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31. 협상 아니면 협박(3)
“하!”
카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 아니지, 그녀. 베츠를 저보고 책임지란 말입니까?”
망연자실 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돌변한 건 카일의 정령에게 묶여있던 자신의 정령이 다시 돌아온 뒤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베츠가 다가와 한 첫 번째 말은….
“당신! 대지 일족의 피를 이은 정령사군요.”
그리곤 더 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카일에게 대례를 올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공주의 황당한 주장은 다름 아닌 카일이 베츠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베츠의 얼굴을 본 이상 당신이 그녀를 책임져야 해요. 그게 팔머 가문의 전통이죠.”
“하! 이미 아시겠지만 전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미 혼인했든 하지 않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대지 일족의 피를 이은 정령사인 이상, 베츠는 당신을 죽을 때까지 따를 겁니다. 그게 팔머 가문의 신녀가 정한 운명이죠.”
“만약… 제가 대지 일족의 피를 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둘 중 하나죠. 당신이 죽든가 아니면 베츠가 죽든가.”
“빌어먹을…. 너무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것 또한 팔머 가문의 운명이자 가법이죠.”
“하지만…!”
“……이상하군요. 왜 이렇게 베츠를 거부하는 거죠? 설마 베츠의 체구 때문인가요?”
대지 일족의 혼혈이라 그런지, 베츠의 체구는 웬만한 사내만큼이나 컸다. 덕분에 카일도 처음엔 베츠가 사내라고 확신했었다.
“그게 아니라…!”
“그럼 다행이군요. 베츠는 팔머 가문 제일의 미녀에, 직접 겨뤄봐서 알겠지만 소드 엑스퍼트 상급에 근접한 대단한 실력자예요. 그런 그녀가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따르겠다는데 왜 거부하는 거죠?”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제겐 마음에 둔….”
“거짓말!”
“네?”
“사내가 한 여인에게 평생을 바친다? 전 믿지 않아요.”
에이린 공주의 말에 당장 공주의 옆에 앉은 테링 자작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힐끔 공주를 돌아봤다.
“고, 공주님…. 사내들이 모두 정부나 연인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테링 자작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은 공주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당신이 정부 하나쯤 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으니. 단 절대 외부에 공개되어선 안 돼요. 저도 공주로서 자존심은 있다구요. 알았어요.”
“그… 하!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검 앞에 맹세를 하라면….”
“맹세 씩이나…?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공주와 테링 자작의 황당한 말싸움에 어이가 없어진 카일이 머릴 움켜쥐었다.
“카일….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부드럽고 온화한 눈빛으로 걱정스럽게 말하는 베츠의 목소리에, 카일은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는 없었다.
“공주님…!”
“괜찮다니까요. 2명 정도는?”
“에이린 공주님!”
언제 끝날 지 모를 어이없는 말싸움에 화가 난 카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네….”
“일단…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그보다… 절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요.”
“맞다!”
워낙 많은 일이 한꺼번이 터지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일에 대한 협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 필 테일 남작가와 동맹을 맺고 싶어요.”
물론 처음 계획은 동맹이 아니라 필 테일 남작가를 굴복시켜 발아래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상대는 어쩌면 소드 마스터일지 모를 강자인 동시에 전혀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상급 엑스퍼트까지 보유한 가문이다. 거기다 원래는 자신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팔머 가문의 베츠까지 운명에 따라 카일을 섬기기로 했으니 이젠 공주가 카일에게 도와달라 사정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동맹을 제시하기 전에… 동맹을 제의하는 이유부터 말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휴. 솔직히 말하죠. 전 왕이 되고 싶어요.”
“지금… 여왕이 되고 싶다는 겁니까?”
“맞아요!”
“하… 하! 정말… 대담한 꿈을 꾸고 있군요.”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는 없으니까요.”
“생명의 위협이라도 받는단 말입니까?”
“평생을 위협받고 살았죠. 현 왕비와 두 동생에게 말이죠.”
씁쓸하게 웃으며 공주가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국왕께서 살아계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미 국왕께선 병이 깊으세요. 아마도 오래 버티긴 힘들 거예요. 국왕께서 승하하시고, 두 동생 중 하나가 왕위를 차지하면, 운이 좋으면 아슬린 왕궁의 적당한 부족에게 시집을 보내거나 아니면 누명을 씌워 형장에 보내지겠죠.”
“너무… 극단적인 생각 아닙니까?”
“저들도 그럴 수밖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현 왕비가 제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 있다는 걸 제가 알고 있거든요. 제게 치부를 들켰으니 절 죽이고 싶지 않겠어요?”
