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26. 사슴 사냥2
“어떠세요?”
입구에 멈추어 선 채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는 헬레나와 메아린을 보며, 엘바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게 모두….”
“네! 장주께서 직접 만드신 최고의 접시만 선별해 서쪽 벽면 전체를 장식했어요. 정확히 200점의 청화 무늬 백자 접시가 사용되었죠.”
최고의 도자기는 한 점에 수백 골드를 호가할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점점 더 가격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도자기에 빠져든 귀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자기를 수집해 전시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공개하며 자신의 재력과 품위를 과시했다. 덕분에 도자기 한 점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교계에 발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왕도 귀족들에게 도자기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벽면 전체를 수백 골드에 달하는 도자기로 장식할 수 있는 귀족이 얼마나 될까? 엄청난 재력을 가진 귀족 상인이 아니면 왕실의 사람 정도가 아닐까?
“…동쪽엔 서재와 침실이, 남쪽엔 차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작은 주방과 응접실이 있어요. 그리고….”
엘바의 설명이 이어지자, 유모인 메아린이 곧 정신을 차리고 엘바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여긴 누구 방이지?”
“아름다운 평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 예?”
자신의 설명에 심취한 듯 열심히 말을 이어가던 엘바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 물러났다.
“조금 전 베아트리 아가씨의 방도, 손님을 모시는 응접실도 이곳보다 크고 화려하진 않았어. 여긴 누구 방이지?”
“유모… 무슨 말이에요. 방의 주인이 따로 있다니?”
서쪽 벽면에 정신이 팔려있던 헬레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아무리 부유한 가문도 언제 찾아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수천 골드를 쏟아부어 방안을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진 않아요.”
도자기의 가격이 수천 골드에 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카일이 직접 수천 골드를 지출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수고와 재능이 필요했을 뿐. 하지만 메아린의 말에 엘바도 헬레나도 토를 달지 못했다. 어쨌든 고급 도자기 수백 점을 들여 벽면을 장식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세요. 의자 씌우개, 테이블보, 커튼까지. 원주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다급하게 교체까지 했단 말이죠. 그러니 이제 말해주겠니? 이 방의 원주인이 누군지?”
메아린의 재촉에 당황한 엘바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 여긴 자… 장주님의 방이에요.”
“남작님? 여기가 남작님의 방이란 말이니?”
핼레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저택에 영애를 모실만한 빈방이 없어요. 그래서 장주께서 아가씨께 거처를 내어주신 거예요.”
엘바의 말에 헬레나의 얼굴이 또다시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애써 감정을 눌렀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장주께서 사용하신 물건은 모두 옮기거나 교체했답니다.”
“그럼, 남작님께서는… 저택에 남은 방이 없다면 장주깨서도 머물 곳이 없는 것 아니니?”
헬레나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엘바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장주께선 조금 전 장원을 떠나셨거든요.”
“떠나? 장원을 떠나셨다고?”
핼레나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네! 기사단과 산에서 내려온 자경단과 함께 와이번을 이끌고 떠나셨어요.”
“와이번…. 어디로, 어디로 떠나셨는데?”
헬레나의 다급한 물음에 엘바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했다.
“왕도, 왕도로 가셨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이상한 말이라니?”
“그게… 사슴을 사냥하러 가신다고….”
“사… 슴?
엘바의 말에 메아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왕도에서 사슴 사냥이라니?”
엘바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달랐다. 카일이 말한 사슴의 정체를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슴가면…!”
* * *
작전명 사슴 사냥!
헬레나, 아니, 베아트리의 전언에 따르면 왕실의 고위 인사가 카일을 주시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이미 피라네시아 장원의 전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암막 뒤에 숨어 카일과 장원을 주시하고 있다는 건 카일에게 바라거나 노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암막 뒤에 숨은 자가 정당한 방법으로 협상이나 제안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상대가 대비하기 전 상대를 암막에서 끄집어내 협상을 하거나 미리 제거하는게 유리하다 판단하고 과감하게 움직인 것이다.
“카일, 괜찮은 거냐?”
잔뜩 굳어 있는 카일을 향해 보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휴…. 죄송해요. 오늘따라 감정조절이 쉽지 않네요.”
“아니, 아니다. 갑자기 연이어 일이 터졌으니 그럴 수도 있지.”
보일이 손을 저었다.
“지난번 영지민 이주에 관한 일도 그렇고, 아버지께 그래선 안 됐는데… 죄송해요.”
“아니다. 지난번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앞뒤 일도 따지지 못하고 일만 벌였다. 미안하구나.”
보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서로 잘못한 걸로 하고 그때 일은 잊기로 해요. 아셨죠.”
“하하! 그래, 지난 일은 그만 잊기로 하자!”
보일이 유쾌하게 웃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죠.”
“응?”
구름 위로 넓은 창공을 바라보고 있는 보일을 향해 카일이 물었다.
“무슨… 말이냐?”
“왕도까지 함께 가자고 하셨잖아요. 그것도 레토아를 함께 타고요.”
“아! 하하, 눈치를 챘구나.”
“지금쯤이면 회의에 대한 결론이 났을 거라 생각거든요.”
“녀석, 확실히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맞다. 대회의는 끝났다. 결론도 났고.”
“그렇군요.”
“그렇군요? 넌 널 빼놓고 벌인 회의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느냐?”
얼굴을 찌푸린 보일의 말에 카일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묻지 않아도 말해주실 거잖아요.”
“뭐?”
“그걸 알려주시려 와이번도 함께 타고 가시는 거잖아요. 굳이 묻지 않아도 알려주실 텐데, 제가 궁금해할 필요가 있나요.”
