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비밀은 약점이 될 수 있을까
분명히 트럭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운이 차에서 내리면서 확인했던 바로는 그랬다. 지운의 뒤에 바짝 붙은 남자는 덩치가 지운의 두 배는 돼 보였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병사들과 지운에게도 무기를 내려놓으라 말했다.
“살려 줄 거야. 우리도 잘 살아 있는 사람들 괴롭히는 거 싫어해요.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남자가 짐짓 너스레를 떨어 대며 말했다. 병사들과 지운은 중사의 뒷모습밖에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쥐고서 무리와 대치를 하는데, 무흠의 전투조끼 안에서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칙……, 치익, 분당구 부근에서, 치익, 대규모로 이동, 칙…….
“오오, 좋은 거 갖고 계시네?”
남자가 빙긋 웃더니 무흠의 전투복을 매만졌다. 무흠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곧 무전기가 꽂힌 곳을 찾아낸 남자가 휘파람을 부르며 무전기를 매만졌다.
“사실 이게 제일 필요한 건데 말이야.”
“무전기는―”
“―아, 나도 쓰는 법 알아. 군대 다녀왔어. 사람 뭐로 보는 거야, 빡치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전기를 신기한 듯 매만져댔다.
딱 봐도 나랑 동갑이거나 더 어릴 것 같구만, 왜 대장 노릇을 하지? 지운은 남자를 노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후, 후. 중사님, 고낙조입니다. 여긴 끝났습니다. 그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저씨 목소리다. 아저씨다. 지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병사가 갖고 있던 무전기로 무전을 친 모양이었다. 다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지운은 남자가 버튼을 누르고 입을 떼길 기다렸다.
“오, 동료가 있어? 음, 이거였나? 오랜만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
남자는 웃으며 버튼을 만지작거리다 곧 한 버튼을 눌렀다. 치익, 하는 소리가 편으점 내부를 가득 채웠다.
이때다.
“아저씨! 여기 GX 편의점! 살려 줘!”
일단 지르고 본다. 지운은 목청껏 외치자마자 옆에 있던 남자에게 붙잡혔다. 무전기를 들고 있던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지운에게로 다가왔다.
“넌 뭐야, 새꺄.”
“군대는 씨발, 무전기 버튼 위치도 못 찾는 새끼가 어디서 지랄이야.”
지운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남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래 봤자 눈높이는 얼추 맞았고, 덩치 또한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남자에게 붙잡혀 있단 게 문제였지만.
짝.
남자가 지운의 뺨을 때렸다. 왼쪽 볼이 얼얼할 정도가 아니었다. 화끈거리면서 따가운 게, 힘을 꽤나 쓰는 모양이었다.
“퉤.”
피가 미미하게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한 번 더 남자가 손을 공중으로 올렸을 때, 지운과 나이가 비슷한 병사 하나가 총구의 방향을 돌렸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이 새끼는 또 뭐야…….”
남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우스운 걸 봤다는 듯 웃는 모습이 역겨웠다. 그는 총구에 이마를 갖다대고 툭툭 병사를 건드렸다.
“야, 쏴 봐. 쏴 보라고.”
“…….”
“못 쏘잖아. 군인이 민간인 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남자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어댔다.
“아, 그래도 용기는 가상했다.”
그가 총구에서 이마를 떼어 내더니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곤 손을 휘휘 저었다. 가까이 있던 소총을 든 남자가 병사 앞으로 다가왔다.
“안 돼, 개새끼야!”
탕!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총알은 병사의 볼을 뚫었다. 그대로 쓰러진 병사가 억억거리며 숨을 허겁지겁 내뱉었다. 피가 폭죽처럼 솟아났다.
“씨발!”
지운이 몸부림치며 악을 질렀다. 지시를 내리는 남자가 다시 지운에게로 다가왔다.
“좀 이따 느이 친구들 오면 환영식 또 해줄게.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라.”
무흠에겐 여전히 두 개의 총이 겨눠져 있었고, 남은 병사도 붙잡혔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소총을 줍고 일어나며 아직 숨이 거둬지지 않은 병사의 얼굴을 발로 툭 건드렸다.
“뒤지게 징그럽네.”
*
“편의점, 편의점…….”
무전은 지운의 비명으로 끝났다. 아무리 다시 걸어 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지운의 목소리를 들은 해화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변종 무리가 완전히 지나간 후에야 빌라를 나올 수 있었다. 그새 십 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반대방향으로 가야 했다. 편의점이라면 찾기 쉬울 것이다. 약국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는 곳에 항상 놓여 있으니.
“다 죽여 버릴 거야.”
