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400화 (400/404)

외전 - 134. 유익한 협상

“왜? 실망인가?”

“아, 아닙니다.”

“너무 실망할 것 없네. 어쨌든 이곳까지 백작을 이끈 사람은 공주니 말이야! 아마도 남작과의 일이 잘 해결되면 공주와의 관계도 원만해지겠지!”

투린 자작이 웃으며 천천히 말을 몰아 백작과 카일의 뒤를 쫓았다.

평원을 걸으며 카일과 타바트 백작이 나눈 대화 대부분은 백작이 아스턴 왕국과의 전투 당시 사용했던 전략과 전술을 들려주고 카일이 그에 따른 자신의 전략을 풀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허허! 재밌군. 대규모 회전을 피하는 대신 소규모 정예 특수단을 보내 적 후방 핵심 거점을 점령한다?”

“그렇죠. 위험이 따르지만, 성공만 한다면 최소 비용과 희생으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야! 적의 보급을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립된 아군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을 버텨야 하는데, 쉽지 않아!”

“그렇죠. 충분한 보급과 더불어 강력한 공격력, 확실한 제공권까지 확보해야 하죠.”

카일이 웃으며 타바트 백작과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멀지않은 곳에서 뿌연 먼지가 일며 윌리스와 호위 기사들이 다가왔다.

“남작님!”

“아! 어서 오게. 갑자기 동풍 불어 많이 밀렸다네. 낙하산을 쫓아 오느라 힘들진 않았나?”

“아닙니다. 중간에 헬켄과 부대원들을 만났는데, 모두 마차를 타고 안전하게 복귀했습니다.”

“잘됐군! 아!, 그리고 여긴 타바트 백작님이시네. 장원으로 오시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네!”

카일의 말에 윌리스와 기사들이 급히 말에서 내려 정중히 예를 취했다.

“전쟁영웅이신 타바트 백작님을 만나 영광입니다.”

“하하! 반갑네, 훌륭한 기사들을 두었군!”

“감사합니다.”

카일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히이잉-

그때였다. 기사들 사이를 헤치며 커다란 말 한 마리가 다가와 카일의 몸에 얼굴을 비볐다.

“리플!”

카일이 크게 웃으며 말머리를 쓰다듬었다. 질 높은 건초와 사료를 먹고 넓은 평원을 자유롭게 뛰어다녀서인지, 리플은 처음 카일과 만났을 때의 왜소하고 초라했던 모습과는 달리 온몸에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명마로 변해 있었다.

“대단한… 명마군!”

타바트 백작이 리플을 향해 다가가자 백작의 말이 거친 울음소리를 토하며 고삐를 잡은 호위 기사를 거칠게 밀어내더니 백작의 앞을 막아서고 말굽을 굴려 리플을 위협했다.

“칸터?”

백작이 깜짝 놀라 급히 고삐를 붙잡아야 할 정도였지만, 리플을 힐끔 백작의 말을 볼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여전히 카일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이거… 미안하군,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겨우 칸터를 진정시킨 백작은 내심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칸터는 아스턴 산 명마로 서북방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은 명마다. 그런 명마가 노골적으로 리플을 경계한다는 건 리플이 칸터가 경계를 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명마란 뜻이었다.

“리플이 갑자기 나타나 놀랐나 봅니다. 사과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사과의 의미로 제가 좋은 술을 대접하겠습니다.”

“술?”

“예, 제가 직접 수수를 발효해 만든 위스키입니다. 아마도 다른 곳에선 맛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런가? 이거 상당히 기대되는군.”

“하하!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카일이 웃으며 말 위에 올라 앞서가자 백작도 서둘러 말 위에 올라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장원까지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조금 속도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기병을 이끌며 평원을 누린 나라네! 기마술이라면 자네보단 위일 거야!”

“하하! 이거 실례를 했군요.”

카일이 속도를 높이는 타바트 백작의 뒤를 바짝 쫓아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던 백작의 기마는 곧 멈출 수밖에는 없었다.

