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403화 (403/404)

외전 - 137. 베카 계곡전투

할레트 후작은 5만의 서남 방면군 중 2만의 병력을 잔류시키곤 곧장 남부로 남하해 보름만에 베카 협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흠… 준비가 상당하군!”

협곡 중간엔 목책으로 이중 삼중 방어막이 설치되었다. 목책과 협곡 위로 적지 않은 병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협곡 양쪽엔 언제 만들었는지 커다란 투석기까지 설치되어있어 협곡 안으로의 진입을 자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이거… 쉽지 않겠어!”

할레트 후작의 말에 묵묵히 성황을 주시하던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크로노스 왕국 동부와 그리미엄 자작가를 휩쓸었던 무어 자작이었다.

“베카 계곡은 육상병력만으로 뚫을 수 없는 곳이죠. 압도적인 공중 전력으로 요새를 파괴한 뒤 육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공격해 적병을 쓸어 버려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쉽지 않을 거야! 네드 자작 정도면 우리가 보유한 와이번 전력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하! 이거 참, 그 친구가 죽었다고 왕실에 보고한 사람이 저였는데… 이렇게 살아서 뒤통수를 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군.”

“이번 일은 왕실이 좀 무리하긴 했지, 아무리 반란 위험 때문이라지만, 영주에 대한 권한 침해는 심각한 문제야! 이번 일은 다른 지역 귀족들도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어. 혹 전례가 될 수 있어 걱정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는군”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반란을 용납할 수는 있는 건 아니죠.”

“그렇긴 하지!”

무어 자작의 말에 할레트 후작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 인사라도 하고 오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것도 좋겠군!”

할레트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어 자작이 와이번을 이끌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못해도 100여 기는 충분히 넘을 정도의 대규모 와이번 부대였다. 이것 역시 아서 성 방어를 위해 절반 이상의 와이번 부대를 남겼음에도 무려 100기 이상의 와이번이 이번 베카으로 온 것이다.

“손님이 오셨군요.“

성벽 위에 앉아 차를 마시던 카일의 말에 테링 자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도 이번 베카 협곡전투를 위해 나름 최선의 패를 보낸 것이다.

“인사를 온다면 맞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테링 자작이 먼저 자신의 레드 와이번을 불러냈다. 뒤이어 카일과 보일을 위시한 기사들과 남부 귀족 소속 와이번들이 하나둘 하늘로 날아 오르더니 대략 60기의 와이번들이 베카 협곡 상공으로 모여들었다. 무어 자작이 이끄는 와이번 부대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였다.

“제법 많이도 모았군!”

60기의 와이번을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니다. 고작 50기가 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무어 자작으로서는 생각보다 많은 와이번의 숫자에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런트 왕국 와이번의 숫자는 무려 100여 기.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럼 실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볼까?”

무어 자작이 웃으며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강화 스피어 한 자루를 들었다. 목표는 적 와이번 중앙, 레드 와이번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서 있는 덩치 큰 사내였다.

“어디 이걸 맞고도 여유롭게 서 있는지 두고 보지!”

무어 자작이 머리 위로 강화 스피어를 높이 들어 올렸다.

부아앙-

그때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 위에서 낯선 비행체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바로 12기통 직렬엔진에 중급 마나석을 클러스터 한 150마력 엔진의 전투기 알바트로스다. 조종사 한 명과 소총수 한 명이 탑승한 형태로 대규모 적 와이번을 대비해 다급히 만든 급조 전투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체 자체를 금속이 아닌 얇은 나무판을 이어 붙여 단순하면서도 유선형으로 작고 가볍게 만든 전투기다. 알바트로스는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골드 와이번과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지만 기동성에선 덩치 큰 와이번에 비해 월등히 앞섰다.

탕-

탕-

공중이지만 가만히 서 있는 목표물을 맞히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떨어지는 병사를 소위 전투기라 명명한 비행기에 탑승시키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행체의 갑작스러운 원거리 공격에 와이번 나이트 십여 명이 공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지상으로 우수수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무어 자작을 위시한 와이번 나이트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금이다!”

카일의 외침과 함께 서너 마리의 와이번들이 하나의 편대를 이루며 흩어진 와이번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저건 또 뭐야!“

탕-

탕-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두 대의 비행체는 수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마법 무구를 쏘아대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강화 스피어를 날려 단번에 격추시키고 싶지만 빠른 속도와 독특한 기동에 번번이 놓치고 있었다.

