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포로
이튿날이 밝았다. 낙조는 거의 흉터의 잔상만 남은 오른팔을 매만지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물끄러미 안경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챙기는 게 좋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안경을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모두가 짐을 챙기는 중이었는지 소란스러웠다. 낙조의 등장에 그 소란이 잠깐 멎었다. 병사들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곧장 돌렸다. 반가워해 주는 건 지운과 해화뿐이었다.
“진짜 멀쩡하네?”
“아저씨, 나한테 또 목숨 빚 진 거다!”
낙조는 병사들을 힐끔 바라봤다가 자연스럽게 해화의 곁에 앉았다. 지운이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떠들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태도가 변했다. 자신을 보는 눈빛조차도.
“고낙조 씨는 이 차에 타십시오.”
문이 달린 트럭을 가리키며 무흠이 말했다. 낙조는 트럭 안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식량과 물이 들어 있었다. 그것 말고는 어둠뿐이었다.
“저만요?”
“예.”
무흠이 짧게 대답했다. 곁에 있던 해화가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려 했지만 낙조가 붙잡았다.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젓자 해화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얼마 없는 짐을 챙기고 짐칸에 오르려는데, 해화가 낙조를 잡고 무언가를 건넸다. 휴대폰이었다.
“플래시 용으로 써.”
“고맙다.”
낙조는 흐린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통화권은 이탈되었지만 안에 있을 때 어느 정도 도움을 될 터였다.
마침내 짐칸에 오르자 병사 둘이 문을 닫으러 다가왔다. 한 명은 볼에 두꺼운 솜을 붙이고 있었다. 그는 낙조와 눈이 마주치자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그리곤 그렇게 말했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칸 안은 딱딱하고 서늘하기도 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몸을 짓눌렀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 주변을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낙조 자신뿐이었다. 곧 차가 출발하는지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거리며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떡하실 겁니까?」
「뭘 말입니까.」
「보고하실 거예요? 여기 변종, 있다고.」
「쓸 데 없는 소리는 나중에 들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할 때의 무흠은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자신의 변한 팔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무거운 목소리로 확신을 주었었는데.
병사들의 의견일까. 아니면 서연우? 그것도 아니라면, 중사의 개인적인 선택? 낙조는 홀로 짐칸에 갇힌 채 청주로 출발하게 된 원인에 대해 생각하다가 두 눈을 감았다.
사실 이 문짝이야 마음만 먹는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당장 부수고 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겨우 얻은 신뢰를 모두 잃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걸린 희망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서로 살려 내며 모인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
해화와 지운은 오토바이를 타고 낙조의 트럭 뒤쪽을 쫓았다. 끝없이 높아 보이는 하늘과 구름도 없이 맑은 날씨가 가을의 정점임을 알렸다.
아직 옷을 갈아입지 못한 푸른 잎사귀들이 선선한 바람에 팔랑댔다. 어렸을 땐 저 움직임이 살갗에 닿기만 해도 즐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해화는 스로틀을 세게 잡아당기며 생각했다.
무흠의 선택이 과연 어디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오래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지난 새벽에 무흠이 연우의 실험실에서 나오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잠든 걸 확인하고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무흠은 연우의 실험실 앞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갔다.
‘서연우가 어떤 정보를 흘린 거야. 일부러.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그렇지 않고서야 낙조를 가둔 채 청주로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해화는 잠긴 트럭의 문을 보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생사를 함께한 이를 이렇게까지 대할 이유가 있을까? 해화는 그 점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낙조는 연우를 살리기 위해 많은 위험한 순간을 감내했다. 그 시간들의 보답이 고작 이런 거라니.
고속도로는 이미 멈춘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부대가 알려 주는 대로 길을 돌아가자니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다행인 점은 인적이 드문 곳이라 변종을 볼 일이 없다는 거였다.
연우는 무흠과 함께 같은 차를 탔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낙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해화는 청주에 가까워질수록 몸속에서 피어나는 불안함에 치를 떨었다.