“이건…!”

구릉 위로 올라선 백작의 눈에 광활하다고 표현하기도 부족할 정도의 넓은 밀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모두 자네의 밀밭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무슨 말인가?”

“농사를 지은 건 유민들과 빈민들입니다. 그들이 노력해 얻었으니 모두 빼앗을 수는 없고, 절반 정도만 걷을 생각입니다.”

“지금 소작료를 5할밖에 안 걷겠다는 건가?”

보통 영주나 장원에서 토지를 비롯한 농기구나 가축을 임대하고 받는 소작료는 대부분 7~8할에 달했다. 인자한 영주를 만날 경우에도 6할 아래로 떨어지진 않는다. 그런데 카일은 소작료를 고작 5할만 받는다고 하니 타바트 백작으로서는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저야 도자기로도 큰 수입을 얻고 있으니… 곡물에까지 큰 미련은 없습니다.”

“곡물은 식량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네, 자네라면 그 이치를 모르진 않을 텐데?”

식량이 곧 권력이다. 농사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대륙에선 대평원의 소유자가 한 지역의 곡물 가격을 좌우하며, 흉년이 들면 한 나라의 곡물 가격을 좌우한다. 특히 그리미엄 자작령이 불타고 전면전을 눈앞에 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곡물은 곧 권력이었다. 타바트 백작이 서북부 학센 지역에서 전혀 반대쪽이라 할 수 있는 동부 영지까지 찾아온 것도 바로 이 곡물,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평원에서 생산한 곡물 대부분은 시세보다 조금 낮은 가격에 전량을 제가 매입할 겁니다. 어차피 곡물을 보관할 마땅한 창고가 없으니 소작인들도 큰 거부감은 없습니다.”

거부감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수로에서부터 농토와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카일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더구나 타 영지에선 물세에서부터 다리세, 사망세, 인두세 등 각종 세금까지 부과하는 것에 반해 피라네시아 장원은 5할의 소작세 외 어떤 세금도 걷지 않으니 그들이 카일의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단하군!”

“대단할 것 까지야 없습니다. 보기엔 다른 영주들에 비해 적은 세금을 걷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모두 열심히 농사를 짓습니다. 덕분에 생산량도 늘었고, 5할이라지만 걷어 들인 양은 타 영지에서 걷는 소작료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허허! 놀라운 발상이군. 소작인이 자발적으로 노력하게 만들어 생산력을 높인다… 하긴 병사들도 그렇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생기면 병사들도 더 열심히 싸우는 법이야!”

타바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삼스럽게 카일을 돌아보았다. 백작뿐 아니라 많은 귀족이 이같은 이치를 잘 알고는 있었지만, 지식으로 아는 것과 달리 그걸 행동으로 실천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백작과 카일이 황금빛이 출렁이는 평원을 지나 정원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오랫동안 깊은 대화를 나눴다.

“이제야 도착했군요.”

이미 오래전 장원에 도착해 있었던 공주가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님! 오랜만에 뵙네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미소 짓는 카일의 모습에 공주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다행히 타바트 백작이나 필 테일 남작 모두 얼굴이 상당히 밝아 보였다.

“네! 오랜만이군요, 남작님.”

“일단… 백작님과 대화는 아주 즐거웠습니다. 백작님께서 원하는 바도 정확히 알았고, 그에 대한 협상도 마쳤습니다.”

“벌써 협상을 마쳤단 말인가요.”

“어차피 백작님께서 원하는 건 제가 가지고 있으니 오래 끌 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혹 기분이 나쁘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공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공주의 입장에선 가장 어려울 수 있는 백작과의 협상이 너무 쉽게 풀린 것이다.

“공주께서 다행히 제 기대를 충족시켜 주셨으니 협상을 다시 시작해 보시죠.”

“정말!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정말!”

“별말씀을 일단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협상은…!”

