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38. 작전명 clean[完]
“이번 전쟁은 점령전이 아닙니다.”
베카 성에 모여든 남부 귀족들 앞에서 처음 카일이 한 말이다. 물론 남부 귀족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지형적으로 안티레논 산맥을 넘어서면 따로 국경으로 삼을 만한 곳은 중부 크롬강이었다. 하지만 2만8천의 병력으로 중부의 절반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 이번 진군의 목적은 뭔가? 그저 크로노스 왕가의 위험 때문인가?”
크로노스 왕가를 돕자고 아무 이득도 없는 전쟁을 해야 하냐는 물음이었다. 역시 남부 상인 가문 다운 질문이었다. 물론 카일도 이득 없이 병력을 진군시킬 생각 따위는 없었다.
“물론 크로노스 왕실의 위험 때문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이득도 없이 전쟁을 할 수는 없죠.”
“…생각하는 것이 있는가?”
처음 카일에게 질문을 던졌던 귀족이 눈을 빛냈다.
“바런트 왕국이 스스로 종전 협상에 나오게 하기 위한 전투입니다.”
“…스스로 나온다?”
“그렇죠. 가령 전쟁을 지속했을 때보다 더 큰 손실이 생긴다든가… 이런 것 말입니다.”
“호오! 그런 방법이 있겠는가?”
“간단합니다. 우리의 이번 진군의 목적은 초토화입니다.”
“초, 초토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군한 곳엔 사람도 가축도 곡식도 남아 있어선 안 됩니다.”
“지금… 모두 죽이란 말인가?”
깜짝 놀란 남부 귀족의 외침에 그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카일이 손을 저었다.
“무슨 끔찍한 말씀을! 죽이는 게 아니리 끌고 와야죠. 이번 전쟁으로 안티레논 평원의 평민 다수가 징집되어 끌려갔다던데, 이번 기회에 부족한 공국의 인구를 좀 늘려도 좋지 않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귀족들이 서로를 돌아봤다. 보기 좋게 포장하긴 했지만 카일은 지금 노골적인 약탈을 원하고 있었다. 물론 남부 귀족들이 가장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이어온 바런트 왕국의 남부 박해로 인해 지금 공국의 인구는 전성기 페네셀 왕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커험! 크로노스 왕국의 위험은 곧 공국의 위험이나 마찬가지! 서둘러 진군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서둘러 진군을 하시죠.”
“물론입니다. 다만… 문제가 좀 있는데….”
“문제라니요? 말씀하시지요. 해결책이야 머릴 맞대면 나오는 법이지요.”
“그럼요. 말씀하시지요.”
“다름이 아니라… 지원대와 지원대를 이끌 책임자가 좀 필요합니다.”
“지원대라니요?”
“초토화 작전을 하다 보면 엄청난 물자가 모일 텐데… 이것들을 전부 병사들이 다시 옮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카일의 말은 지금 약탈품을 공국으로 옮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약탈품에 정확한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옮기는 중 잃어버리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엄청난 이권이 달린 일이라는 말이었다. 결국 귀족회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주 능숙하세요.”
카일과 함께 회의에서 빠져나온 아네드 공주가 처음 한 말이었다.
“허엄… 능숙하다니요.”
“폭탄을 던져놓고 그냥 빠져 버리셨잖아요. 저들은 절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결국 결정권은 다시 남작님 손에 들어올 거예요.”
“그, 그렇게 보셨습니까?”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의 생각을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사실 회의석에 참석한 귀족들의 작위는 대부분 남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노귀족들, 카일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에 공국의 부마로 낙점되었다고 해도 통제가 쉽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권을 내세워 귀족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려 한 것인데, 그 점을 공주가 대번에 알아본 것이다.
“아버님께서 절 보내신 건 귀족들이 남작님을 작위와 명분으로 억압할까 걱정하셔서예요. 무력과 달리 정치적인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거든요. 헌데… 이권 하나로 노회한 귀족들을 단번에 휘어잡다니 대단하세요.”
공주의 칭찬에 카일이 머릴 긁적였다.
“대단하긴요. 공주께서 단번에 눈치채셨는데요.”
“때론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죠. 노회한 귀족들도 남작님의 뜻을 눈치채고 있지만, 누구 한 사람에게 밀어줄 수는 없을 거예요. 이젠 저들 모두 동지인 동시에 정계를 양분할 경쟁자니까요.”
공주의 분석에 카일이 눈을 빛냈다. 이제 보니 공국의 후계자는 어쩌면 첸들러 왕자보다 공주가 더 어울릴지 몰랐다. 물론 아네드 공주가 지금이라도 왕위에 오르겠다고 천명하면 첸들러는 좋다고 모든 걸 버리며 도망칠 인물이지만 아네드 공주는 왕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귀족들이 다시 남작님을 찾을 동안 함께 차라도 하시지 않겠어요? 남작님께 드리려 작은 다과를 준비해 봤는데….”
