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91화 (391/404)

외전 - 125. 사슴 사냥1

‘큰일 났다.’

윌리스가 처음 느낀 감정이다. 평생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던 베아트리 영애가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 있지만, 그보다는 날카롭게 빛나는 눈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이 윌리스의 마음을 무너트리고 그를 굴복시켰다.

“송구합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윌리스와 기사들은 주군을 대하듯 카일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기사 중 누구 하나 자신의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어나라. 어떻게 된 일인지 듣겠다.”

카일이 냉정하게 돌아서자 윌리스와 기사들이 뒤를 쫓았다.

“잠시만요!”

헬레나가 급히 멀어져가는 카일에게 다가가자, 기사들이 황급히 헬레나의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일이 기사들을 밀어내며 다가왔다.

“저도 함께 갈게요.”

“아가씨!”

유모인 메아린이 황급히 달려와 헬레나의 팔을 잡았고, 기사 도테트도 황급히 달려왔다.

“언니, 언니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요.”

“아가씨께서 말입니까?”

“네! 그리고…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헬레나가 돌돌 말린 피 묻은 양피지를 내밀었다.

“이건….”

“필 테일 영지와 남작위에 대한 왕실의 공식 승인서예요. 이걸 남작님께 전해달라는 언니의 부탁이 있었어요.”

헬레나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베아트리 영애가 영지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고, 중상을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작님께서 자책하시면 언니의 마음도 불편할 거예요.”

헬레나의 말에 카일이 두 장의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녜요. 어찌 보면 이번에도 남작님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거나 마찬가지 인걸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헬레나가 두 손으로 치마를 살짝 올리며 무릎을 굽혀 예법에 맞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아가씨께서 전해달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언제까지 영애를 복도에 세워둘 건가요?”

유모인 메아린이 헬레나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헬레나는 이제 그리미엄 자작가를 이끌어갈 가주였다. 카일이 남작위에 올랐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헬레나 영애를 복도에 세워 놓는 건 그녀를 무시하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모…!”

당황한 헬레나가 메아린을 말렸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영애께선 곧 작위를 물려받으실 분이에요. 이런 식의 대우는 영애뿐 아니라 자작가를 무시하는 태도예요.”

“하, 하지만!”

핼레나가 안절부절 못하며 메아린의 팔을 잡았지만, 그녀로서도 메아린을 말릴 수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 중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경황 중이라 미쳐 영애를 모시는 데 소홀히 했습니다.”

카일이 헬레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비터가 걱정 말라는 듯 손짓을 보내며 급히 하녀들을 찾아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저택 내부는 베아트리가 전담으로 관리했기에, 당장 비어있는 방을 확인하려면 항시 저택 내부를 청소하는 하녀들에게 알아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거처는 곧 준비될 겁니다. 그동안 동안 잠시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무, 물론이에요.”

혹시나 유모인 메아린이 거절하진 않을까 헬레나가 다급히 대답하며 카일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럼….”

카일이 조금 앞서 걸어가자 메아리의 시선을 피해 헬레나가 다급히 카일의 뒤를 쫓았다.

“아주 연기가 좋군.”

도테트가 멀어져가는 헬레나를 바라보고 있는 메아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일부러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준 거 아니요?”

얼굴을 찌푸린 메아린이 잠시 도테트를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으니 부정하진 않겠어요.”

“왜 갑자기 바뀐 거요. 아가씨께서 카일… 아니, 아니지. 이젠 필 테일 남작이라 불러야겠군. 아무튼 남작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진작 알지 않았습니까? 유모의 반대에 지금껏 남작을 찾아오지 못한 것 아니요.”

“아주 잘 아시는군요.”

“그야… 영애의 한탄을 들어준 게 바로 나 아니겠소. 그러니 잘 알지.”

도테트가 메아린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흥!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걸요.”

“상황?”

“당시엔 그저 실력이 조금 있는 용병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작위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예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전부가 아니다?”

“보셨지만, 그는 이미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들은, 베아트리 영애의….”

“조금 전의 일도 그래요. 윌리스란 기사와 기사들의 모습. 기사가 아닌 저도 알고 있는 걸 도테트 경이 정말 못 본 건가요?”