깡-

검을 비껴내 탄환을 튕겨 낸 무어 자작이 주변을 돌아봤다.

“이거 완전 개판이군!”

숫자는 앞서 있지만, 적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진형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두세 기씩 뭉쳐서 공격하는 적 와이번과 특이한 비행체에 피해가 가중되고 있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건 무어 자작 본인도 듣도 보도 못한 비행체에게 속절없이 묶여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보자!”

무어 자작이 한 손엔 검을, 한 손엔 사슬을 뽑아 들곤 정면을 막아선 비행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방어를 도외시한 채 몸통 박치기를 하려는 모양새였다.

“물러나!”

무식하게 그대로 부딪혔다간 나무로 만든 비행기는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카일은 레토아를 몰아 블랙 와이번과 그대로 충돌했다.

꽝-

갑작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레드 와이번의 공격에 놀란 무어 자작이 휘청이며 급히 안장을 부여잡았다. 그사이 카일은 그대로 무어 자작을 향해 훌쩍 뛰어들었다.

“이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무어 자작이 사슬낫을 거칠게 휘두르며 카일을 공격했다.

스각-

사악-

양손 위로 삐죽 튀어 오른 청백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사슬을 거침없이 조각내며 무어 자작을 향해 밀고 들어갔다.

“헉!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접근전은 미친 짓이다. 대경한 무어 자작이 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카일은 쉽게 무어 자작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카일은 절반 이상 잘려 나간 무어 자작의 사슬을 움켜쥐며 역으로 당겼다.

“이런!”

거대한 힘에 속절 없이 딸려가자 당황한 자작이 급한 나머지 사슬을 끊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까강-

하지만 사슬은 미스릴을 섞은 최상의 합금이다. 아무리 자작이라도 단번에 잘라낼 물건이 아니었다.

“이건 그리미엄 가문의 복수다.”

“잠깐!”

청백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속절없이 딸려오는 무어 자작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커억-”

붉은 피를 토해낸 무어 자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간 카일의 손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툭 떨궜다. 자작의 시체를 틀어쥔 카일이 괴로워하는 블랙 와이번에서 훌쩍 뛰어내려 레토아의 등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무어 자작이 죽었다.”

상대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가 뭐래도 적 수장의 수급을 보이는 것이다.

카일의 외침이 베카계곡을 쩌렁 울리자 계곡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겼다!”

“와! 와이번 나이트가 도망간다.”

“용병 라이더 만세!”

와이번 라이더, 또는 용병 라이더는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용병들을 부르는 말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알바트로스 조종사들 모두 레드 와이번 용병대에 소속된 용병들이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용병 라이더란 칭호를 받은 것이다.

계곡을 울리는 함성을 들르며 헬레트 후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 전투는 해보나 마나 실패다. 이미 제공권이 완전히 날아간 이상 전투를 지속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다고 국왕의 명을 받고 온 총사령관으로서 이대로 전투 한번 하지 않고 전장에서 물러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후작의 전적에도 좋지 않았다. 전투에서 패한다고 해도 그냥 물러날 수는 없는 법! 어차피 패전의 책임은 자신의 명을 듣지 않고 섣부르게 와이번을 이끌고 전투에 나선 무어 자작에 있으니 적당히 싸우다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헬레트 후작은 곧장 전군을 몰라 베카 계곡을 공격하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생각보다 강력한 공격에 전위를 상실하고 전격적인 후퇴를 선택했다.

바런트 왕국과 크로노스 왕국 간 전투에서의 첫 승리이자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대승이었다.

* * *

웃기게도 바런트 왕국군이 크로노스 왕국 국경을 넘지 않을 거란 공주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전쟁 중 2왕자 패트릭이 적 와이번 나이트가 떨어트린 마나 폭탄에 폭사 당하며 동북부 국경지대가 뚫려 버린 것이다.

“멍청한!”

다 이긴 전쟁이었다. 그저 국경만 사수하면 자연스럽게 이길 수 있는 전투를 2왕자 패트릭의 죽음과 패전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이다. 사실 2왕자의 군단이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지금까지 버틴 건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병력을 빠르게 보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패트릭 왕자가 죽자 포슈 상단의 슈미츠 남작이 가장 먼저 전쟁에서 손을 떼버렸고, 뒤이어 전선을 유지하던 용병대가 대금 미지급을 이유로 전쟁에서 물러나면서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져 버린 것이다.