“그 이야기를 국왕 전하께….”
“어떨 것 같나요?”
에이린 공주가 처량하게 웃었다.
“이미… 하셨군요.”
“맞아요. 국왕께서 제게 붉은 거미들의 수장 자리를 맡긴 것도 절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셨죠.”
“이상하군요. 공주님을 보호할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왕비를 폐위라도 해야 할까요? 어림없죠. 그랬다간 후계자인 왕자들에게 큰 흠집이 생길 텐데…. 트라발트 공작이 귀족을 휘어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국왕은 왕자들에게 흠집이 생기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정치적인 이유로 묻었다는 말이군요.”
“왕가의 명예와 직결된 문제니까요.”
“좋습니다. 공주께서 왕위를 원하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제게 어떤 도움을 원하시는 겁니까? 설마 병력을 이끌고 왕궁을 장악하란 말은 아니겠죠?”
“왕궁 장악… 가능은 한가요?”
카일의 도발적인 물음에 공주도 지지 않고 되물었다.
“하하! 참 어렵고도 쉬운 질문인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카일이 찻잔을 뒤적이던 티스푼을 내려놓으며 평의한 태도로 물었다. 그래서인지 더 강한 믿음이 갔다. 하지만 공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믿을지 모르겠지만, 전 왕실을 사랑해요. 그래서 더 바른 왕실과 나라를 만들기 위해 왕이 되려는 거죠. 시작부터 정당한 명분 없이 왕위를 찬탈한다면… 그 순간 제가 가진 모든 가치가 무너지는 거예요.”
“흠…. 그럼 어떻게 정당한 명분으로 왕위를 계승 받을 겁니까?”
“참전이에요.”
“참전?”
“네! 곧 왕실 명의로 이번 바런트 왕국과의 전면전에 왕실의 참전을 선언할 거예요. 왕위 계승권을 가진 누구라도 참전해 가장 높은 전공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이죠.”
“겉으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두 왕자들의 싸움이군요.”
“맞아요. 여기에 트라발트 공작이 가세한 게 특이하다고 할까요?”
“트라발트 공작?”
“네! 그도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직 복수 대상이 몇 명 남았군요.”
“공작을 제거할 생각이라면 지금은 그만두는 게 좋아요. 그의 죽음은 다른 귀족의 죽음과는 다를 거예요. 귀족파 전체가 들고 일어날 수 있으니….”
“지금 은이라…. 일단 알겠습니다. 뭐… 좀 더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진중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께서 참전을 생각하셨다면 나름 전공에 대한 자신이 있었단 말인데, 어느 정도 전력을 확보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카일의 물음에 공주가 잠시 머뭇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
“2만 명? 설마 2만의 병력을 모았단 말입니까? 대단한데요?”
카일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2만 정도라면 두 왕자에 비해 부족하긴 하지만 1군을 이끌며 전장에 나서기 충분한 병력이었다.
“아니! 아녜요. 제가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은 2천5백이 전부예요.”
카일의 오해를 참다못한 공주가 크게 소리치더니 곧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2천5백이라고 했습니까? 혹시 제가 잘못들은 건 아닙니까?”
얼마나 황당한 소리인지 자신의 귀를 매만지며 되물었다. 공주의 신분으로 2천5백의 병력을 모은 것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전공을 세워 왕위에 오르겠다는 포부로 전쟁에 참전하는 목표를 고려하면 한참 모자랐다. 1개의 군단이 2만에서 3만, 많으면 5만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2천5백 명의 병력으로 전공을 세우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었다.
“전 공주예요. 왕자들과 달리 자금을 모으는 것도, 귀족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도 힘들어요. 이만큼 병력을 모은 것도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단 말이에요.”
에이린 공주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붉어진 눈으로 하소연하듯 말했지만 카일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전쟁은 수많은 목숨이 달린 일이다. 만약 공주를 지원했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패전의 책임뿐 아니라 차기 국왕에게 제대로 찍혀 왕국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솔직히 묻죠. 2천5백으로 왕위에 오를 만큼 큰 전공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피라네시아 평원엔 빈민과 유민 수만 명이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곳에서 병력을 징집하면 적어도 5천 이상의 병력은 만들 수 있잖아요.”
에이린 공주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꽝!
와장창-
얼마나 분노했는지, 카일의 주먹이 탁자를 부수면서 값비싼 찻잔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박살이 났다.
“지, 진정하게!”