변종이 보일 때마다 건물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해화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엔 살기가 넘쳤다.
무흠은 차를 갖고 갔으니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일 수도 있었다. 거의 뛰듯이 도로를 건넜다. 종종 변종과 어쩔 수 없이 맞부딪칠 때면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터뜨렸다.
“저기.”
해화가 손가락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지운이 말한 편의점이었다. 확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거리와 시간을 재 봤을 때 딱 적당한 곳이었다.
“앞에 차 있네.”
결정적으로 편의점 앞엔 무흠과 지운이 타고 갔던 군사용 트럭이 주차돼 있었다. 오래 돼 보이는 다른 트럭도 보였다. 직감적으로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신들은 트럭 지켜 주세요. 우리가 안에 수습하고 올 테니까.”
“예? 그렇지만…….”
“걱정 마세요.”
낙조는 병사들에게 트럭을 맡기곤 정문 쪽에 쪼그려 앉아 내부를 살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머리를 잡힌 지운의 뒷모습, 두 손을 들고 고개를 떨군 무흠, 그리고 또다른 병사 한 명. 남은 한 명은 어디 있지? 주위를 살필 때, 해화가 낙조를 건드렸다.
“저 사람들, 총 있어.”
해화의 말에 다시 안을 주의 깊게 살피니, 그녀의 말대로 남자들의 손에 소총이 쥐어져 있는 게 보였다. 군인들이 쓰는 총이었다. 이런 식으로 약탈했구나. 모든 상황이 계산한 것처럼 딱딱 맞아갔다.
“하. 될 대로 돼라.”
낙조는 한숨을 깊게 내쉰 후 손목을 덮고 있던 소매를 걷어냈다.
“그걸로 막는다고?”
“저번에 대피소 앞에서도 이걸로 막았어. 생각보다 안 아파.”
“그게 문제야? 저 많은 것들을 다 처리할 수 있냐고.”
“정신만 흩뜨려놓으면 돼. 중사님이 괜히 중사 달았겠냐?”
낙조는 오른팔에 힘을 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구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안에 있는 이들을 살려내야 한다.
곧 피가 빠르게 도는가 싶더니 손끝에서 이파리가 돋아났다. 다른 때와는 달리 더욱 두껍고 무겁게. 이파리의 끝은 바늘처럼 뾰족해져 있었다.
한번 주먹을 쥐었다 펴 본 낙조는 머리와 상체를 가릴 정도로 이파리를 뭉치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 너 친구들, 악, 씨빠, 저게 뭐야!”
“괴물이다!”
“쏴! 죽여, 죽여!”
낙조의 팔을 본 이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낙조는 허리를 숙여 가까운 진열대 밑으로 들어갔다. 총알이 벽에 튀고, 박히는 것이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중사님, 전 중사님 믿습니다?
낙조는 숨을 고르며 자신이 숨은 진열대로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뭐해, 빨리 죽이라고!”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낙조는 그림자가 가까워질 무렵 손을 뻗었다. 진열대 밖으로 이파리가 나가는 동시에 이방인의 발목이 잡혔다.
“아아아악!”
이파리는 남자의 발목을 세게 감싸고 뾰족한 끄트머리로 살갗을 찍어 눌렀다. 남자의 발목에서 곧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는 총을 놓쳤고, 그새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해화가 총을 들었다.
“아, 씨발, 나 쏠 줄 모르는데.”
해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쏠 줄 몰라도 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해화는 그대로 지운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억!”
“야, 씨빠 새끼들아! 죽이라고!”
무전기를 든 남자는 똑같이 총만 든 채로 소리를 지르다가 직접 쏘려는 듯 해화를 저격했다.
그러나 그는 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법도, 장전을 하는 법도 몰랐다. 방아쇠를 아무리 힘껏 당겨봐도 당겨지지 않았다.
“씨, 발……, 단발, 도, 못, 맞추는, 새끼네.”
피를 흘리며 꾸역꾸역 숨을 삼켜 내던 병사가 중얼거렸다. 남자는 총알이 나가지 않자 당황하며 총을 냅다 바닥에 던졌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허공에 휘둘렀다.
총을 든 남자들은 낙조가 숨은 진열대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러나 이미 낙조의 힘을 봤기 때문에 쉽사리 안쪽으로 접근하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 한꺼번에 갈겨!”
중년 남자가 외쳤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었다. 탕, 탕, 타탕, 탕! 연사로 쏟아지는 총탄 소리에 무흠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어, 어어, 어……?”
무흠은 음료수 진열장 유리로 비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이들의 시선도 낙조가 있는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저리 놀라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을 노려야 하는 건 확실했다.
