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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7화 (17/202)

17화. 개인의 죽음

웬만한 물품들은 건물에서 찾아냈지만 사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몸을 보호하는 용도로만 써도 바닥이 드러날 정도였다. 진통제와 활력을 돋워주는 약들도 필요했다.

약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큰 대로변 근처엔 언제나 병원이 있고, 병원이 있는 건물 일층엔 약국이 있다.

변종을 일일이 상대하며 가는 것보다 몸을 숨기면서 이동하는 게 더 빠르다는 걸 알았다. 낙조는 몸을 움츠린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거리를 활보하는 변종은 얼마 없었다.

“대피소로 피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건지, 뭔지…….”

낙조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젠 불도 깜박거리지 않는 신호등 앞 횡단보도를 지나 약국의 문을 열었다.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이리저리 넘어지고 어질러진 상자와 깨진 유리병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병사 둘은 입구를 지키고, 낙조와 해화가 어지럽게 널린 약을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소염제랑 진통제, 해열제, 또 뭐 필요하지?”

해화가 하나씩 가방에 주워 담으며 물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몇 개 남지 않은 붕대와 크기가 큰 데일밴드를 황급히 가방에 넣었다.

“소화제도 필요할 거고. 아, 맞다. 연고도. 박카스 꼭 챙겨.”

“유리는 무겁고 잘 깨져서 불편할 텐데.”

“밤새워 운전할 텐데 몇 개는 필요하겠지.”

낙조는 긴 탁상 위에 놓인 어린이용 캔디도 한 움큼 쥐었다. 배고픈데 식량을 아껴야 할 때 도움이 될 터였다.

가방이 꽤 묵직해졌다고 느껴질 즈음 밖으로 나섰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둘은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돌아가는 길만 안전하다면 작전은 성공이었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대로변 쪽을 통과할 즘이었다. 익숙하지만 절대 반갑지 않은 소리가 동굴 안쪽에서 들려오며 웅웅댔다.

“한둘이 아니야.”

맨앞에 선 낙조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고속도로에서도 들어보았던 소리였다. 적어도 수십이다. 무리라고 하기에도 유치할 정도로 많은 수였다.

낙조의 말대로 곧 도로 끄트머리에서 변종의 머리들이 하나 둘씩 솟아났다. 그들은 정처 없이 걷고 있는 듯 보였지만 방향은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낙조는 주변을 둘러보다 현관 유리가 깨진 빌라를 가리켰다.

“일단 안에서 숨어 있는 게 좋겠어요.”

작은 화단을 넘어 빌라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조용히 계단을 밟아 위로 올라갔다. 2층의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낙조는 개중 가운데에 있는 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철컥, 쉽게 문고리가 돌아갔다. 병사가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한 채 문 앞에서 대기했다. 하나, 둘, 셋. 모두가 숨을 죽였을 때 문을 활짝 열었다.

“…….”

“빈 집이네.”

해화가 중얼거렸다. 병사가 소총을 내려놓자 해화는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급히 짐을 쌌는지 이리저리 양말이나 옷 같은 것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대피소로 갔나?”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 해화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몸을 바짝 움츠린 채 밖을 내다보았다.

“존나 많네…….”

수십이 아니었다. 못해도 백 명은 되는 듯했다. 거리에서 홀로 돌아다니던 변종들은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소리가 없는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 것일까. 진액의 향기로 모든 걸 얘기하고 있는 걸까. 해화는 본부 건물에서 보았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진액 덩어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낙조는 열린 화장실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닫혀있는 문은 방 하나뿐이었다.

“…….”

꽉 다물려 있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급하게 닫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낙조는 헐겁게 달린 문고리를 매만지다가 귀를 먼저 문에 가져다 댔다.

“학, 하악, 카악…….”

몸을 흠칫거리며 상체를 세웠다. 부엌에서 찬장을 열어 보던 병사들이 낙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뭡니까, 방금?”

“…….”

낙조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베란다에서 변종들을 살피던 해화도 소리를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왔다.

열어야 할까?

