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95화 (395/404)

외전 - 129. 협상 아니면 협박(1)

꽝-

“큰일 났습니다!”

문짝이 날아가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지만, 다행히 아직 멀쩡히 붙어있는 문짝을 보며 안심한 에이린 공주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코일, 여긴 다른 곳도 아닌 공주 궁이에요. 이렇게 무작정 밀고 들어오면 남들이….”

“카슨 자작과 모르모트 남작이 폴타 다리에서 죽었습니다.”

꽝-

“뭐라고요!”

에이린 공주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슨 자작이 2왕자의 자금으로 세워진 포슈 상단을 관리하는 최측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면, 모르모트 남작은 원래 1왕자의 호위 기사 출신으로 1왕자를 지지하는 측근 귀족 중 하나였다. 두 가문의 충돌로 목숨을 잃었다면 이건 왕자 간 내전으로 벌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번 일에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2왕자는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데… 페트릭은요? 설마 카발리를 찾아간 건 아니겠죠? 아니지. 모르모트 남작은 카발리의 최측근이니…. 어쩜 페트릭보다 카발리가 먼저 움직일 수도 있겠군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에이린 공주가 턱을 괴며 물었다. 어차피 1왕자 카발리나 2왕자 패트릭 모두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왕비가 된 루비나 후작 부인의 소생이니, 에이린 공주와는 사실상 왕위를 두고 다투는 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린 공주가 아무리 적통 왕비의 자녀이지 장녀라고 해도 그녀가 왕위에 오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당장 군부와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카발리나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패트릭을 상대하기엔 그녀의 세력은 고작해야 붉은 거미라는 대외 정보조직이 전부였으니, 두 왕자 모두 에이린 공주를 경쟁상대로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차리리 잘 된 건가? 두 세력이 왕도에서 부딪히면…. 둘 다 제법 타격을 입겠지.”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에이린 공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왕자들이 전공을 세우기 위해 전쟁에 적극 참전 의사를 밝히며 두 왕자의 핵심 세력들이 하나둘 왕도로 집결 중이었다. 이런 때 세력 싸움이 벌어지면 분명 양쪽 다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에이린은 그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면 그뿐이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코일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두 가문이 서로를 죽인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 폴타 다리에서 죽었다고 했잖아?”

“네, 맞습니다. 폴타 다리 중간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분쟁이 있었지만, 전투가 일어난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 말고 제삼자가 나타나 정확히 두 가문의 가주들만 죽이고 사라졌습니다.”

“두 가문의 가주만?”

“네! 그것도 마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두 사람 머리를 정확히 터트려서 말입니다.”

“그게… 가능한 소리야?”

“가능하고 아니고는 둘째치고, 실은 그것보다 더 큰 일이 있습니다. 이게 정말 큰 일이란 말입니다.”

“빌어먹을, 답답하게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봐! 그래서 정말 큰 일이란 게 뭔데!”

고상한 에이린 공주의 입에서 드디어 욕설까지 튀어나왔다.

“강 한가운데 나타난 의문의 조직! 사슴 가면입니다.”

“…뭐!”

“사슴 가면 말입니다. 공주께서 쓰고 다니시는 가면과 똑같은 사슴 가면 말입니다!”

“…그 말은 지금!”

“지금 두 왕자 궁에서 사슴 가면을 찾는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이제 어쩝니까? 두 왕자 궁이 나섰다면 이 사실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코일의 말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에이린 공주가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링! 테링 자작에게 가야겠다.”

“지, 지금 말입니까?”

“지금이 아니면! 내가 사슴 가면이란 게 밝혀지면 끝이야! 그 전에 대책을 찾아야 해!”

에이린 공주가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코일이 황급히 공주의 뒤를 쫓았다.

“고. 공주님!”

* * *

귀족 거주 지역에서도 외각에 위치한 조용한 타운하우스 앞으로 검은 마차 한 대가 조용히 멈춰서더니,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과 중년 사내가 마차에서 내렸다.

“여긴가요?”

“예. 이곳에 낯선 자들이 나타났단 보고가 있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런 곳에 버젓이 숨어… 아니.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군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붉은 거미는 대외 정보조직입니다. 왕도에선 오히려 정보상인들보다 정보가 늦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3일이나 걸린 건 너무 늦은 것 아닌가요?”