곧장 뒤돌아 주먹으로 오른쪽에 있는 이의 명치를, 왼쪽에 있는 이의 턱을 가격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뼈가 아니라 이 이방인들의 것이. 억 소리도 없이 쓰러진 남자들의 총을 주운 무흠은 안전장치를 풀고 단발에 맞춘 후 일부러 벽을 향해 쏘았다.
탕!
탕! 탕!
겁을 주기 위한 샷이었다. 예상대로 남자들은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흠이 개머리판으로 쓰러진 남자의 급소를 노리려고 할 때였다.
“……?!”
웬 두껍고 붉은 이파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남자의 허벅지를 단단히 옭아맸다.
“아악! 아아악!”
그리곤 즙을 짜듯 비틀었다. 뼈가 가루처럼 조각나는 고통에 남자가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 장면을 본 다른 이들은 편의점에서 그대로 도망쳐 나갔다.
“씨, 씨빠, 씨빠 새끼들이……!”
잭나이프를 든 남자는 편의점 가운데에 서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씨빠! 가까이 오면 죽여 버릴 거야!”
남자에게서 가까스로 풀려난 지운이 망치를 다시 집어들려고 할 때였다. 잭나이프를 쥔 남자가 지운에게 달려들어 지운의 목을 팔로 껴안고 귓가 옆에 잭나이프를 가져다댔다.
“홍지운!”
해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몸이 멋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죽인다 했어!”
해화가 골프채를 쥔 채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자, 남자는 보란 듯 지운의 목을 살짝 그었다. 조금 파인 살갗 사이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개새끼가, 씨발, 아프다고.”
지운이 중얼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남자의 힘은 이길 수 없었다. 키는 작았으나 그 안에 담긴 에너지가 어마어마했다.
“리더의 자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왜 네가 대장 노릇을 할까.”
비척대며 낙조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손에서 피어난 이파리는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총알이 박힌 곳도 있었지만 낙조는 아픈 기색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죽인다는 게 너한테는 참 쉬워 보여서 네 말을 들어줬나?”
낙조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남자는 피를 뒤집어쓴 낙조의 모습에 기겁했지만 지운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죽인 적이 있어봤던가. 그게 무서워서 네 말을 들어줬나…….”
낙조는 서서히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총을 맞은 부분에선 계속해서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프다는 통각보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힘을 돋게 했다.
시간을 끄는 건 이 정도로 충분했다. 낙조는 숨을 가득 들이켜고서 정확히 남자의 얼굴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어……억.”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뒤로 넘어갔다. 챙강, 잭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홍지운!”
해화가 비틀거리는 지운을 부축했다.
“아, 누나, 존나 아파. 어떡해, 나 죽는 거 아니야?”
“죽긴 씨발, 베인 거 갖고 엄살 존나 떠네. 내가 그니까 깝치지 말랬지!”
“아, 아파, 아팡.”
지운은 긴장에 잔뜩 절어 있던 해화에게 금세 웃음을 보였다. 해화는 지운의 상처를 확인한 후 쓰러진 남자의 복부를 세게 걷어찼다. 남자는 기절한 듯 조용했다.
낙조는 서서히 돌아오는 오른팔을 보며 숨을 골랐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맞았나. 어깨 부근까지 고통이 올라왔다. 피에 찌든 것처럼 보이는 오른팔엔 더 이상 힘을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으…….”
“고낙조 씨!”
왼손으로 진열대를 잡고 버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대로 바닥에 구른 낙조를 받쳐 들은 무흠이 소리쳤다.
“가운데 쪽에 병사 한 명 쓰러져 있을 겁니다. 부탁합니다.”
해화와 지운에게 말한 무흠은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낙조의 오른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피를 잔뜩 머금은 이파리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손가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게 그겁니까? 성공한 결과.”
“……들켰네요, 다.”
“일단 돌아갑시다. 총알이 너무 많이 박혔습니다.”
“어떡하실 겁니까?”
“뭘 말입니까.”
“보고하실 거예요? 여기 변종, 있다고.”
낙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두 눈도 겨우 뜨고 있는 상태였다. 졸음이 몰려왔지만 지금 눈을 감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간신히 버텨 내고 있는 중이었다.
“쓸 데 없는 소리는 나중에 들어드리겠습니다.”
무흠은 낙조의 왼팔을 어깨에 두르고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통에 절인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편의점 앞에 있던 오래 된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무흠이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헐레벌떡 뛰쳐나와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대답했다.
무흠은 낙조를 바닥에 눕히고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피가 잔뜩 묻은 군복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돌아가는 길은 조용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