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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1화 (11/202)

11화. 의심을 부수는 힘

“옆으로 넘어가!”

낙조는 지운의 어깨를 꽉 쥐고 외쳤다. 지운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반대편 차선을 가리켰다.

“넘어갈 수 있지?”

안 되어도 되게 만들어야 했다. 지운은 속력을 낼 곳이 없다며 난처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것 말고는 저 떼로 몰려오는 변종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톨 게이트 쪽으로 돌아가서 넘어. 홍해화! 잘 따라와!”

해화는 이번에도 헬멧을 연우에게 넘겨주었다.

다들 차에서 내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도망가고 있었다. 속도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운은 갓길로 빠져 최대한 속력을 낼 수 있을 만큼 스로틀을 잡아당겼다.

차창이 깨지는 소리, 변종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비명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낙조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변종과의 거리를 눈으로 쟀다.

떼로 덤벼들면 감당할 수 없다. 힘을 어떻게 쓰는지는 알았지만 다수를 상대할 땐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변종을 녹이는 방법과 머리를 터뜨리는 것 말고, 한 번의 공격으로 시야를 뚫을 수 있을 정도의 파워와 스킬이 필요했다.

게임이라면 가이드 같은 거라도 줬을 텐데, 현실에 닥친 재난에선 방향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도망만 다니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낙조는 들어왔던 톨 게이트의 간판을 보며 생각했다.

목숨이 여러 개였다면, 혹은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 같았다면 겁도 먹지 않고 제 변종 떼에게 덤벼들었을 텐데. 직접 부딪치는 방법 말고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

조금 전, 남자를 집어던질 때 오른팔에서 느껴졌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낙조는 오토바이에 탔던 남자를 던진 순간을 떠올렸다. 변종의 진액이 근처에 있던 것도 아니었고 변종의 냄새를 맡지도 않은 상황에서 괴력이 솟았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파리까지 터뜨렸을 수도 있었다.

‘감정이 공유되나?’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득, 번개가 꽂힌 것처럼 눈앞이 빛났다.

“홍지운, 반대편 넘어가면 역주행할 거니까 정신 똑바로 잡아.”

“알아, 알거든요!?”

지운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곧 하이패스 톨 게이트를 돌파했다. 다른 차선으로 해화도 비슷한 속도로 곁에 따라붙었다.

곧 주황색과 흰색이 뒤섞인 플라스틱 안전용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운은 핸들을 꺾고 속력을 높이며 그대로 그것을 들이박았다.

쾅, 쿵.

오토바이가 몇 번 덜컹거리고, 허공에 조금 뜬다 싶더니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반대편을 달리는 차는 몇 대 없었다. 뉴스를 본 이들이라면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가까운 대피소로 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겠다.

“난 이제 모른다!”

지운이 외치며 역주행을 하기 시작했다.

낙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원래 내 몸에 있던 세포와 결합이 됐든, 내 세포를 먹었든. 지금은 내 몸의 일부가 된 거잖아. 뇌랑 연결된 건 당연한 거고. 내 의식과 직관적으로 연결됐다면…….’

경적을 울리며 곁을 스쳐 지나가는 차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낙조의 눈앞에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맨 처음, 이 손으로 병우를 죽였을 때. 머리가 녹아 없어진 후 병우의 시신에선 뿌리가 기어 나왔다. 다른 변종을 처리할 땐 그저 머리만 없어지고 몸만 남았는데.

‘내 의식에 따라 분출되는 힘이나 액이 따로 있다면?’

두 눈이 느리게 감겼다 뜨였다.

병우의 머리가 녹아가는 걸 느낄 때 자신은 어땠나. 몸이 변한 것에 대해 놀란 것에 멈추지 않고, 제 손으로 병우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 정신을 가만두지 않았다. 미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확히 그 감정을 무엇이라 부르긴 어렵지만, 다른 변종을 처리할 때와는 분명 다른 마음이었다. 미안함, 고통스러움, 자기모멸감…….

그런 것들이 병우의 몸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게 했다면. 그리고 가족을 버린 남자에게서 분노를 느껴 힘이 치솟은 거라면 확실하다.

‘안 된다는 보장은 없는 거다.’

낙조는 지운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오른손을 허공에 펼치고 반대편 차선을 바라보았다. 목을 긁는 듯한 소리를 지르면서 사람을 찾는 변종들의 움직임.

그 광경은 낙조에게 지긋지긋함과 옅은 분노, 그리고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을 일구어냈다.

