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30. 협상 아니면 협박(2)
“무기를 가져와라!”
베츠가 카일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지만, 카일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무기는 무슨, 두 손이면 충분하다.”
“뭐라!”
분노한 베츠가 단검을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달려들려 했지만, 카일이 또다시 손을 들었다.
“잠깐! 설마 따로 덤비겠다는 건가?”
카일의 말에 베츠는 물론 테링 자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저 녀석만으론 힘들 텐데?”
“그건 붙어봐야 아는 거다!”
분노한 베츠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쉬익-
스각-
사악-
눈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베츠는 단검술뿐 아니라 움직임 자체도 엄청나서 마치 카일의 전신을 난도질할 것처럼 단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공격해도 카일의 몸에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 대단한데? 빠르기 하나만큼은 내가 본 누구보다 빠르다.”
카일이 웃으며 칭찬을 했지만 베츠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베츠는 지금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빠르기는 봤고, 그럼 파워는 어느 정도인지 볼까?”
베츠의 단검을 손가락 한 마디 거리로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피하던 카일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
쿠웅-
굉음과 함께 오른발을 중심으로 단단한 청석이 방사형으로 부서져 나갔다. 동시에 카일의 주먹이 어느새 푸른빛으로 물든 베츠의 단검과 부딪혔다.
꽝-
도저히 검과 주먹이 만나서 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충격과 함께 베츠의 신형이 형편없이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쯧! 파워는 형편없군!”
카일이 다소 실망한 듯 쓰러진 베츠를 보며 말했다. 부딪히는 순간 느껴진 생각보다 약한 파워에 급히 공격력을 절반 이상 낮췄는데도 형편없이 나가 떨어진 것이다. 오러보다 근력 자체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크윽…. 빌어먹을!”
베츠가 카일을 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일이 공격력을 상당 부분 줄였고. 베츠 역시 충돌 순간 힘을 풀어버리며 뒤로 날아가면서 충격 대부분을 해소 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베츠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츠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모멸감에 두 눈이 붉게 출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그런 베츠의 변화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테링 자작에게로 시선을 완전히 돌렸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자작님도 검을 뽑아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피스트… 워리어였나?”
“뭐! 둘 다라 할 수도, 둘 다가 아닐 수도 있지요.”
카일이 웃으며 모호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결국 붙어봐야 안단 말이군.”
테링 자작이 검을 뽑은 뒤 검집마저 버렸다.
“자작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이린 공주가 바라보았지만, 테링 자작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며 천천히 카일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꽝-
연무장으로 통하는 문이 부서져 나가며, 보일과 함께 기사들과 자경단, 그리고 하녀들까지 우르르 밀려 나왔다.
“카일!”
보일이 가장 먼저 달려와 카일을 살폈다.
“괜찮은 거냐?”
“저야 당연히 괜찮습니다만… 여긴 어떻게 온 겁니까?”
“그야 당연히 네가 위험하다고….”
보일이 쓰러진 베츠와 검집까지 버리고서 전의를 불태우는 테링 자작을 보며 머릴 긁적였다.
“전혀… 위험해 보이진 않는구나!”
“당연히 그렇겠죠.”
주변 기사들과 자경단 그리고 얼떨결에 따라온 하녀들과 집사, 마지막으로 시선을 피하는 하녀장 브리엔까지 모두를 확인한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대충 상황이 파악된 것이다.
“휴…. 이거 구경꾼이 생긴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뭐… 그럼….”
카일이 시선을 돌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조용히 지켜보도록.”
카일의 말에 환하게 밝아진 기사들과 자경단이 구석으로 달려갔고, 고용인들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더니 우르르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좀 과격할 것 같은데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검을 뽑았다.
“그 정도야, 걱정 마라.”
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공주를 돌아봤다.
“뒤로 물러나 계시죠. 인질로 잡을 생각 따윈 없으니.”
카일의 말에 테링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나 계십시오.”
“부디… 조심하세요.”
에이린 공주가 걱정스럽게 테링 자작을 바라보더니 보일의 뒤쪽으로 물러나자, 기회를 보고 있던 윌리스가 급히 달려와 카일의 검을 내밀었다.
“검입니다.”
“아니. 필요 없다.”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윌리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평생에 다시없는 기회가 될 거다.”
“아, 알겠습니다. 주… 남작님!”
고개를 숙인 윌리스가 물러나자 상황을 지켜보던 테링 자작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기사들을 두었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대련이 저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허허! 그러고 보니 좀 아쉽군.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기사단을 데려오는 건데….”
“그건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왕실기사단이 함부로 움직이면 가뜩이나 예민한 두 왕자가 의심을 할 테니 말입니다.”
카일이 빙그레 웃자 테링 자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거, 왕실 사정까지 알고 있군그래?”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하지만 이해하십시오. 저도 나름 복수를 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복수?”
“그렇게만 아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런가? 하긴 말이 길어서 좋을 것없지. 그럼 처음부터 오러를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이해 좀 부탁하지.”
“상관 없습니다. 얼마든지!”
카일이 동의하자 텔링 자작의 검에서 청녹빛 오러가 피어올랐다.
“오러가… 참 독특하군요.”
“자네의 청백색 오러도 특이하긴 마찬가지지.”
“하긴 그렇군요.”
카일이 피식 웃으며 두 손을 편하게 늘어트렸다.
우웅-
손끝에서 아주 낮은 진동과 함께 청백색의 기운이 일어나더니 곧 손바닥 전체를 잠식했다.
