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98화 (398/404)

외전 - 132. 증명

Bloody deer 피의 사슴.

단 십일만에 귀족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암살자를 칭하는 말이다. 원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마법 무구로 상대를 죽이고 사라지는 사슴 가면을 쓴 암살자!

놀랍도록 정확한 저격 능력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최고의 암살 무구였다.

왕도의 귀족들이 공작의 죽음과 피의 암살자로 들끓고 있었다면 공주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슴 가면의 원주인이 공주란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면, 바런트 왕국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왕실과 귀족 사이 전면전으로 비화 될 수 있는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휴….”

긴 한숨을 내뱉은 에이린 공주가 부드러운 양털이 깔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며칠간 동분서주 뛰어다닌 덕분에 공주가 사슴 가면이었던 흔적을 모두 지운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공주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사슴 가면의 흔적이 생각보다 쉽게 지워진 건 카일이 이미 왕도 4대 정보조직을 직접 방문해 사슴 가면에 대한 정보 대부분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렇게 얻은 정보를 조금씩 왕자들에게 흘려 사슴 가면의 정체를 밝히려 했던 것이 오히려 공주가 쉽게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공주님! 명 하신 서류입니다.”

공주의 비서 겸 호위무사인 코일이 둘둘 말린 양피지 여러 장을 공주의 서탁에 내려놓았다.

“휴… 쉴 시간이 없어!”

따뜻한 양털 속에 파묻혀 있던 공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서류는 조금 더 쉬었다가 보시는 게….”

“그럴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양털의 질감을 느끼며 망설이던 공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야! 녀석이 능력을 보여달라고 했으니, 보여줘야지!”

공주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양피지를 자세히 살폈다.

“공작을 지지한 귀족 중 영지나 상단, 천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한 귀족만 따로 추렸습니다.”

“숫자가 상당한데?”

“앞장은 대부분 하위 귀족 명단입니다. 가장 중요한 고위 귀족은 뒷장에 있습니다.”

코일의 말에 앞장은 대충 넘기고 뒷장을 살피던 공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휴… 대부분 지역 기반이 탄탄한 정통귀족들이네….”

고리타분한 정통귀족들은 근본적으로 여인이 왕위에 오르는 걸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에게 명확한 이익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공주가 당장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성급하게 접근했다간 공주가 왕위를 탐하고 있다며 당장 왕자들에게 달려가 나불거릴게분명해! 그리곤 나와 왕자들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 하겠지.’

“휴~!”

서류를 넘기던 공주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단 한 명!

지금 당장 다수의 귀족을 포섭하는 건 불가능했고, 필 테일 남작 역시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최소한의 병력지원과 승전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평가를 고위 귀족회의에서 주장할 수 있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 단 한 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건 공주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당한 요구다.

전공은 백작 이상이 참가하는 고위 귀족회의에서 평가해 왔는데, 오래전부터 정치적목적이나 이익에 따라 전공을 축소, 누락시키기도 했고, 작은 전공을 크게 부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대부분의 고위 족들이 두 왕자에게 쏠려 있는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공주 편에서 싸워줄 고위 귀족이 필요했다.

“설득할 만한 마땅한 귀족이 없어….”

“저 공주님… 가장 뒷장을 한번 보십시오.”

“뒷장? 누군데….”

코일의 말에 풀이 잔뜩 죽은 공주가 마지막 서류를 대충 넘기며 물었다.

“서북부 총사령관 타바트 백작입니다.”

“타바트 백작이면… 그 전쟁영웅!”

공주가 비명처럼 소릴 지르며 눈을 크게 뜨고 서류를 살폈다.

타바트 백작은 서북부 총사령관으로 놀랍게도 기사 가문이 아닌 대대로 왕실 행정관을 배출한 관료 출신 귀족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머리로 관료로서 자질을 보였지만 그는 관료가 되는 걸 포기하고 스스로 군부에 투신해 백작위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전쟁영웅이라 칭송받는 타바트 백작이다. 그가 직접 고위 귀족회의에 참석해 전공 심사를 하며 의견을 낸다면 누구도 반론을 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자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타바트 백작은 공작파의 한 사람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오랫동안 공작이 서북부 병영에 많은 지원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붉은 거미의 수장인 그녀는 공작과 타바트 백작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공작의 사람으로 분류되 두 왕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자입니다. 하지만 서북부 병사들은 아주 강병입니다. 백작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소 1만 이상의 강병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겁니다.”