“큰일입니다. 적 사령관인 이폴라 백작은 뛰어난 자입니다. 이런 호기를 놓칠 사람이 아닙니다.”

“적 대군을 막을 방법이 없나요?”

“일단 동부와 북부에서 긴급하게 지원군을 모으고 있지만… 정규병도 아닐 뿐 아니라 와이번 전력은 완전히 밀리고 있어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결국 1왕자, 카발리나 왕자를 다시 불러들여야 한단 말이군요.”

“그렇긴 한데, 쉽게 추격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왕도가 점령당하면 정말 끝이니까요.”

“일단 국왕 전하를 뵙고, 1왕자의 회군을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럼… 페르셀 공국은 어쩝니까?”

“일단 함께 말씀드려야겠죠. 듣기론 페네셀 공국으로 타바트 백작의 정병 1만과 남작의 병력 3천이 전부 옮겨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럼 남작에게 북부 진군을 명해 주세요.”

“바런트 왕국을 침공하자는 말입니까?”

“어차피 페네셀 공국이 본국의 속국이에요. 본국이 위험하면 속국 역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죠.”

“흠… 그렇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그럼 이제, 누가 오래 버티는지가 관건이겠군요.”

공주의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국왕의 처소로 곧장 향했다.

* * *

1왕자 카발리나 왕자는 2왕자의 죽음과 함께 전해진 회군을 명하는 국왕의 명령장에 입술을 깨물었다. 2왕자의 죽음으로 사실상 왕위를 확정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왕도가 점령당하고 국왕이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왕위를 물려 받는 건 고사하고 왕국의 존립마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멍청한 녀석! 그렇게 죽어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국왕의 명령장을 던져버린 카발리나 왕자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왕자님! 서둘러 이폴라 백작의 군대를 쫓아야 합니다.”

“쯧! 캐스타!”

“예! 기병장 캐스타입니다.”

“자네가 수고 좀 해주게!”

“수고라니 무슨 말씀을! 적이 왕도에 도착하기 전 반드시 따라잡을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휴… 바로 출발해주게!”

왕자의 명에 캐스타 자작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 캐스타 기병대장이 이끄는 5천의 기병대가 군영을 벗어나 북쪽으로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카일은 베카계곡과 좀 떨어진 갈라코 성에서 공주인 아네드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혼인 전 두 사람의 어색한 관계를 풀어주고 소드 마스터로 알려진 카일과 공주의 혼인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한 공왕의 노림수가 담긴 한 수였다.

처음엔 공왕의 이런 행동에 좀 당황하고 어색하긴 했지만 아네드 공주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주가 다른 귀족 영애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공왕을 도와 상단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 귀족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해 생각도 넓었고 포용심도 강했으며 친화력도 상당했다. 덕분에 의외로 말도 잘 통하다 보니 함께 있는 시간이 제법 즐거웠다.

“그럼 일이 있었습니까?”

“네! 폭풍은 몰아치고 마스트까지 부러졌거든요. 그땐 정말 아버지도 뵙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세상에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동생을 상자에 넣어 상선에 태우다니… 큰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그 일로 아버지께서도 크게 화가 나셔서 오라버니를 성탑 꼭대기에 가두고 한 달 동안 빵과 물만 주셨다니까요.”

아네드 공주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

그때 응접실 밖에서 매튜가 들어왔다.

“왕성에서 급한 전언이 왔습니다.”

“급한 전언?”

카일이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종전만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안락한 시간을 보내는 카일에게 왕성의 다급한 서신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인 모양입니다.”

“아니에요.”

공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를 한 카일이 응접실에서 물러나 매튜가 건넨 서신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헛! 어이가 없군,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종전이 아닌 확전이군.”

“주군! 확전이라니….”

“아무래도 전쟁이 쉽게 끝나진 못할 것 같군! 공왕 전하를 뵙고 와야겠다.”

카일이 서신을 매튜에게 넘겼다.

“…진군입니까?”

“그래! 결국 남부 귀족들 뜻대로 됐군!”

얼굴을 찌푸린 카일이 곧장 아네드 공주와 함께 공왕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북부 진군을 승낙받았다.

카일이 지휘하는 총 1만 3천의 병력과 페르셀 공국의 병력 1만 5천이 동원된 남부 연합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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