*
차가 서서히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잠에 들었는지 눈이 무거웠다. 낙조는 플래시를 켜 물을 찾았다. 곧 끼익, 하고 트럭이 완전히 멈췄다.
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혀 있어 잘 들리진 않았으나 계속해서 소리를 치는 듯했다.
변종인가? 낙조는 문 가까이 다가가 귀를 가져다댔다. 해화와 지운의 목소리도 종종 뒤섞여 들려왔다. 막상 볼 수 없으니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해 답답할 뿐이었다.
철컹.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트럭 문이 열리며 바깥의 빛이 한 움큼 쏟아져 들어왔다. 낙조는 눈을 찡그렸다가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연 건 볼에 부상을 입은 병사였다. 그는 낙조를 향해 다짜고짜 말했다.
“변종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수가 너무 많아서…….”
“중사님의 지시입니까?”
“예?”
“아닙니다.”
낙조는 트럭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논밭이 드리워진 길이었다. 수확하지 않은 벼들이 날아오는 바람에 둥실둥실 움직였다.
변종의 수는 서른 정도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이미 앞쪽에서 어느 정도 처리를 하고 있었지만, 총알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급히 낙조를 부른 듯했다.
‘내 처지가 이런 건가?’
낙조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청주에 도착해서도 이런 식으로 사용될까? 아니면 가만히 누워서 온몸에 빨대 같은 관을 꼽을까.
앞쪽엔 연우와 무흠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무흠은 낙조를 보고서 무어라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낙조 또한 그의 시선을 오래 받아 내지 않았다. 딱히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다는 것 빼고는 괜찮았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그렇게 불쌍하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다수를 처리할 땐 고속도로에서 사용했던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낙조는 속으로 옅은 분노를 끌어올리기 위해 생각을 더듬었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병사들, 연우의 아우성, 변종이 되기 전 자살한 노인, 그의 딸,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을 갈취하려던 무리, 무흠의 냉랭한 어투…….
고속도로 위에서 느꼈던 분노와는 다른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기억이 재조립되며 만들어진 형태는 분노보다는 서러움에 가까웠다.
이파리가 순식간에 돋아났다. 그리고 손바닥 안쪽에서 무언가가 하나 더 돋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빨리 치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저게 뭐야.”
“내, 내가 봤던 거랑 다른데.”
뒤쪽에서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낙조는 조금 흐릿한 인영들을 보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살짝 고개를 내려보니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는 달리 굵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온 게 보였다. 이파리는 나뭇가지를 감싸고 있었다.
머리, 아니면 심장이다.
낙조는 오른손에 힘을 준 채 변종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변종이 입고 있던 흰 티셔츠가 금세 진액과 피로 물들었다.
나뭇가지는 칼끝처럼 뾰족했다. 물론 물렁물렁한 몸을 꿰뚫는 느낌은 영 좋지 못했다. 낙조는 변종이 죽으며 터뜨리는 진액의 냄새를 맡고 떼로 덤벼드는 걸 보면서 칼을 휘두르듯 팔을 펼쳤다.
“키아아악!”
“까아악, 캬아아아악!”
“키에에에엑…….”
길가 옆의 언덕을 타고 뛰어 오르는 변종의 목을 왼손으로 붙잡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뭇가지는 길게 늘어나 한꺼번에 덤벼들었던 변종들을 한 번에 쳐냈다. 사방으로 날아간 변종들이 다시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기어오기 시작했다.
“히아아아악.”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지르며 기어 오는 변종은 두피가 거의 벗겨져 뇌가 보일 정도였다. 낙조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뭇가지로 뇌를 정확히 찔렀다.
아무리 변했다고 한들 촉각은 그대로 느껴졌다. 살면서 경험해 보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온갖 감각이 몸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길게 늘어난 나뭇가지는 채찍처럼 휘두를 수 있었다. 낙조는 한 번에 덤벼드는 것들은 먼저 쳐내고서, 가까이 있는 변종의 머리나 심장을 찔렀다.