“…오러… 피스트, 아니, 핸드 블레이드인가?”
“하하, 명칭이 중요한건 아니죠! 그냥 검이라 생각하십시오.”
“그것도 괜찮군!”
테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일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베츠에 비하면 굉장히 느린 검속이지만, 검에 담긴 힘과 압력은 베츠에 비해 훨씬 무섭고 강해 쉽게 피할 수 없었다.
쿠웅
하지민 카일은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한 듯 부드럽게 손을 뻗어 자작의 검을 막아갔다. 하지만 그런 카일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일을 향해 떨어지던 자작의 검이 급작스럽게 바뀌며 카일의 목을 횡으로 그어왔다. 카일 역시 급작스러운 변화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른손을 부드럽게 말아 횡으로 그어오는 검면을 때렸다.
따앙-
맑은 울림과 함께 자작의 검이 밀려나자, 이번엔 카일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자작의 목을 향해 손끝으로 찔러 넣었다.
“헉-!”
검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들어오는 카일의 공격에 대경한 자작이 급히 허리를 꺾어 카일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카일의 허리를 베어 갔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공격을 놓지 않는 자작의 모습에 내심 감탄하며 카일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자작이 겨우 몸을 세우며 이마 위로 흐르는 굵은 땀을 훔쳤다.
“대단하군요. 그런 자세에서 검이 뻗어 올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카일이 웃었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보죠.”
“얼마든지!”
자작이 대답과 동시에 곧장 카일을 향해 달려들며 맹공을 퍼부었다.
꽝-
꽝-
엄청난 검격과 함께 비산하는 화려한 오러, 그리고 이어지는 굉음!
마치 하늘 위에서 폭발하는 화려한 불꽃처럼 아름다웠지만, 비산하는 오러의 위력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파괴적이고 위협적이었다.
꽈앙-
화려한 오러의 파편이 불규칙한 형태로 에이린 공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위험…!”
지켜보던 마크가 급히 소리치며 달려 나가려 했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보일의 검이 정확히 날아드는 오러의 파편을 쳐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너희들이 막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공주를 일별한 보일이 다시 돌아섰다.
“상급… 엑스퍼트! 또 있었어!”
완벽한 계산 착오이자, 필 테일 가문의 전력이 얼마나 강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방문은 득보다 실이 많겠어…!’
공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실이긴 하지만 동시에 득이기도 했다. 필테일 남작가만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면…!
마음을 다잡은 공주가 다시 치열하게 공방 중인 카일과 테링 자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베츠가 어디로 갔지?’
조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베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에이린 공주가 깜짝 놀라 소리치려는 순간, 카일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인형이 불쑥 솟아올랐다. 테링 자작이 카일을 향해 공격을 가하는 절묘한 타이밍을 적확히 노린 완벽한 공격이었다.
“암습!”
“비겁하다!”
분노한 기사들이 소리치며 달려들려 했다.
꽝-
순간, 보일이 발을 구르며 기사들의 앞을 막아섰다.
“카일은 암습 따위에 당할 녀석이 아니니 가만히 있어!”
보일의 외침에 기사들이 머뭇거리며 멈춰 섰다.
“어?”
“왜… 저러지?”
주춤거리던 기사들이 연무장을 가리켰다. 그림자 속에서 반쯤 솟아오르던 베츠가 어이없게도 다시 그림자, 정확히는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그대로 멈춰버리면서 옴짝달싹 못 하고있는 것이다.
“이… 게 도대체!”
몸을 비틀며 땅속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던 베츠가 겨우 땅 밖으로 빠져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일을 노려봤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땅의 정령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고 소통도 끊어졌다.
“빌어먹을! 가만두지 않겠어!”
베츠가 뽀족하게 외치며 다시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거 좀 귀찮은데?”
카일이 뒤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베츠를 힐끔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리더니, 왼손에 모든 오러를 집중시켰다.
“이만… 끝내죠!”
웅-
카일의 왼손 위로 물결처럼 일렁이는 청백색의 투명한 검신이 삐죽 솟아났다. 카일은 그대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테링 자작의 검신을 부수고는 자작의 멱살을 움켜줬다. 그리곤 그대로 자신의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베츠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테링 자작을 피해 좌측으로 몸을 틀었으나, 눈앞에 카일이 씩 웃으며 서 있었다.
“이건 날 귀찮게 한 벌이다.”
카일의 손날이 베츠의 머리를 쪼갤 듯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자, 베츠는 죽음을 직감하곤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스각-
날카로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얼굴 전체를 가린 검은 복면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순간 새카만 검은 머리가 폭포수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어…? 너…!”
삼단 같은 검은 머릿결에 새까만 눈동자와 붉은 입술, 하얀 피부까지. 동서양을 적절하게 섞어놓은 묘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여자… 였냐?”
카일이 황당한 얼굴로 베츠를 바라보았고, 그보다 더 황당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던 베츠가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런! 베츠.”
에이린 공주도 놀라 급히 달려갔고, 테링 자작은 멍한 얼굴로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조금 전 카일의 검격을 떠올리며 소란스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고용인들까지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구경에 자기들끼리 모여 소곤대기 시작했다.
“허허…. 오랜만에 정통 귀족이 온다고 해서 기뻐했더니만… 이건 완전히….”
“…개판이죠.”
하녀장 브리엔의 말에 동의하는지, 집사 버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녀장과 함께 터벅터벅 힘없이 저택 안으로 향했다. 이 상황을 통제할 자신이 두 사람에겐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