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긋나기 시작하는 목적지
새벽이 되어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다시 들어오려는 것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동그랗게 모여 앉은 낙조와 무흠의 병사들은 한 마디씩 의견을 내놓았다.
“문을 일단 막아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상이나 의자는 많으니까…….”
“혹시 모를 탈출구는 만들어 놔야 하지 않을까요?”
병사들은 낙조의 무리가 오기 전 이미 제 3별관의 구조를 모두 파악해 놓은 후였다. 덕분에 어디를 막을지, 피치 못할 상황엔 어디로 빠져나갈지 계획하는 건 쉬웠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변종들은 아직 안으로 들어올 기미를 보이진 않았다. 병사들과 함께 1층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모아 정문 앞에 쌓아두었다. 이것조차 임시방편이었지만 안 하느니만 못했으니까.
“먹을 건 얼마나 있나요?”
낙조가 한 병사에게 물었다. 그 병사는 병우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어쩐지 마음이 쓰여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거의 인스턴트가 대부분이라……, 그래도 있다는 게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쌍꺼풀 없는 눈을 선하게 휘며 웃었다. 낙조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이전에 챙겼던 에너지 바 하나를 건넸다.
“배고플 때 드세요.”
“어,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희는 좀 챙겨 왔거든요.”
낙조는 부드럽게 권유했다. 병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까지 치다가 결국 그 조그마한 에너지 바를 받아들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예.”
병우가 군대에 간 이후 이 사태가 터졌다면, 저런 얼굴을 했었을까. 낙조는 찝찝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
이틀 동안 내리는 비는 건물 내에 적막함을 전염시켰다. 모든 인원이 점점 기운을 잃어가고 말이 없어졌다.
“새벽에 비가 그칠 수도 있으니까 2인 1조로 보초를 서겠습니다.”
무흠은 이른 저녁에 모두를 불러 놓고 그리 말했다. 영양가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했다.
조를 짜기 위해 잠시 흩어졌을 때, 해화가 가만히 서 있던 연우에게 다가갔다.
“언니, 저랑 해요.”
연우는 잘 먹지 않고 자지도 못해서 푸석푸석한 얼굴을 들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연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화는 골프채 끄트머리에 칼을 달아 테이프로 묶었다. 연우는 여전히 야구 배트를 든 채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았다.
“방망이에 못 같은 거라도 박는 거 어때요? 영화에서 보면 그렇게들 많이 쓰던데.”
“…….”
연우의 눈빛엔 생기가 없었다. 해화의 말에도 그녀는 말없이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니는 가족 있어요?”
이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이라도 해야 시간이 갈 것 같아, 해화는 느지막이 질문을 꺼냈다. 한참 밖만 바라보던 연우의 고개가 서서히 옆으로 돌아왔다.
“네.”
“언니 목소리 오랜만에 듣네.”
“근데 다 외국에 있어요.”
많이 잠긴 목소리는 차분했다. 넋이 거의 나간 얼굴을 한 연우가 마른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섬에 살아서……, 안전할 거예요. 내가 괜찮다고, 나 살아 있다고 연락해 줘야 하는데…….”
연우의 중얼거림에 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듣는 연우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깊은 내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를 조금씩 알아내는 데에는 필요한 정보였다.
“만약 본부가 멀쩡했다면, 와서 뭐 하려고 했어요?”
귓가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의존한 채 물었다. 해화는 날카로운 칼끝을 바라보았다. 문밖에 고인 물웅덩이 위로 수도 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언니가 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해화의 말에 연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곧장 대답해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해화 또한 보채지 않았다.
“……고낙조 씨에 대해 보고하려고 했죠. 백 퍼센트의 확률보다 더 연구할 가치가 있는 성공한 샘플이니까.”
‘샘플’이란 단어에 해화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어쩌면 저렇게 변하는 게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더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구요.”
