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네, 성공했어요. ……감사합니다. 고낙조, 그 사람, 청주로 데려가면 바로 실험하는 게 좋겠어요. 그때까지 변종 다섯 마리 정도는 잡아 주세요. 그 사람은 힘을 쓸 줄 아니까 반항 못하게 묶어 둬야 하고요. 면역체계가 얼마나 강한지 시간 경과를 보면서 꼼꼼하게 봐야겠어요.”

무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연우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청주에서의 생체실험을.

*

새벽 다섯 시.

청주 출발 세 시간 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우리들만의 일이다. 절대 연구원에게 새어나가선 안 되는 이야기야.”

무흠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얘기했다.

“청주로 가기 전, 평택에 있는 대피소로 간다. 그곳에 고낙조 씨와 민간인 두 명을 놓고 청주로 가는 거다. 청주로 가는 건 우리와 연구원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낙조 씨를 청주에 데려가서 생체실험을 할 작정인 모양이야. 아무리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한들 사람도 거꾸로 역사를 쓰게 만들 순 없다.”

“병장 김우관, 드릴 말씀 있습니다.”

말년병장인 우관이 손을 들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흠과 다른 병사들의 시선이 줄줄이 우관을 향했다.

“고낙조 그 사람은 변종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완전히 변하지 않은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괜한 의심은 접어 두길 바란다. 우리는 국가를 수호하고 사람들을 지켜야 해. 지금까지 고낙조 씨가 우리를 도운 일들을 생각해라.”

“하지만 중사님,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청주로 데려가는 것 아닙니까. 잘못하면 명령 불복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관은 뜻을 굽히지 않고 무흠에게 맞섰다. 무흠은 조용히 우관을 응시하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명의 도움을 무시했다간 다시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런 개자식은 내 부하로서 필요 없다.”

우관을 바라보는 무흠의 눈빛엔 칼날이 빛에 번득이는 것처럼 한기가 서려 있었다. 우관은 마지못해 아랫입술을 씹었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살리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함께 살아야 해.”

무흠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짧게 경례를 올렸다. 우관은 마지못해 손을 올렸다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

“누나, 누나!”

지운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해화에게로 달려갔다. 낙조는 다른 변종이 있나 주위를 살피면서 그런 지운을 밀쳐냈다.

“키이이익, 칵!”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진액을 쏟아 낸 변종은 입을 한껏 벌렸다. 해화는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 변종의 턱을 붙잡아 씹히는 걸 막고 있었다.

아직 손이 덜 풀린 게 다행이었다. 낙조는 주먹을 꼭 쥐고서 변종의 머리를 날렸다. 끽,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간 변종은 다시 돌아왔지만 그마저도 낙조가 발로 밟아 완전히 터뜨림으로써 끝이 났다.

“하, 허억, 헉…….”

해화는 진액을 뒤집어쓴 채 팔꿈치로 땅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에서 진액이 뚝뚝 흘렀다. 지운이 황급히 다가왔지만 낙조가 팔로 가까이 다가오는 걸 막았다.

“닦을 거 가져와.”

낙조의 말에 지운은 가파른 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왔다. 낙조는 해화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삼켰어?”

“……몸에 들어간 것 같아.”

해화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낙조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입안 가득 쌓인 한숨을 참아 냈다.

해화는 얼굴과 머리카락에 묻은 진액을 닦아 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염 증상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총구는 변종이 아닌, 해화에게로 겨눠지고 있었다.

낙조는 병사들 앞에 서서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탔던 트럭에서 물을 꺼내왔다.

“얼굴 좀 씻어. 입도 헹구고.”

해화는 넋이 나간 듯 낙조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낙조가 부어주는 물을 받아 얼굴을 씻고 입도 세 차례 헹구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트럭에 탈 수 있게 해 주세요.”

낙조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무흠에게 말했다. 무흠은 대답 대신 병사들의 총을 내려놓으라 지시했다.

연우는 조금 멀리서 해화를 바라보았다. 변종이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은데. 가까이서 관찰하기엔 무리였다.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는 트럭에 올라타는 낙조에게 다가가 말했다.

“될 수 있으면, 그냥 붙잡고만 있어요.”

“……예?”

“변종으로 변하면, 죽이지 말라구요.”

낙조는 연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간의 정 때문에 부탁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덧붙인 말에, 속에 품고 있던 모든 신뢰의 끈을 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변하면, 몇 분 정도 흘렀을 때 변했는지 기억해 둬요. 기록해야 하니까.”

서연우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까? 연구소에서 함께 탈출할 때만 해도 생각보다 용기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서연우를 부하직원으로 두었다면 흡족했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생각하고 알아내려 하는 모습에 칭찬을 해 주기도 했겠지. 꼭 필요한 인재라면서 남들 앞에서 그녀를 두둔했을 수도 있다.

세상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완벽한 연구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 내가 세상을 잘 모르는 걸까. 사회라는 집단에서 살아남는 법칙을 내가 모르기 때문에 서연우에게 이리도 실망한 걸까. 낙조는 눈을 감았다.