“흠….”
카일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성 들려오는 회의실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마침 출출하던 참인데 잘됐군요. 남쪽 성벽 위에서 바라본 평원이 아주 아름답죠. 그것으로 가실까요.”
“정말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주와 함께 동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렇게 공주와 동쪽 성벽 위에서 여유로운 기간을 보내며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지만, 귀족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이틀 만에 결정권을 카일에게 미뤘다.
“제법 오래 견뎠네요.”
공주의 속삭임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베카 협곡에 5천의 병력을 남기고 남은 병력 2만 3천을 열 개로 나눠 진군하겠습니다.”
“병력을 쪼갠단 말인가? 10개의 소 병력으로 나누면… 너무 적지 않나? 그러다 각개격파라도 당하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상시 정찰기가 공중을 정찰하며 적 규모를 파악하고 대응할 겁니다. 위급한 경우 인접 병력과 연합해 적병을 상대하고 다시 방향을 나눠 진군하는 방식입니다.”
“호! 괜찮은 방법이군!”
“공중 정찰만 확실히 해준다면….”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병력을 나눈다곤 하지만 병력 간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라며 진격할 겁니다. 만약 한 부대가 공격을 받는다면 좌우 측에서 진군 중인 병력이 빠르게 우회, 측면이나 후위를 노릴 수도 있죠.”
“일종의 그물을 넓게 치겠단 말이군! 한번 들으면 포위해서 섬멸한다.”
“잘 보셨습니다. 거기다 소규모 병력이라 넓은 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죠. 그리고 지원 병력에 대해선….”
카일의 말에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열 개의 부대로 나눠 각 부대의 후위를 쫓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리품은 이곳 베카계곡에 집결시킨 뒤 분배는 공과에 따라 처리하는 것으로 하지요.”
즉 전리품 운송에 대해선 귀족들에게 골고루 권한을 넘겨주겠다는 말이었다. 동시에 분배에 대한 권한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적당한 당근과 채찍이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다음 날 2만3천의 병력이 빠르게 베카 계곡을 넘어 무주공산으로 변한 중부로 진입하며 본격적인 초토화 직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지나간 곳은 나무하나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귀족이건 농민이건 노예건 남기지 않고 끌고 갔고, 마을은 남김없이 불태웠다. 점령한 성은 무너트려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만들거나 그게 어려우면 최소한 성문만은 파괴했다. 사실상 중부 일대를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바런트 왕국에 위협적인 건 남부 연합군의 속도가 너무 빨라 인근 영지들이 병력을 모아 방어선을 치기도 전에 번번이 돌파당하며 괴멸적 타격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국왕이 아서성 방어를 위해 남겨둔 와이번 나이트까지 동원했지만, 이전보다 배는 늘어난 와이번과 알바트로스 전투기에 괴멸적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에 반해 크로노스 왕국으로 침공해 들어간 이폴라 백작은 왕도에 도착도 하기전 기병장 캐스터의 5천 기병대에 뒤를 잡히면서 진격이 중단되고 말았다. 캐스터 기병대장은 수백 기의 와이번의 공격을 대비해 병력을 소규모로 쪼개 철저하게 보급부대를 공격하고 사라지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1왕자 카발리나의 서남부 군단과 왕도 인근 엣지 힐에서 조우했다.
* * *
“기분이 어때요?”
기분 좋은 미소 띤 공주가 카일에게 물었다.
“글쎄요. 담담합니다만?”
“담담해요? 그럴 리가? 아름다운 부인들이 셋, 아니 넷인가? 헷갈리네… 아무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요.”
공주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죄송하지만 아직 혼인식도 치르지 않았습니다만?”
“에이,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페레셀 공왕과 약속은 절대 어길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당신이 베아트리 영애를 포기할 것도 아니고 헬레나 영애는…!”
“아아! 그만, 그만하십시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니까!”
카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하! 놀리는 맛이 제법 쏠쏠하지만 그만하죠. 곧 작위식을 치를 테니 말이죠.”
“휴… 이게 뭐라고 좀, 긴장되네요.”
“편하게 생각해요. 국왕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국왕을 계속 국왕이라 칭하는 겁니까?”
“국왕을 국왕이라 칭하지, 뭐라 해요?”
공주가 짐짓 모른 척 되물었다.
“그야… 아버지, 아바마마… 등등 가족끼리 부르는 말 많잖아요.”
“그건… 휴!”
“곤란한 질문입니까?”