“그게… 좀 이상합니다. 왕도의 4대 정보 조직 중 하나를 제외하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잠적했습니다. 샤츠와의 접선도 겨우 이루어진 겁니다.”

“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두 왕자의 세력이 사슴 가면을 잡겠다고 왕도 전체를 뒤집어 놓고 있으니…. 오히려 제게는 감사한 일이지만요.”

두꺼운 로브를 들어 타운하우스를 노려본 공주 에이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번 협상에 전 모든 것을 걸었어요. 반드시 성사시켜야 해요.”

“걱정 마십시오. 말로 안 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반드시 성사시킬 겁니다.”

테링이 고개를 돌려 검은 복면인을 돌아봤다.

“공주를 부탁하지!”

“오지랖은…. 공주는 팔머가의 사람이다. 네놈 부탁이 아니라도 알아서 지킬 테니 걱정 마라!”

불퉁하게 말한 복면인이 공주의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신기하군. 기척까지 완벽히 사라지는 은신술이라니….”

테링 자작이 놀란 눈으로 복면인이 사라진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니 공주를 돌아봤다.

“그럼… 가실까요. 마이 레이디?”

“휴…. 테링 자작께서는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군요.”

“하하! 복잡하게 생각하면 머릿속만 어지러울 뿐입니다. 어차피 이번 협상은 힘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으니 편하게 생각하시죠.”

테링 자작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요.”

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테링 자작의 손을 잡고 정문으로 향했다.

끼이익-

“어서 오십시오.”

테링 자작과 에이린 공주가 막 정문 쪽으로 다가서자, 커다란 철문이 열리며 버먼 집사가 걸어 나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테링 자작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내가 방문할 거란 걸 알고 있었나?”

“예?”

손님의 황당한 물음에 버먼이 어이가 없는지 되물었다. 어제저녁 집사는 남작으로부터 중요한 손님 방문을 전해 들었다. 무려 십 년 만에 작위를 가진 귀족의 방문이라 흥분한 집사와 하녀장은 고용인들을 총동원해 집 안팎을 청소하고, 무어 부인은 만찬에 대비한 코스요리를 짜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찾아온 손님이 헛소리를 하고있었다.

‘아니! 귀족 영애까지 대동하고 와서는 올 줄 알았냐니… 뭐 이런…!”

속으로 열심을 욕을 쏟아낸 버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남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알겠네! 그럼 부탁하겠네!”

테링 자작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를 향해 웃어 보이며 집사 버먼을 따라 안으로 향했다.

버먼은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어서 오시지요. 테링 자작님!”

고급스러운 정복을 차려입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카일 드 필테일입니다.”

카일이 여유롭게 웃으며 테링 자작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묘한 표정으로 로브를 뒤집어쓴 에이린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뵙는군요. 사슴 아가씨… 아, 아니지. 이러면 왕실 모독죄가 될까요. 에이린 공주님?”

“당신이 어떻게……!”

“어쩌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카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곧 만찬이 준비될 겁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귀족이라 그런지 고용인들이 손님맞이 준비하느라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모쪼록 즐겨주세요.”

카일이 빙그레 웃으며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종을 들었다.

딸랑-

종소리에 맞춰 하녀장 브리엔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예기치 못한 손님이 한 분 더 계시다네. 준비해줄 수 있겠나?”

“예?”

“곤란한가?”

“아닙니다. 음식은 충분합니다.”

“다행이군!”

“혹… 한 분은 언제쯤 오실지…. 음식이 식지 않게 데우려면….”

“그건 걱정 말게.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하실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브리엔이 미소를 지으며 물러가자 에이린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가 또 오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두 분만 올 거라 생각했는데, 한 분이 더 오셨으니 추가로 지시를 내린 것뿐입니다.”

흔들리는 공주의 눈빛을 뒤로하고 카일의 시선이 공주의 그림자로 향했다.

“그렇게 숨어 있으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카일의 물음에 에이린 공주와 테링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령을 이용한 은신술, 정말 독특하군요.”

“당신! 정체가 뭐죠!”

에이린 공주의 외침에 카일은 느긋하게 차를 기울였다.