사회생활이라곤 알바 몇 개를 일 년이나 이 년 동안 해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사람들과 많이 부딪치며 애먼 감정은 쌓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상황이 악화될수록 사람에게 갖는 기대감이 커지는 듯했다. 낙조는 무얼 바랐냐는 듯 대답 없이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해화도 낙조를 뒤따라 올랐다. 연우는 문이 닫힐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

무흠과 연우를 태운 차는 조용했다. 연우는 본부에서 챙긴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무흠은 새벽에 봤던 연우의 사인들을 생각하면서 손가락만 매만졌다.

평택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연우가 길을 잘 아는 것만 아니라면 대피소까지 별 탈 없이 갈 수 있을 테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정표를 보고서 무흠은 조용히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운전을 하던 병사도 백미러로 무흠을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주에 가면 제일 먼저 뭘 하실 겁니까.”

무흠이 창문을 반쯤 내리고 연우에게 물었다. 쉬지 않고 종이를 팔락거리던 연우가 그 질문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야…….”

곧장 대답하려던 그녀는 운전병의 존재가 거슬렸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약을 개발하는 거죠.”

“어제 말씀하신 것 말입니까.”

“……네.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요?”

“각자 어느 일을 하느냐에 따라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무흠의 애매모호한 말에 연우가 고개를 비틀었다. 그녀는 별로 기분 좋지 못한 미소를 지은 채 무흠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그냥 제 의견입니다.”

무흠이 연우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오랫동안 정해진 규칙과 규범에 맞춰 삶을 연명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눈은 사막에 숨겨 놓은 덫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사냥감을 찾는다.

군림하는 자와는 다르다. 남들을 부려서 사냥하는 것과 스스로 덫이 되는 사람은 사냥하는 방식부터 다르기 때문에 쉽게 그 속을 파악하려고 해선 안 된다.

연우는 그걸 몰랐지만.

“……그래요.”

짧은 대치 끝에 연우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목 뒤에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위협감을 느꼈다.

*

“어쩌려고 날 여기에 태웠어.”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해화가 중얼거렸다. 낙조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물통을 해화에게 건네주었다.

“아는 사람이 죽여주는 게 나으니까?”

“나는 감염 안 돼. 네가 아무리 물어도.”

“그냥 아까 거기에 버리고 가지.”

“그럼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 물게?”

“변할 때까지 이런 대화 나누는 것도 웃겨. 좀비 영화에서 죽기 전에 다들 이런 대화를 한다고. 인류애가 함께 멸망당한 건 아니라는 것처럼.”

해화는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물을 마시려다가 다시 뚜껑을 닫았다. 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던 해화가 욱,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야, 왜 그래.”

“토할 것 같아.”

해화는 몇 번 더 헛구역질을 하더니 바닥을 손으로 짚어 구석 쪽으로 기어갔다. 플래시를 비추어 낙조가 뒤로 따라가니 해화가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낙조는 비키지 않고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욱, 에엑.”

낙조는 해화가 토해 낸 걸 플래시로 비추었다.

토사물은 분명 진액이었다. 침과 위액이 섞여 나온 것은 변종이 해화에게 뱉어낸 진액이 맞았다.

해화는 몇 번 더 진액을 토해 내더니 입가를 닦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토해낸 것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낙조를 바라보았다.

해화의 눈은 반듯했다. 검은 눈동자가 플래시에 빛났다. 유하게 깜박거리는 움직임도 다르지 않았다. 낙조는 한참 해화를 관찰하다가 입을 뗐다.

“아무렇지도 않아?”

“…….”

“어? 말을 해.”

“언니 총 맞아서 병원 갔을 때. 당신이 화장실에서 변종 처리했던 날 있잖아.”

해화는 문득 그날을 얘기했다. 시선은 저 아래로 떨어뜨리고서.

“그 변종한테 발목을 물렸었어. 근데…….”

그렇게 말하며 해화는 끝까지 올려 신은 양말을 벗고, 붕대를 풀어 깨물린 자국을 보여 주었다. 복숭아뼈 위쪽에 사람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흰 피부 아래 파란 혈관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었고, 그 끝엔.

작은 나뭇잎이 서너 개 피어 있었다. 살갗 위로.

본부 건물에서 지낼 동안 해화는 양말을 벗지 않았었다. 항상 붕대를 둘렀었지. 그랬었지. 잘 때도 양말을 신었고, 자주 양말을 빨았고, 모두가 씻은 후 잠든 시간에 씻으러 갔고…….

“이게 뭔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청주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한참 말이 없던 해화가 중얼거렸다.

“근데, 무서워. 서연우 그 사람이 날 가만히 둘까?”

“…….”

“떼어 내도 계속 자라. 떼어 낼 때마다 아파서 요 며칠은 손도 안 댔어.”

해화는 입을 작게 벌린 채 속삭였다. 고해성사를 하듯 두 눈이 허공에 잠겨 있었다.

“힘이 있는 당신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나는 어떻겠어.”

해화가 툭 말을 던졌다.

“너무 잡기 쉬운 사냥감이라고.”

「제일 좋은 방법은 백신을 만드는 건데, 그러려면 변종의 피도 여러 개 필요하고 항체를 찾아야 하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지금 가능성이 있는 건 낙조 씨 피로 우리 모두 낙조 씨처럼 되는 거예요. 그럼 스스로를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요.」

연우가 했던 말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해화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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