곧 오른팔이 저릿할 정도로 아프더니, 손바닥 안쪽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당황하지 않고 속에서 움직이는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오른손이 남는 힘을 받게끔 만들었다.

손가락 관절이 우둑, 투둑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이파리가 피어 나왔다. 변종을 처리할 때와 형태는 비슷했지만 색이 달랐다. 혈관처럼 검붉은 줄기가 이파리마다 그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바닥 안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오감을 믿어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이번엔 더 특별하게.

“아, 아저씨, 미쳤어?!”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며 바닥을 굴렀다. 고통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놀란 지운이 속도를 늦추며 외쳤다.

“앞으로 계속 가! 터널 앞에서 만나! 늦지 않게 갈 거니까.”

낙조는 잔뜩 부푼 이파리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뒤따라 오토바이를 멈춰 세운 해화가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저 난장판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라고 네가 그랬잖아.”

낙조는 덤덤하게 말하곤 차로 중앙에 있는 벽을 넘었다. 오토바이로 달리던 차선과는 정 다른, 지옥의 입구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디부터 해봐야 하나. 막상 깔린 판에 뛰어드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건 오감이긴 했는데, 순서가 잡히지 않은 곳에 발을 디디니 모든 계획이 흐트러진 기분이 들었다.

“씨발 뭐, 그냥 해야지.”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마침 달려드는 변종의 목을 왼손으로 잡아 틀었다. 당장 오른손에 뭉쳐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으니.

그때까지 꽉 쥐고 있던 오른손을 변종의 얼굴 위로 펼쳤다.

투둑, 툭.

“까아아아악- 께엑!”

오른손에서 떨어진 건 변종의 진액과 비슷한 어떠한 액이었다. 조금 더 묽고, 쉽게 흐른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었지만 식물의 즙과 비슷했다.

변종의 얼굴에 떨어진 액은 두꺼워진 피부에 닿자마자 마치 염산을 부은 것처럼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다. 변종은 높은 괴성을 지르면서 스스로 얼굴을 쥐어뜯었다. 바스라진 나무껍질 조각들이 우수수 흩어졌다.

공격성이 약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눈가에 닿은 액은 흰 자만 겨우 보일 정도로 닫힌 눈동자로 흘러 들어갔고, 변종은 비틀거리면서 불 없이 타들어 갔다. 연기는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낙조는 쥐고 있던 왼손을 놓고서 떼로 달려드는 변종들에게 액을 흩뿌렸다. 씨를 뿌리듯이 오른손을 허공에 펼치자 묽은 액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까아아악!”

“헥, 에엑, 끄으으으!”

나무껍질에 닿은 액은 곧장 연기를 내면서 속까지 긁어내듯 빠르게 변종의 피부를 갉아 먹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대여섯 정도의 변종이 나가떨어졌다.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해.’

낙조는 심호흡을 한 뒤 자동차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가 변종들에게 액을 뿌렸다. 공격성을 아예 잃는 것인지, 아니면 잠깐이나마 무력 상태에 빠지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시간을 벌어주는 건 확실했다.

‘고통을 느끼게 해 주는 건가?’

다른 자동차 위로 뛰어오르며 낙조는 생각했다.

터널의 입구가 저 멀리 보였다. 괜한 상념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할 틈은 없었다.

“살려 줘요!”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오는 중년 여성이 소리쳤다. 그녀의 뒤엔 반쯤 나무껍질로 뒤덮인 변종이 쫓아오고 있었다.

낙조는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로 이끈 다음 오른손을 털었다.

완전히 낙조가 뿌린 액에 뒤덮인 변종은 악마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마치 불에 타는 사람과 같이 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아스팔트에 몸을 긁으며 나무껍질을 벗겨내던 변종은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안 닿으셨죠?”

급히 여성을 돌아보고 묻자마자, 낙조는 속으로 탄식했다.

여성의 입가에 덕지덕지 묻은 노란 진액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진, 물진 않았어요. 남편은 물렸는데…….”

“일단 물이나 옷으로 다 닦으시고, 아무 차에나 들어가서 숨어 계세요. 다 지나갈 때까지.”

낙조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당장 변하지도 않은 사람을 변종과 마찬가지로 처리할 수도 없었고, 그녀에게 ‘저들처럼 된다’고 얘기할 자신도 없었다.