낙조는 문고리를 손에 살짝 건 채 고민했다. 소리를 들었을 땐 변종과 다를 게 없었다. 그저 기저질환이 있는 환자일 수도 있잖아. 수 개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흑, 으억, 컥…….”

숨소리까지 죽이자 안쪽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해화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문 열지 마.”

해화가 말했다. 낙조는 문고리에 걸었던 손의 힘을 잠시 풀었다.

“그냥, 그냥 지나갈 때까지만 기다리자. 먼저 우리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해화의 속살거림과 안에서 울리는 거친 호흡이 뒤섞여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화의 말대로 먼저 공격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이가 감염이 아닌 다른 질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거라면? 상황이 상황이니 그런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확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뭘 생각하는 거야.”

해화가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고민에 빠지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편이라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었다.

“고낙조, 문 열지 마.”

해화가 다그치듯 한 번 더 말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호흡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느껴졌으면 뛰쳐 나왔을 거야.”

낙조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병사 한 명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안 됩니다. 입모양으로 벙긋거린 병사는 낙조의 손목을 잡아 문고리에서 떼어내려 했다.

“나 믿어요.”

낙조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심하고 뒤늦게 대처를 하는 것보단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결국 병사는 낙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낙조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오래 된 문이라 그런지 열리며 끼이익, 하고 세월의 소리를 흘려냈다.

“…….”

안에서 들려오던 신음이 완전히 멈추었다. 낙조는 문을 완전히 젖히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아…….”

병사가 곁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눈을 떠보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커튼에 목을 맨 키 작은 노인이 허공에서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숨이 이제 막 끊긴 듯했다. 낙조는 허리를 굽혀 조그마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티비 하나, 정돈되지 않은 이부자리, 먹다 만 음식……. 어디 하나 잘 정리된 것이 없었다.

낙조는 반쯤 감긴 노인의 눈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눈을 완전히 감겨주었다. 노인의 손등 위엔 흉터처럼 나무껍질이 올라와 있었다.

해화는 가만히 방 안을 응시하다 낙조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노인의 목을 묶은 커튼의 매듭을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뭐해.”

낙조가 물었다. 해화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놔두고 가? 할 수 있는 건 해드려야지.”

해화의 말에 낙조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 노인의 몸을 받쳐 들었다. 조금 더 수월하게 커튼의 매듭을 푼 해화가 바닥에 깔린 이불을 걷어냈다.

낙조는 아직 굳지 않은 노인의 몸을 그 위에 눕히고서 두 팔을 가지런히 모이도록 놓아 주었다.

해화는 노인의 몸 위로 이불을 도로 덮어 주곤 두 손을 모았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기도 비슷한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천국 가세요.”

낙조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그것뿐이었다. 이들을 위한 천국은 따로 만들어져 있을까? 해화는 낙조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이불을 얼굴 위까지 덮어주었다.

해화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낙조를 막지 않았으면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야, 이미 감염된 사람이었잖아. 살린다고 해도 어차피 죽어야만 했던 몸이었을 테니까. 살리는 걸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야.

휘몰아치는 생각에 좀처럼 발을 뗄 수 없었다. 낙조는 여전히 방안에서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컥.

분명 닫았다고 생각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병사들은 황급히 사격 준비 자세를 갖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부, 아부지.”

이미 감염된 듯 피부 위에 나무 껍질이 조금 돋아난 중년 여성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있는 이방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노인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부지, 약 가져왔어.”

“…….”

“아부지, 콜록, 컥, 커윽, 아부지…….”

가지런히 정돈된 사물처럼 누워 있는 노인을 보고, 여자가 울부짖듯 노인을 불렀다. 그녀는 꽉 물렸던 자국이 남은 커튼과 목에 붉게 부푼 상흔을 번갈아 보며. 언어를 잊은 것처럼, 몸을 쥐어짜듯 울기 시작했다.

“아……, 커흑, 컥, 켁.”

바닥에 검은 봉투가 떨어졌다. 봉투 안에선 온갖 연고와 약들이 담겨 있었다.