손에 쉴 새 없이 피와 진액을 묻히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어서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윽.”
왼쪽에서 날아드는 놈을 쳐내고 눈을 돌리는 사이, 다른 녀석이 낙조의 몸 위로 달려들었다. 그대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변종은 두 손으로 낙조의 입을 쥐었다.
탕.
나뭇가지로 목을 꿰뚫을 생각이었다. 오른손을 들려는 순간, 총소리와 함께 변종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니 무흠이 권총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솔직히 말한다면, 고마운 마음보다는 원망스러움이 더 컸다.
낙조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남은 이는 열 마리 정도. 낙조는 나뭇가지를 있는 힘껏 뻗어 그것들을 끌어안는 것처럼 한 번에 휘감았다.
“캬아아아악!”
“히아악, 헤에엑!”
밧줄로 상체를 포박하듯 단단히 옭아맸다. 물론 열 마리를 한 번에 잡아 두려니 힘이 부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시간을 끌수록 체력이 바닥나는 건 낙조뿐이었다.
“저거, 뭐, 뭐하려는 거지?”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저 새끼들은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아주 구경 났지.
낙조는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떠냈다. 한 마리도 빠짐없이 잡은 걸 확인하고서 그대로 오른팔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나뭇가지가 더욱 단단해지며 한곳에 묶은 변종들의 몸을 조여 댔다. 이미 진액으로 가득 찬 몸은 물풍선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흑, 으…….”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느 새 땀이 맺혀 뚝뚝 떨어졌다. 다리의 힘이 풀려나갔다. 낙조는 오른팔에 준 힘을 조금이라도 놓지 않으려 애썼다.
“킥, 칵, 하아아악!”
변종들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낙조는 눈까지 질끈 감고 그들을 짓눌렀다.
“헉, 흐, 윽.”
숨이 아무렇게나 터져 나왔다. 정말 마지막이다. 낙조는 숨을 들이키고서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거의 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에서 열감이 올라왔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안쪽으로 말려드는 이파리가 변종들의 머리까지 감싸고, 나뭇가지는 더욱 빡빡하게 변종의 흉통을 압박했다.
마침내.
퍽, 펑, 푸슉! 팍!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한 순간에 터져 올랐다. 변종들이 상체는 폭발했다. 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진액이 튀지는 않았다. 상체가 터지면서 잘려 나간 변종들의 머리와 다리가 도로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다리에서 힘이 풀려 나갔다. 낙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헉, 허, 하악.”
눈앞이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고개를 흔들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고생했어요.”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다.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오른팔에 주사기를 꽂고 피를 뽑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하…….”
“변했을 때 세포분열이 어떻게 이루어지나 확인해야 해서요.”
낙조는 멍하니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까지 낀 채 낙조의 피를 빼갔다.
“낙조 씨.”
연우가 돌아가고, 힘이 빠져 거리에 주저앉은 채로 숨만 쉬고 있을 때였다. 머리 위에 그림자가 져 고개를 드니 무흠이 낙조를 불렀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손 대지 마요.”
부축을 해 주려는 듯 손을 뻗는 무흠에게 낙조가 경고했다. 오른손은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다만 힘을 너무 과하게 사용했는지, 돌아오는 속도가 이전보다는 느렸다.
“고낙조 씨, 할 얘기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금밖에 없습니다.”
“나 데리고 가면 훈장 하나 받으시겠네요. 고맙다는 인사는 안 듣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청주에 도착하기 전에―”
“아저씨!”
무흠이 다급하게 낙조의 어깨를 쥐려던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지운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홍지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변종 하나가 해화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병사들은 변종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해화와 그에 맞춰 움직이는 변종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중이었다.
“홍해화…….”
낙조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화와의 거리는 약 50미터. 달려간다면, 그때까지만 버텨 준다면…….
변종이 해화의 얼굴 위로 진액을 쏟아 냈다.
“누나!”
지운의 절규가 길가를 뒤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