“1만? 서북방 총병력은 5만이야! 아무리 타바트 백작이라도 5천 이상 병력을 빼낼 수는 없어!”

“5만이란 숫자는 예비병을 제외한 정규군 숫자입니다.”

“예비군? 백작에게 그런 군대가 있었나?”

“대략 8천 정도가 있습니다. 대부분 학센 지역 출신으로 정규군 결원 때 보충하기 위해 조직한 병력입니다.”

“그건… 좀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있긴 하지만 백작으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서북부 병력은 왕실 직영지에서 차출되는데, 병력 충원이 쉬운 편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서북부 총사령관이라도 왕실 직영지의 영지민을 차출하려면 국왕의 허락이 필요하다. 복잡하고 명확한 명분을 만들어 서류를 작성한 뒤 관료들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국왕에게 서류가 올라간다고 해도 국왕의 승인을 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왕실 직영지의 영지민은 일종에 왕실의 재산이다. 쉽게 내어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분명합니다. 이점을 부각해 설득한다면 백작을 흔들 수 있을 겁니다.”

코일의 말에 공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비군이라고는 명목이지만 왕실의 허락도 없이 비밀리에 병사를 육성했다. 보기에 따라선 반역으로 충분히 몰아갈 수 있는 중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타바트 백작의 성향을 몰라.”

“네? 무슨 말씀인지?”

“만약 말이야, 타바트 백작이 협력을 약속한 뒤 돌아가 서 북방군을 이끌고 남하하면 어쩌지?”

“예에? 그럴 리가요. 아무리 강병을 보유했어도… 서북부 병력으론 왕실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당장 서부군이 그들의 앞을 막을 겁니다.”

“그거야 서 북방군 혼자일 때고, 아스턴 왕국군에게 길을 열어준다면?”

“그… 그건!”

“어차피 반역으로 몰리면 죽은 목숨이야! 그럴 바에야 진짜 반역을 도모할지도 모르잖아?”

에이린 공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얼마 전 카일을 협박했다가 공작이 죽었고 그 때문에 분노한 귀족들이 왕도로 몰려들면서 오히려 공주가 사면초가에 몰리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같은 상황을 다시 만들 수는 없었다.

“백작! 백작이 원하는 걸 찾아 설득해야 해!”

“백작이 원하는 건 하나뿐입니다.”

“뭐? 그걸 알아?”

“백작과 공작이 반목하기 시작한 이유를 생각하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반목이라면… 아! 학센 지방!”

공주가 무릎을 치며 탄성을 터트렸다. 타바트 백작과 공작의 관계가 어긋난 건 다름 아닌 영지 문제 탓이다.

“네! 원래 아스턴 왕국의 영지였던 학센 지방을 점령한 건 순전히 타바트 백작의 기지와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학센 지방은 원래 아스란 왕국의 영토였지만 타바트 백작이 점령한 뒤 끊임없는 공격을 버티며 성을 쌓아 왕국의 영토로 편입시킨 지역이었다.

“원칙을 따진다면 백작위뿐 아니라 학센 지방을 영지로 하사하고 변경백으로 삼는 것이 맞아! 왕실로서도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한 타바트 백작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왕실 제정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 서로 좋은 거지.”

“네, 백작도 학센 지방을 영지로 받기 위해 기를 쓰며 지켜낸 거죠.”

“그렇지! 트라발트 공작이 반대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학센은 타바트 백작의 세습영지가 되었을 거야!”

“사실 전,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타바트 백작은 자작일 때부터 이미 공작의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백작의 세습영지를 반대한 걸까요?”

코일의 의문에 공주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관대한 권력자라도 말이야! 본능적으로 자신을 대신할 뛰어난 사람을 경계하기 마련이거든….”

“네?”

코일이 되물었지만, 공주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일단 백작이 원하는 걸 알았으니, 테링 자작과 의논을 해봐야겠어! 어떻게 하면 그를 설득할 수 있는지 말아야!”

에이린 공주가 눈을 빛내며 지난밤 카일과의 만찬을 떠올렸다.

‘기회를 한 번 더 드리죠, 저와 협상을 하려면 공주님도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주십시오.’

“두고 보라고! 반드시 백작을 설득해서 능력을 보여줄 테니 말이야!”

공주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외치며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벨… 이건!”

카일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물체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완성한 건가?”