카일의 말에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당장 해요. 협상을 앞두고 음식을 먹었다간 긴장해서 체할 것 같으니….”

공주의 말에 난감한 표정으로 백작을 돌아봤다.

“난 걱정 말게! 좀 기다리는 거야 어렵겠나? 대신… 약속은 지켜 줬으면 좋겠군.”

“약속이라면… 아, 위스키! 알겠습니다. 곧바로 가져다드리라 지시하지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협상을 빨리 끝내고 찾아뵙겠습니다.”

“하하! 나 때문에 중요한 협상 빨리 끝내서야… 천천히 신중히 결정하게!”

솔직히 협상이랄 것도 없다. 공주가 제시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미래에 얻게 될 화려한 보상 정도였다. 지금 당장 카일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었다.

“백작위와 영지라….”

“필 테일 영지와 붙은 두 개의 영지를 합해 백작령으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피라네시아 평원은 실질적으로 남작님의 영지라 생각할 수 있으니, 대영지에 버금가는 광활한 영지를 갖게 되는 거예요.”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정말이세요.”

너무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이자 공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니… 아니에요.”

“단! 몇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요?”

공주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말씀… 하시죠.”

공주의 말에 카일이 갑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네오트 남작가의 인장 반지입니다.”

“네오트라면… 아!”

“이걸 정식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공주가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당신 네오트가의 후계자였나요.”

“글쎄요.”

카일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인장 반지가 있는 이상 어려운 건 없어요. 보통 때라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제 권한으로 일정을 앞당겨 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북부 아이스 랜드 인접 지역에 영지를 가지고 싶습니다.”

“북부 영지요?”

“네! 크기는 필요 없습니다. 마을 수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카일의 말에 공주를 대신해 테링 자작이 나섰다.

“마을 수준이라면…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

“예?”

“아! 자작님의 영지가 북부였죠.”

“그렇습니다.”

테링 자작이 카일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마침 영지 북부에 비어있는 고성이 하나 있네! 사실 버려지다시피 한곳이라… 괜찮겠나?”

“상관없습니다.”

“흠… 알겠네! 영지대리인에게 연락을 넣어놓겠네!”

“감사합니다.”

“아니야! 고작 작은 고성 하나에 자넬 얻었으니 훨씬 남는 장사지!”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카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카일이 내민 조건은 공주에겐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카일에겐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피라네시아 평원과 장원에 대한 사용권은 어쨌든 카일이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이야 피라네시아 평원이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황무지여서 크로먼 백작가도 큰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새로운 수원이 발견되고 유민과 빈민들이 끝없이 몰려들면서 다시 동부 최대의 곡창지대로 변화하자 백작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요즘 재정관인 캐프 남작까지 여기에 동조해 평원에 정착한 빈민과 유민들에 대한 세금 문제를 넘어 피라네시아 평원에 대한 소유권 자체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카일로서는 서둘러 이 문제를 마무리하고 이번 기회에 백작과의 관계를 깔끔이 매듭짓길 원하고 있었다. 작위를 인정받는 것과 평원 자체를 영지로 인정받는 건 다른 문제다. 귀족원의 승인도 필요하지만, 백작 이상이 참여한 고위 귀족회의에서의 동의도 필수다. 여기엔 공주도 카일도 직접 참여할 수 없지만 크로먼 백작은 고위 귀족으로서 직접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으니 카일에겐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주가 타바트 백작을 끌어들인 덕분에 일이 쉽게 해결된 것이다. 더구나 타바트 백작의 서 북부군이 통제 중인 아이스 랜드와 인접한 고성까지 얻었으니, 이제 죽은 베지톤 백작에게서 얻은 마나석 광산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공주와 테링 자작은 몰랐지만, 이번 협상으로 카일은 현재의 이익뿐 아니라 미래의 이익까지 정말 많은 것을 얻은 협상이었다.

“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그럼 이만 만찬장으로 가실까요.”

“좋아요.”

공주도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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