그렇게 말하며 밖을 응시하는 연우의 눈에서 보이는 건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를 정도로 짙은 어둠뿐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백신을 만드는 건데, 그러려면 변종의 피도 여러 개 필요하고 항체를 찾아야 하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죠.”
해화는 ‘항체’란 단어를 듣고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영화 보면 항상 백신을 만들기 위해 모험을 떠나죠. 백신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해요. 물론 다른 나라에서, 아니면 우리 나라에서도 백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을 수 있지만……, 아주 먼 얘기예요. 그 이전까지 살아 있으려면 백신처럼 보이는 예방책이 필요하고요.”
연우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을까? 해화는 연우를 곁눈질로 응시하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하든 연우를 자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연우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가능성이 있는 건 낙조 씨 피로 우리 모두 낙조 씨처럼 되는 거예요. 그럼 스스로를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요.”
분명 낙조와 함께 연구소를 탈출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서로 지키고 지켜 주며 여기까지 왔을 텐데. 연우가 내뱉고 있는 말엔 낙조를 배려하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해화는 섬찟 돋는 소름에도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차분히 연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골프채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해화 또한 낙조가 변한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의심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그를 믿었던 건 변종과는 확연히 다른 겉모습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해화는 조용히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그 뒤로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근데, 다리 다쳤어요?”
연우가 처음으로 해화에게 질문했다. 해화는 그녀의 시선이 닿은 왼쪽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어설프게 붕대로 감은 곳이었다. 해화는 손으로 발목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 그냥 좀 욱신거려서요.”
“아아…….”
연우는 그리고 말이 없었다.
나는 나와 눈을 마주칠 줄 아는 생명이 죽는 게 두렵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 공간조차 안전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
해화는 속으로 일기를 적듯 마음에 생각을 기재했다.
*
다음 날엔 해가 떴다. 보초를 서던 병사 두 명이 사무실로 올라와 몇몇 변종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무흠은 모두 무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종을……, 생포하는 건 어떤가요.”
가만히 서 있던 연우가 말했다. 병사들의 표정은 단번에 구겨졌다.
“변종의 피를 샘플로 만들어서 아직 안전한 연구소로 보내는 거예요. 도움이 될 겁니다. 백신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할 거고요.”
해화는 연우의 뒤편에 서서 조용히 입술에 난 거스러미를 뜯어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백신에 대한 희망은 없다고 얘기한 사람이 갑자기 샘플을 구하자고 의견을 낸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인터넷도 끊겨서 연구소로 샘플을 보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병사 한 명이 짐짓 무겁게 말했다. 연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미 다 준비해 둔 대답이었는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직접 가는 수밖에 없죠.”
“말 한 번 쉽게 하십니다. 가는 동안 연구소가 털리면요!”
“모든 기관이 다 습격당하진 않았을 거예요. 전염병이 돈 지 이제 사흘째예요. 변종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고요. 우리처럼.”
무흠은 날카로운 눈으로 연우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금의 허점이라도 잡히면 그녀의 목을 깨물 것처럼 발톱을 숨긴 짐승과도 같이 보였다.
“내가 살아 있듯이 다른 연구원이나 역학조사관이 살아 있을 수도 있어요. 힘을 합쳐야 합니다. 자료가 많을수록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속도가 빨라져요.”
연우의 목소리엔 당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전날과는 달랐다. 밤새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그녀는 식사도 처음으로 깨끗하게 끝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무흠이 물었다.
“어느 연구소로 갑니까.”
“중사님께서 연락을 취해 주세요. 아마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연구 지시를 내린 곳이 있을 거예요. 없을 리가 없어요.”
연우는 또박또박 말을 전했다. 무흠은 손끝으로 짙은 눈썹을 매만지다가 잠시 고민하는 듯 바닥을 응시했다. 병사들은 무흠이 고민하는 게 불안한지 연신 눈알을 굴려댔다.
“그런 연구소가 있는지 먼저 확인해 보고 얘기하겠습니다.”