카일의 당연하단 표정에 보일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이 녀석! 아비를 놀리는 거냐!”
“하하! 죄송해요.”
조금 전과는 달리 카일이 크게 웃으며 손을 가로젓자 보일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어렸다.
“그래. 회의는 끝났고 결론도 났다. 처음 마을 대회의가 시작되고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고성이 오가기도하고, 때론 서로를 설득하기도 했지만, 양측으로 갈라진 입장은 결국 좁히지 못했다.”
“그럼 결론이 나지 않은 거잖아요.”
“결론이 꼭 하나일 필요가 있느냐. 너도 서로 다른 두 개의 검술을 합치지 못한 것과 똑같은 것이란다.”
“…두 개의 결론이라…. 알겠어요. 일단 결론이 났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회의를 하신 거예요?”
보일이 카일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자경단의 주인에 대한 문제다. 물론 여기엔 이주한 마을 사람들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주인…? 그럼……!”
“그래. 널 자경단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였다. 대다수의 자경단과 마을 사람들이 널 주인으로 받아들였지만 3분의 1 정도는 거부했고, 간격도 좁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기로 했다.”
“떠나요? 무슨 말이에요. 여기서 어디로 떠난단 말이죠?”
“와이번을 타고 사냥을 하며 보아둔 곳이 있다. 넓은 평원에 수원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외부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형도 유리한 곳이다. 아비가 그들을 이끌고 그곳에 제2의 샤론 마을을 만들 생각이다.”
“아, 아버지가요? 왜요. 갑자기 떠나다니 무슨 말이세요.”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나다. 그러니 내가 책임을 져야지.”
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좋게 생각하면 된다. 에바크 산맥 안쪽에 개척마을을 만드는 거다. 여전히 피라네시아 장원 소속이다. 그저 좀 거리를 두는 것뿐이야!”
“설마… 저 때문인가요? 제가 자경단을 장악할 수 있도록… 아버지가 떠나는 건가요?”
‘역시 쓸데없이 눈치만 빨러선….’
보일이 마음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보일이 있으면 카일은 완벽하게 자경단을 장악할 수 없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경단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일의 손에 길러진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난 대부분의 인생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숲에서 살았다. 이런 화려한 장원 생활이 내게 맞지 않아 떠나는 거다. 그렇다고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니다. 와이번만 있으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거리니 수시로 왕래할 거다.”
“하지만….”
“하하! 걱정 말거라. 오지 말라고 말려도 자주 찾아와 위스키를 축낼 테니, 내쫓지나 말거라!”
장난스럽게 말하며 카일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보일이 카일을 꼭 끌어안았다.
“넌 이미 훌륭하게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 아비는 믿는다.”
“아버지….”
* * *
쿵쿵-
이른 새벽, 정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깬 버먼이 급히 겉옷을 걸치고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집사님!”
늦은 새벽까지 숙직을 서고 있던 아드가 커다란 몽둥이를 가슴에 안고 버먼을 향해 달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 일인가?”
“밖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로브라면…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자들인가? 저택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수상한 자들 말이야!”
버먼이 근심 어린 신음을 삼키며 잔뜩 굳은 얼굴로 두꺼운 커튼을 살며시 열어 창밖을 바라봤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확히 알 수가 없던데… 어떡합니까? 저렇게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어쩌긴요. 뭘 어째요. 손님이 왔으니 당연히 누군지 확인하고, 손님이면 문을 열어주고 아니면 돌려보내야죠.”
계단을 내려온 하녀장 브리엔이 버먼과 아드를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아이고, 하녀장님! 문을 열어주다니요. 가뜩이나 수상한 자들이 집안을 살피고 있는데, 위험한 자들이면 어떡합니까?”
“그래, 브리엔.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곧 날이 밝을 테니 그때….”
버먼의 한심한 말에 브리엔이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나무라듯 말했다.
“사내들이 겁은 많아서! 저들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굳이 문을 두드리며 소란을 피웠겠어요? 벌써 담을 넘었지!”
“그건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않나. 아가씨도 돌아오지 않고 계신데 저택에 일이라도 생기면….”
“그렇다고 이렇게 겁을 먹고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럴수록 더 당당해야죠! 여긴 대 그리미엄 가문의 영애, 베아트리 아가씨의 타운 하우스예요. 두 사람의 이런 행동이 아가씨의 명예를 얼마나 실추시키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 사람들, 사라진 아가씨 소식이라도 가져온 거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잔뜩 화가 난 브리엔이 버먼과 아드를 밀어내더니 직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봐! 위험하다니까!”
“집사장님,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당장 쫓아가야지!”
버먼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아드를 밀어내며 브리엔의 뒤를 쫓아 밖으로 나왔다.
“이 사람아! 그렇게 대책 없이 막 달려 나가면 어쩌나!”
“집사님이 나가지 않는데 어째요. 저라도 나가서 손님을 맞아야지!”
하녀장 브리엔이 짐짓 강한 척 소리쳤지만, 그녀 역시 겁을 잔뜩 먹은 듯 얼굴이 더없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면서 가긴 어딜 간다는 겐가? 있어 보게, 네가 갈 테니.”
“집사님!”
아드가 집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자넨 하녀장과 함께 있게.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버먼이 아드에게 브리엔을 맡기더니,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 여긴 대 그리미엄 가문의 저택입니다. 어떻게 오신 분들입니까?”
자꾸 굽혀지는 허리를 억지로 세우며 대문 쪽으로 걸어갔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집사가 대문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짐짓 당당하게 물었지만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집사장님, 접니다.”
“저, 저라니… 누구……?”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버먼이 조심스럽게 대문 쪽으로 다가가자, 가장 선두에선 사내가 깊게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