“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화를 참아가며 두 분을 최대한 정중하게 맞이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지금 그 검을 뽑으시면, 저도 어떻게 돌변할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카일의 말에 테링 자작의 등 뒤로 알 수 없는 소름이 밀려왔다.

“걱정 마십시오. 오늘 전 여러분을 손님으로 대우할 겁니다. 먼저 절 적대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무사히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자신감이 아주 대단하군!”

에이린 공주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복면인이 천천히 올라와 카일을 노려봤다. 하지만 카일은 복면인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빛내며 복면인을 살폈다.

“흥미로운 기술이군. 흙의 정령에 환영 마법을 섞은 것인가?”

“어떻게 알았지? 마법을 배운 건 아닌 것 같은데?”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카일이 빙그레 웃으며 화로 위에 올려진 무쇠 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는 빈 찻잔에 차를 따라 복면인에게 밀어내며 제법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곧 만찬이 있을 거다. 그동안 차 한 잔 하지.”

“하하! 너와 난 차가 아니라 검을 맞대야 할 사이가 아닌가?”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복면인의 말에 카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 전 말하지 않았나? 난 오늘 손님으로 그대들을 맞이할 거라고?”

“미안하지만 난 오늘 손님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서 말이야.”

복면인의 말에 카일의 시선이 테링 자작을 향했다.

“테링 자작께서도 같은 생각입니까?”

카일의 물음에 공주를 돌아본 테링 자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몸을 푸는 것도 협상에 도움이 되겠지.”

“하하! 이거, 정중히 손님으로 맞으려 했더니…. 좋습니다. 식전 운동은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죠.”

즉 너희 둘은 식전 운동 거리 정도밖에 안 된다는 노골적인 무시였다. 당장 분노한 복면인이 카일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카일이 급히 손을 뻗었다.

“워워! 공주께서 계시는데, 그 수행원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 생각인가? 소문이 나면 공주의 명예에 흠집이 생길 텐데?”

“지금 협박을 하는 건가…!”

“협박은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하는 것 아닌가? 보라고. 난 무기도 없다고?”

실제 카일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 마치 두 사람이 카일을 위협하는 형국이었다.

“베츠…!”

에이린 공주가 복면인을 불렀다.

“오! 베츠? 이름이 베츠인가?”

카일이 웃으며 다가서자 복면인 베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당장 연무장으로 안내해라!”

“하하! 좋아, 그러지.”

피식 웃으며 카일이 응접실을 나섰다.

“남작님?”

“만찬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아! 그렇다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손님들과 잠시 대련을 좀 해야 할 것 같거든.”

“대련이요!?”

브리엔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베아트리의 타운 하우스에는 딱히 기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없어서 저택 내에선 지금껏 단 한 번도 대련을 벌인 적이 없다 보니 브리엔도 잠시 당황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능한 하녀장이며, 주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연… 연무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브리엔의 말에 카일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사실 카일도 왕도에 온 지 꽤 되었지만 대부분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나 돌아왔기에 저택의 구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었다.

브리엔을 따라 응접실을 벗어나 복도 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뻥 뚫린 넓은 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보니 타운하우스 자체가 건물 중앙에 넓은 마당을 만든 중정형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곳입니다. 건물을 축조할 때부터 외부에 검술이 노출되지 않게, 건물 중앙에 연무장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군.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브리엔이 내심 안도하며 뒤로 돌아서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복면인을 발견했다.

“헉-”

깜짝 놀란 브리엔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까 말했죠. 새로운 손님. 복면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카일이 피식 웃었다.

“아… 네.”

브리엔이 베츠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지만, 베츠는 브리엔을 무시하며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언제 시작할 거지?”

“성격도 급하군.”

카일이 피식 웃으며 멍하니 서 있는 브리엔을 돌아봤다.

“그만 돌아가도 됩니다.”

“아… 예!”

브리엔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녀는 유능한 하녀장이다. 대련이라고는 하나 험악한 분위기를 읽지 못할 그녀가 아니다. 더구나 남작은 무기도 없이 정복을 착용한 상태다.

‘남작님이 위험해!’

브리엔은 스스로가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 자부하며 서둘러 기사들이 머물고 있는 2층을 향해 달려갔다. 한편, 연무장 안은 긴장감이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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