“곤란할 것까지야… 솔직히 국왕 전하는… 한나라의 국왕으로서는 훌륭한 분이세요. 존경도 하고요. 하지만 한 가정의 아버지로선 빵점이거든요. 자식으로 용서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래요. 아버지가 아닌 국왕!”
“흠… 그렇군요. 아버지가 아닌 국왕이라….”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전하께서 접견을 허락하셨습니다.”
“됐네요. 그럼 들어가죠.”
공주가 웃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아름다운 정원이 보이는 화려한 복도를 지나 내궁 깊숙이 들어서자 사방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최소 중급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가 사방에 숨어있었다.
“침전에 드시기 전 무기를 맡겨주셔야 합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일이 직접 허리에 찬 검 두 자루와 단검을 맡겼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무심히 카일을 올려본 시종장이 묵직한 목소리로 내부에 알렸다.
“전하! 에이린 공주님과 네오트, 필 테일 남작 당도했습니다.”
“들이게!”
탁하게 가라앉은 국왕의 음성과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에이린 공주가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카일이 쫓았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에이린 공주가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넌 여전히 날 국왕이라 부르는구나!”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안타까운 눈으로 공주를 보았다.
“그때 일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냐? 내 분명….”
“아니옵니다. 분명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죠. 제가 용서하면, 어마마마께서 더 슬프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런 건가…!”
허탈하게 웃던 국왕이 고개를 돌렸다.
“신! 카일 데 네오트, 필 테일 남작입니다.”
“오오! 자네가 바로 당대의 네오트 남작이군!”
“그렇습니다.”
“네오트 남작가는 오랜 시간 왕실에 충성한 가문이었지. 여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아주 명문이었어. 갑자기 사라져 내심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또 왕실과 왕국을 구했으니 마땅히 칭찬할 만 하구나!”
“그렇습니다. 하여 그에 합당한 상을 내려주십시오.”
“필 테일 영지를 위시한 두 영지와 백작위라… 귀족원장! 어떤 것 같나?”
국왕의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노인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두 영지가 비어있고 남작의 공이 지대하니, 공주의 제안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흠…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소.”
국왕이 목이 마른지 탁자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카일 경의 공적을 인정하면, 동시에 공주의 공적도 인정해야 하오.”
“당연합니다.”
“그럼 국왕의 이름으로 발표한 후계선정에 문제가 생기오.”
“어떤 문제 말입니까?”
“공주의 지원을 받은 네오트 남작이 바런트 왕국 남부 반란을 성공시키고 왕국에 공국을 안겼고 더불어 이번 협상까지 이끌었으니… 공주의 공적이 제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공주를 후계로 삼아야 한단 말이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귀족원장이 보기엔 어떻소, 공주가 왕이 되어 국정을 운영할 자질이 있겠소?”
“글쎄요. 강단은 있으나… 솔직히 배경과 힘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귀족들의 입김에 끌려다닐 가능성이 높죠.”
“역시 같은 생각이구려!”
국왕의 말이 고개를 끄덕이자 커튼 너머에서 기사 넷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혹시 이것도 생각하셨습니까?”
“전혀요. 보세요. 국왕으로서 존경할만한 분이잖아요.”
기사들이 공주와 카일을 둘러쌌지만, 두 사람은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잘해보세요. 전 비켜있을 테니… 당신에게 제 운명이 걸렸어요.”
“저만 제거되는 겁니까?”
“전 아마 어느 시골뜨기에게 시집보내려 할 거예요. 어쩌면 아스턴 왕국일수도 있고요.”
“호오! 그건 좀 마음에 드는군요.”
카일의 말에 피식 웃은 공주가 천천히 카일의 곁에서 멀어졌다. 기사들 역시 정말 카일 만 죽이려는지 공주에겐 순순히 길을 열었다.
“참 재밌는 상황인데… 전하! 이게 전하의 뜻입니까?”
카일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미안하네! 왕실과 왕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다음 대 국왕은 왕자가 되어야 하네! 그래야 혼란이 없어.”
“흠… 그렇군요. 그럼 혼란도 없고 저도 사는 방법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방법이 있나?”
“예! 아주 간단합니다. 왕자와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을 싹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럼 간단히 문제가 해결되죠. 왕실과 왕국의 안녕을 위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엄하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카일을 둘러싼 기사들 중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위협적으로 외쳤다.
“공주님?”
“응! 말해.”
“화가 좀 나려는데요?”
카일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국왕을 바라보았다.
“죽여도 됩니까?”
“국왕께 힘을 보여드리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야!”
“호오! 그렇다는군요. 국왕 전하!”
카일의 미소에 조금 전 카일을 향해 소리쳤던 기사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조심!”
“늦었다.”
웅-
청백색 물결치는 투명한 검신! 오러 블레이드가 멍하게 서 있는 네 기사의 목을 스치며 지났다.