“네! 정확히 보름 전 완성했습니다. 시 운전도 끝났고, 약간 문제도 있었지만 멜번 마법사님 도움으로 모두 해결했습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군! 난, 완성하려면 반년은 넘게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잘해줬다.”

왕도에서 정확히 두 달하고 보름 만에 돌아왔으니, 넉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문제점까지 해결했다는 건 카일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벨이 카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 남작님?”

“응?”

“저게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윌리스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장원에 도착하자마자 벨에게 이끌려 남쪽 평원으로 향하자 왕도에서 돌아온 일행 전부가 얼떨결에 함께 쫓아와 듣도 보도 못한 물체를 보게 된 것이다.

“아! 이것 말인가?”

윌리스를 위시한 일행 전체가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강철과 도자기, 그리고 라이플에 이르기까지 카일이 만든 모든 물건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물론 도자기를 제외하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카일이 만들어낸 모든 물건이 지금의 카일을 있게 만들었다는 걸 말이다.

“하하! 직접 보는 것보다 경험하는 게 빠르겠지?”

벨을 돌아보자 카일의 뜻을 이해한 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피식 웃음을 지은 카일이 윌리스를 비롯한 사람들을 추리자 벨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일단 타 보십시오!”

“이걸… 타란 말이냐?”

얼떨결에 카일에게 선택된 보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일단 타 보시면 압니다.”

카일이 보일의 등을 밀어 탑승시킨 뒤 보조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앞쪽 운전석에 탑승한 벨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서 앉은 카일을 돌아봤다.

“정말 기대되는군. 자! 시작하게!”

“예!”

고개를 끄덕인 벨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전면에 새겨진 작은 홈에 끼웠다. 일전에 멜번이 엔진 시동시 사용했던 방법과 동일 했다.

부릉-

투투투-

작은 시동음와 함께 시끄럽고 거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뭘 하는 거냐?”

갑자기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놀란 보일이 카일을 향해 물었지만, 카일은 깨끗이 무시하며 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벨! 출발하지.”

“그럼 출력, 올리겠습니다.”

벨이 다리 사이 레버를 천천히 당기자 엔진 소음이 점점 증가하며 거대한 동체가 점점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출렁-

거대한 동체가 움직이더니 수로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리곤 수면 위를 빠르게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를 만드신 걸까요?”

“배라고 보기엔… 형태가 좀 특이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일단 엄청 빠르지 않습니까? 이것 만해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여긴 내륙이야! 강과 바다와도 엄청 떨어진 곳인데, 배를 만들어서 뭘 하게?”

“그건… 어어어….”

“왜 그러… 날아?”

물 위를 스치며 동체가 서서히 떠오르더니 곧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대륙 최초, 6기통 엔진 두 개를 양쪽에 단 복엽기가 수면 위를 날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세상에!”

“설마… 비, 비공정을 만든 겁니까?”

전설로만 존재하는 마법의 시대, 모든 마법 지식이 총동원되어 제작된 하늘을 나는 배, 비공정이다.

물 위를 날아 하늘로 날아올랐으니, 비공정이란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건 비공정이 아니라 비행기다.”

“비행기!”

“그래! 마법과 기계학을 결합해 만든 하늘을 나는 기계다.”

카일이 웃으며 벨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비행이 안정적인데? 이륙거리도 생각보다 훨씬 짧았고?”

“역시 남작님께선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벨이 놀란 얼굴로 카일을 보며 웃었다.

“마법인가?”

“네! 사실 시험 비행에선 이륙거리나 중량도 계획만큼 나오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맬번 님께서 동체에 2서클 부양마법을 새겨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부양마법은 작은 물건을 하늘로 띄우는 보조 마법이다. 막 2서클에 오른 초보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마법이지만 가장 빨리 잊고 지내는 마법이기도 하다. 방향성 없이 그저 물건을 공중에 띄우는 마법이라 활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호! 부양마법?”

“네! 남작님께서 저서클 마법으로 마법 엔진을 생각하셨지 않았습니까? 그걸 보고 멜번 님께서 저서클 마법과 마법진을 새롭게 연구하시기 시작하셨답니다.”

“잘됐군! 앞으로 만들 게 많았는데 말이야!”

카일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마법 비행기는 전생의 비행기와 달리 따로 연료나 복잡한 전자장치가 필요 없는 단순한 형태다. 달리 말하면 엔진 마력에 비해 기체가 아주 가벼운 덕분에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행 시험 후 제원을 정리한 겁니다.”

벨이 양피지 한 장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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