곧 여자가 노란 진액을 이불 위에 토해냈다. 해화는 골프채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꼈다. 더한 고통을 느끼기 전에 처리하는 게 맞는 일일까.

“쏴 주세요.”

낙조가 병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병사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총을 들었다.

탕.

진액을 게거품처럼 물고 괴로워하던 여자가 이불 위로 툭 쓰러졌다. 귀가 멎은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런 죽음을 앞으로 수없이 봐야 할까? 낙조는 덩그렇게 서서 생각했다. 과연 이 지옥에 끝은 있을까. 방을 나오니 등 뒤가 시렸다.

*

거리에 놓인 차들은 레고 블록처럼 아무렇게나 정차돼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무흠이 옆에 앉은 지운에게 물었다.

“낙조 씨랑 잘 아는 사이입니까?”

“아저씨요?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됐어요.”

“아저씨처럼 보이진 않던데.”

“형이라고 하기엔 좀, 오글거려서요.”

지운은 망치를 품에 껴안은 채로 말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변종 몇몇이 차를 쫓아오긴 했으나 차의 속도를 이기진 못했다. 마트보다는 조금 큰 편의점을 찾는 게 나았다.

“중사님, 저기 보입니다.”

코너를 꺾었을 때 병사 하나가 말했다. 익숙한 편의점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꽤 넓어 보이는 곳이었다. 편의점 앞엔 흔히 볼 수 있는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오래 굴렀는지 여기저기 스친 흔적이 많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넷은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편의점 문을 열었다.

딸랑, 문에 달려있던 작은 종이 울렸다. 무흠이 맨 앞에 서서 권총을 든 채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과자와 컵라면, 물이 있는 곳은 거의 비어 있었다. 우유나 유제품은 거의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기 때문에 제외했다. 냉장고도 꺼진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르기에 쉽사리 식량을 챙기기 힘들었다.

“이거 먹을 수 있을까요? 밥 먹고 싶은데.”

지운이 레토르트 식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전자레인지, 건물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운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병사가 곁에서 말했다. 지운은 싱긋 웃고서 가방에 잔뜩 레토르트 음식을 넣었다.

“통조림이 많이 남아서 다행입니다.”

다른 병사가 유통기한을 확인하며 통조림을 쓸어담았다. 무흠은 음식을 살피기보다 주위를 경계하는 데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어쩐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적힌 문이 거슬렸다.

“…….”

“모두 조용.”

가만히 그 문을 바라보던 무흠이 뒤돌아 말했다. 순식간에 편의점 내부가 조용해졌다. 무흠은 사격 자세를 취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분명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끼이이익.

문고리가 아래로 내려가더니 서서히 문이 열렸다. 변종이라면 곧장 머리를 터뜨릴 생각이었다.

“……어, 억. 저, 저, 저 괴물 아니에요!”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사람이었다. 감염 증상도 보이지 않는, 일반 사람.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는 두 손을 들고 밖으로 슬그머니 나왔다.

“아, 죄송합니다. 변종인 줄―”

무흠이 안심하고 총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뒤에서 두 명의 남자가 튀어 나오더니 동시에 무흠을 저격했다. 들고 있는 총은 군인들이 쓰는 소총이었다. 주운 건지, 빼앗은 건진 몰라도 소총이 확실했다.

“총 버려. 손 들고.”

젊은 남자는 벌벌 떨던 기색을 버리고 중얼거렸다. 무흠은 양쪽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남자들을 한 번씩 바라봤다가 조심스럽게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중사님!”

뒤에서 병사 두 명이 똑같이 남자 둘을 겨누었다. 그러나 지시를 내리는 젊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사들을 응시했다. 하찮은 것을 보듯 시선은 가벼웠다.

딸랑.

편의점 종소리가 또 울렸다.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라 쉽사리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지운만이 고개를 돌려 문을 확인했다.

또 다른 무리였다. 나이대는 다양해 보였다. 그들은 둔기나 소총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천천히 병사들과 지운을 포위하자, 무흠이 두 손을 든 채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총. 탄알.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놔.”

무흠과 남자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목 뒤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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