여자는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한 동정심을 갖지 않기 위해 고개를 바로 돌린 낙조는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변종의 수는 점점 줄고 있었다. 지운이 처음 만났을 때 해 주었던 얘기가 조각조각 떠올랐다.

「괴물 새끼들, 걔네 뭉쳐 다녀! 지들끼리 알아본다니까?!」

시작점이 된 변종과 그 무리의 끝이 여기라면, 터널부터는 어쩌면 안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염성 바이러스에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오류가 생겨나고, 그 오류 때문에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던 피해를 입는다.

그 무리에서 이탈한 변종이 하나도 없을 수 있을까?

만일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변종 한두 개쯤은 무리에서 이탈했거나, 다른 방향으로 갔거나, 변화 시점이 늦어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을 물어뜯고 있을지도 모른다.

“좀, 꺼져라, 좀!”

낙조는 뺨을 내리치듯 허공에 액을 뿌리면서 차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낙조가 지나간 자리에선 연기가 계속 피어올랐고 아스팔트에 몸을 비벼대며 제 피부를 스스로 짓뭉개는 변종만이 남았다.

터널의 타원형 입구가 조금 더 커다랗게 보였다. 남은 변종은 열도 되지 않았다.

“……아, 좆됐네.”

터널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자마자 안심을 하고 말았다. 진득하고 끈적거렸던 손바닥이 순식간에 메마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낙조는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녹색 줄기로 돌아온 이파리는 단단한 형체를 갖추었다.

열 개 정도는 알아서 당해낼 수 있어야지.

낙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낙조의 오른손에 머리가 짓이겨지고, 터지고, 뭉개지는 변종의 수가 다섯이 넘어갔다.

“헉, 허억, 헉…….”

다만 체력이 문제였다. 어느 정도 힘을 갖추면서 평균 이상의 체력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체력이 다 소진될 정도로 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변종을 치는 속도가 더뎌졌다. 여차하면 변종에게 붙잡힐 수도 있는 순간이 이어졌다.

“아저씨!”

“폼 존나 잡더니, 그 꼴 보여 주려고 그랬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낙조는 뿌연 시야에 잡히는 인영 두 개를 보고서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기어코 반대편에서 넘어온 건지 지운과 해화가 각각 손에 골프채와 야구 배트를 쥔 채 서 있었다.

마지막, 셋이었다. 낙조는 왼손으로 변종의 멱살을 쥐어 올린 후 바닥에 내리꽂았다. 키아악, 하고 변종이 뒤집어 까진 눈을 번득댔다.

‘진짜 죽어서는 천국 가세요.’

낙조는 짧게 기도를 올린 후 오른손을 변종의 안면에 꽂아 넣었다. 퍼억, 이파리가 완전히 얼굴을 짓뭉갠다 싶을 정도로 들어가더니, 이내 머리가 터졌다.

사방으로 튄 나무껍질과 그나마 남은 인간의 피부 조각, 그리고 진액이 도로 위를 장식했다.

고개를 들자 야구 배트와 골프채로 한 마리씩 맡아 머리를 두들겨 패는 홍씨 남매가 보였다.

“야, 허억, 그거 묻지, 않게, 헉, 조심해!”

가쁘게 찬 숨에 겨우 소리치자 해화가 거의 뭉개진 변종의 가슴을 발로 차며 낙조를 돌아보았다.

“으아, 씨발 새꺄!”

헬멧을 쓴 지운은 주춤거리다 마침내 변종의 두개골을 아작냈다. 진액을 줄줄 흘리는 변종의 몸을 배트로 툭툭 건드려보던 지운은 “아저씨, 봤어?!” 하고 두 팔을 길게 뻗어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건 어디서 났냐.”

“바닥에 깔린 게 이런 거야. 총기 소지가 안 되니까 다들 이런 거 하나씩은 갖고 다니나 보지.”

해화는 진액이 묻은 골프채를 변종의 옷에 슥슥 닦으며 말했다.

“서연우 씨는?”

가만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낙조가 조용히 물었다.

“…….”

“…….”

말없이 세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낙조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순간, 지운은 가장 먼저 담을 넘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누나! 괜찮아요?!”

호들갑을 떠는 지운의 목소리에 해화가 낙조를 한번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렇다 할 변화가 없는 시선이었다.

만약 해화처럼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 힘도 지금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낙조는 담을 넘어가는 해화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천천히 인간의 손으로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제, 터널을 넘어야 했다. 낙조는 텅 빈 것처럼 까맣고 긴 터널 속을 안경 너머로 잠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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