테링 자작이 급히 공주의 앞을 막으며 카일을 달랬지만, 카일은 사나운 눈길로 공주를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병사가 서류에나 보이는 숫자 정도로만 보이나 본데! 공주 같은 사람을 위해 단 한 방울의 피도 아까우니 이만 일어나 돌아가는 게 좋겠군! 협상은 없던 것으로 하지요!”
카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공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도 정말 괜찮나요?”
“무슨 뜻입니까?”
“당신에 대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죠.”
“비밀? 설마 카슨 자작과 모르모트 남작의 일을 말한다면, 증거는….”
“다핸 남작령!”
공주의 입에서 터져 나온 뜻밖의 단어에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타 영지의 영민을 강탈한 행위를 귀족들이 수긍할 것 같나요?”
공주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면, 왕도로 집결 중인 모든 병력이 가장 먼저 당신의 장원과 영지를 공격할 거예요. 어때요. 이래도 날 위해 흘릴 피가 없나요?”
공주의 말에 심각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카일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서 있자, 공주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어렸다. 카일이 영지민을 아끼면 아낄수록 그는 절대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 공주는 확신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런 협박을 들으니 충격이 크긴 하군요.”
카일이 담담하게 말하며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협박이 참 멍청하군요.”
“지금… 무슨 말을!”
“윌리스!”
카일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윌리스가 서둘러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예! 남작님!“
윌리스가 고개를 숙이자, 카일이 공주를 돌아봤다.
“협박은 말입니다. 협박을 하기 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카일이 피식 웃으며 윌리스를 바라보았다.
“오왠을 통해 공작의 동향은 파악했겠지?”
“물론입니다. 일정부터 습관이나 버릇까지 모두 파악했습니다.”
“지금 당장 공작을 사살할 수 있겠나?”
카일의 말에 공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공작이 죽으면 귀족들이 들고일어날 거야!”
“맞아요. 내가 원하는 그림입니다.”
“뭐예요…?”
“큰 사건은 말입니다. 더 큰 사건이 생기면 저절로 관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거든요. 공작이 죽었는데, 고작 변방 촌구석 영지민 쯤 빼갔다고 문제가 될 것 같습니까?”
카일이 공주를 일별하고 윌리스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겠나?”
“오늘 아침 공작이 영지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잘됐군! 그럼… 이렇게 하지. 이번에도 사슴 가면이 공작을 죽이는 거야.”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곳에서 공주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윌리스가 밖으로 나가자 공주가 더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카일은 담담하게 공주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평온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만찬을 준비했는데, 깜빡했군요. 결과가 돌아올 때까지 함께 식사나 할까요. 어쩌면 밤을 새워야 수도 있겠군요.”
공작의 죽음이 전달될 때까지 절대 공주와 테링 자작이 돌아갈 수 없음을 명확히 밝힌 것이었다.
“베츠!”
“…네에?”
“함께 식사하러 가시죠.”
카일이 친절하게 손을 내밀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베츠가 곧 환하게 웃으며 카일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은 평생을 함께할 카일이지 공주나 테링 자작이 아니었다.
“네! 좋아요.”
베츠가 카일의 손을 잡고 응접실을 벗어나면서,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까지 사라져 버리자 공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작이… 죽으면, 발렌시아 공녀의 성격상… 절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예요.”
“…공주님!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일단… 남작과 이야기를 더 나눠보시죠. 이젠 공작의 죽음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네요. 아이러니하네요. 공작의 죽음으로 인해 필 테일 남작의 힘이 더 절실해지다니….”
공주가 허탈하게 웃으며 자작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공작이 죽으면 귀족파는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정계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공작의 후계자는 아직 소년에 불과했고 발렌시아 공녀는 똑똑한 인재긴 하지만 그녀 역시 이제 갓 스물이 된 공녀에 불과했다. 노쇠한 귀족들을 휘어잡기엔 아직 부족했다. 결국 귀족들은 힘 있는 자에게 이합집산할 테고, 공주 역시 이때를 잘만 이용하면 세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었다.
단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녀에게 다른 두 왕자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레드 와이번의 오너이자 소드 마스터(스스로는 부정하지만). 막대한 자금력까지 보유한 필 테일 남작이 공주를 지지한다면, 그녀도 반전의 기회를 한 번쯤은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가요…. 이젠 더더욱 그를 포기할 수 없어요.”
에이린이 테링 자작이 손을 힘껏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응접실 밖에서 대기중인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만찬이 준비된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오르던 트라발트 공작의 심장에 한발의 탄환이 날아와 박히며 왕도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