푸확-
비명도 지르지 못한 상급 기사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 반쯤 목이 잘려 죽은 것이다.
“마… 마스터!”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 남들이 그렇게 부르네요.”
피식 웃음을 지은 카일이 심하게 흔들리는 국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제 국왕 전하의 말씀대로 왕실과 왕국을 위해 왕자와 그들의 세력을 죽일 수 있으세요.”
“그… 그건!”
“보라구요! 국왕은 처음부터 왕실과 왕국을 위해 눈을 감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냥 가족의 피가 자신의 손에 묻는 게 싫었을 뿐이죠. 뭐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휴… 그렇네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이 되기 위해 형제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전 나약하고 망설이는 왕이 되진 않을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작전을 시작하지요. 베츠!”
카일의 부름에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게이츠에게 전해! 작전명 Clean, 시작하라고.”
“알겠어요.”
베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반나절이면 끝날 겁니다.”
“피의 사슴, 당신 말이니 그렇겠죠.”
공주의 말에 가장 먼저 귀족원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소리소문없이 상대를 죽이고 사라지는 공포의 존재 피의 사슴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말하면 어쩝니까?”
“설마 비밀을 지킨다고 귀족원장을 죽이진 않겠죠.”
“저, 막 사람을 죽이고 그러진 않습니다.”
“이유가 있으면 죽인단 말이잖아요.”
공주가 웃으며 바닥에 죽어 쓰러진 기사의 검을 들었다.
“서임식은 마저 해야겠죠, 귀족원장님?”
“그건….”
공포에 질린 귀족원장이 힐끔 국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국왕도 카일이 말한 클린 작전이 어떤 것인지 이미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국왕은 여전히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귀족원장님?”
“아! 네! 시작하셔도… 됩니다.”
스르릉-
공주가 검을 뽑아 무릎을 꿇은 카일의 어깨에 가볍게 검을 내렸다.
“그대 카일 데 필 테일, 네오트 남작에게 아스트란 성과 함께 백작위를 내린다.”
“끝입니까?”
너무도 간단한 서임식에 어이가 없어진 카일이 되물었다.
“그럼 뭐 별것 있겠어요, 아스트 백작님?”
공주가 피식 웃으며 귀족원장을 바라보았다.
“아시죠. 이건 국왕께서 내린 작위예요. 전 그냥 몸이 불편한 전하를 대신한 것뿐이에요.”
“물… 물론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하!”
“신! 아스트 백작도 물러가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공주와 함께 돌아서 밖으로 향했다.
“헉!”
밖으로 나온 카일의 모습에 시종장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죽은 유령을 본 것 같군!”
카일이 피식 웃으며 무기를 다시 허리에 찼다.
“왕도를 떠날 건가요?”
“그래야겠지요?”
“그러지 말고 왕도에 남는 건 어때? 정계에서 날 도와주면 좋을 텐데?”
“아이쿠! 싫습니다. 다신 왕도에 오고 싶지도 않아요.”
카일이 손을 마구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왕국을 돌며 여행을 할 생각이다.”
“여행?”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제저녁 아네드 공주가 은밀히 장원에 도착했거든, 그래서 이번에 다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 아! 신혼여행이구나! 와, 대단해. 여인들 전부 불러서 한꺼번에 신혼여행이라니!”
공주가 정말 놀랍다는 듯 말하자 카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냥 여행입니다. 여행!”
“흠… 그래서 첫 여행지는 어딘데?”
“타바트 백작께서 학센 지방에 꼭 방문을 요청하셨거든요. 지난번 위스키를 즐기시는 것 같아 한 단지 가져다드릴 생각입니다. 일단 그곳에 갔다가 다음 여행지를 찾아볼까 생각 중이고요. 지난번 방문하셨을 때 꼭 소개할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소개라면? 후계… 풋!”
이야기를 듣던 공주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더니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아니… 아니에요! 아무튼 아스트 백작님도 편하게 사실 팔자는 아닌 것 같네요.”
공주가 웃으며 손을 가리며 또다시 한참을 웃기 시작했다.
“자! 우린 여기서 이만 헤어지죠. 난 다른 일이 있어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호호! 다음에 또 보면 되죠. 다신 안 볼 것처럼 말하네요.”
“하하! 물론 언젠간 다시 보겠지만… 당분간은 아니죠. 그럼….”
혹시나 공주가 다시 붙잡진 않을까? 카일이 서둘러 왕궁을 벗어났다.
“여기예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헬레나 영애가 마구 손을 흔들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뒤이어 베아트리 영애와 아네드 공주도 함께 밖으로 나와 카일을 반갑게 맞았다.
“자, 그만 출발하시죠.”
카일이 환하게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곤 서북부 총사령관 타바트 백작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