무흠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
무흠이 사무실을 나가고, 연우가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해화가 낙조를 조그마하게 불렀다. 그녀는 낙조를 사무실 구석으로 데려간 후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서연우 씨?”
“응.”
“…….”
“조심해.”
해화는 연우가 사무실로 들어올까 문 쪽을 계속 살피며 짧게 얘기했다. 낙조는 눈을 한번 내리깔았다가 대답했다.
“내가 눈치가 그 정도로 없지는 않아.”
“뭐?”
“정확히는 모르지만 서연우가 쥐고 있는 카드 중에 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낙조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대고서 중얼거렸다. 해화는 짧게 한숨을 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냥 멘탈이 나간 줄 알았는데, 이젠 좀 무서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낙조는 손가락을 매만지며 잠시 말을 거두었다가 해화를 향해 속삭였다.
“사람이 구석에 몰리면 못 할 짓이 없지.”
낙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전 중인 무흠 쪽으로 다가갔다. 해화는 낙조의 뒷모습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켜 냈다.
“……국립감염병연구소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입감.”
무전을 막 끝낸 무흠이 곁에 온 낙조를 돌아보았다.
“참 신기합니다. 정말 저 여자 분 말대로 정부 지시를 받은 연구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낙조는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연우의 말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선 분명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듯 따를 것이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든 그 결과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청주 흥덕구입니다. 신종바이러스연구센터에서 자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무흠의 말에 낙조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다.
신이 있었다면 신에게 매달렸을까. 신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신을 원망해 봤을까. 살아 있는 것에 염증을 느끼며 통곡했을까.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을 신이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원받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을까.
신은 죽는 이를 환영할까?
낙조는 연우에게 다가가는 무흠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빛이 두 팔을 벌려 죽은 이를 품에 껴안는 상상을 했다.
그리 즐거운 상상은 아니었다.
*
세 마리를 먼저 생포하기로 했다. 치명상 또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미끼가 될 사람과 문을 열고 닫을 사람을 정하고 남은 병사들은 변종을 붙잡아 입을 막은 다음 묶기로 했다.
미끼는 달리기가 빠른 지운, 문을 관리하는 사람은 힘이 센 낙조와 무흠이 맡았다. 모두가 일층에 모여 준비를 갖췄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소총을 들고 사격준비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병사 두 명은 조금 떨고 있었다.
“셋 하면 엽니다.”
무흠이 말했다. 지운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문을 열자 지운이 그 틈을 비집고 나갔다. 투명한 문 너머로 지운이 가까이에 있는 변종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해화는 골프채를 쥔 채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괜히 깝치지 말고, 홍지운.”
해화는 스스로를 달래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운을 발견한 변종이 노란 진액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지운은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변종이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변종은 생각보다 빨리 달렸다. 해화의 말대로 조금 자라난 식물처럼, 손끝엔 나뭇가지가 징그럽게 뻗어 있었다.
“빨리!”
거리가 서서히 좁혀졌다. 지운은 낙조가 소리친 후부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의 틈을 열고, 지운이 바닥을 구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닫아요!”
변종이 손을 뻗으며 안쪽에 온몸을 들였다. 동시에 낙조가 소리쳤고, 무흠은 다른 변종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위아래로 잠갔다.
“잡아!”
얇은 이불을 들고 있던 병사가 변종의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줄을 쥔 병사 둘은 그 다음 팔과 다리를 차례대로 묶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변종은 바닥에서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헉, 허억, 와아, 씨…….”
밧줄을 묶은 병사가 뒤로 나자빠지며 숨을 골랐다.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건 해화와 연우뿐이었다.
해화는 연우를 지켜보고 있었고 연우는 잡힌 변종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깐 움직인 건, 낙조가 치웠던 책상과 의자를 다시 문 앞에 쌓아 올릴 때였다.
첫 번째 변종 포획 성공. 사망자 없음. 부상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