메아린의 물음에 도테트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굉장했소, 멀리 떨어진 나 역시도 무릎을 꿇을 뻔했지, 유모의 말대로 이제 저들은 남작의 말만 따를 거요. 거기다 그들이 가진 강력한 마법 무구까지 생각하면 확실히 대단한 기사단이지.”

“그리고 어쩌면 남작은 단순한 용병이 아닐지 몰라요.”

“무슨 소리요?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니?”

“혹시 보셨나요? 남작의 손에 끼워져 있는 인장 반지요.”

“인장 반지라면… 필 테일 영지의…?”

“아니, 아니에요. 흰 제비꽃에 망치가 새겨진 인장 반지! 떠오르는 것이 없나요? 이곳과 관련이 아주 깊은….”

메아린의 말에 도테트 경이 눈을 크게 떴다.

“기억나셨나요?”

“설마! 네오트 남작가!”

“맞아요. 사라진 전설의 남작가, 피라네시아 평원의 주인, 네오트 남작가의 인장 반지죠. 만약 남작이 네오트 가문의 후계자라면,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 역시도 설명이 되죠.”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허허! 설마 남작이 전설이 된 가문의 후계자였다니… 맞아! 듣기론 네오트 남작가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거구라고 했네, 그래서 검 대신 망치를 검처럼 휘둘렀다고 했었지. 무기가 바뀌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용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강한 검술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역시!”

도테트는 메아린의 설명에 카일이 네오트 가의 후계자란 사실을 확신했다.

“남작은 정통귀족일 뿐 아니라… 아주 부자잖아요. 아가씨의 짝으론 부족함이 없죠.”

유모의 갑작스러운 말에 도테트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봤다.

“왜요?”

“유모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 몰랐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자작가를 복구하려면 엄청난 골드가 필요하잖아요. 그걸 감당할 만큼 재력을 가진 젊은 귀족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에겐 베아트리 아가씨가 있지 않소. 안타깝게도 아가씨께서 소생하지 못한다면 모르겠지만….”

“흥! 아직 두 사람이 혼인을 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설마 훼방을 놓겠다는 거요? 그러기엔… 사실 영애께서 목숨을 구한 건 아가씨께서 몸을 던져 막아주신 덕분인데….”

도테트의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힌 메아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훼방을 놓겠다고 했나요. 경쟁, 맞아요. 선의에 경쟁을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정 안되면… 포세린 가문을 따르는 방법도 있고….”

“포세린 가문이면… 아!”

도테트가 감탄한 얼굴로 메아린을 바라보았다. 설마 유모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전 영애께서 가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돈 많은 늙은 귀족에게 시집가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요.”

“아무렴 늙은 귀족을 들이밀기야… 적당히 나이를 먹고 돈 많은….”

“뭐라고요!”

메아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도테트를 쏘아보자, 화들짝 놀란 도테트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안 되지. 아무렴 우리 아름다운 아가씨를 늙은 귀족에게! 걱정마시오, 그런 말을 하는 놈이 있다면 당장 이 검으로….”

“흥!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도 마세요.”

메아린이 화가 난 듯 도테트를 외면하며 걸어가 버렸다.

“지키지 못하다니! 무슨 말이오. 난 아가씨의 호위 기사란 말이오.”

깜짝 놀란 도테트가 황급히 메이린의 뒤를 쫓으며 그녀를 달랬다.

* * *

“사슴… 가면?”

“맞아요. 분명 사슴 가면이라고, 그녀가 언니에게 서둘러 왕도를 떠나라고 했어요.”

“아가씨가 와이번 오너라는 사실도 알았단 말이죠.”

“그래요. 명백하게 알아봤다고 했어요. 왕실과 귀족원의 관리들이 쩔쩔매는 모습이, 신분 높은 왕실의 여인이 분명하다고 했어요.”

“저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다고요. 흠…….”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카일을 헬레나가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굵은 눈썹에 큰 눈, 뭉툭한 코. 결코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얼굴이지만, 오랫동안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물론 그때의 앳된 얼굴은 사라졌지만, 그래서 더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 안 돼. 그는 언니의 남자야!’

급히 고개를 흔들어 감정을 억누른 헬레나가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한 쌍의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헬레나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전 …괘, 괜찮아….”

당황해서 떨리는 헬레나의 음성에 역시 당황한 카일이 급히 손등을 헬레나의 이마 위로 가져갔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헬레나의 이마를 스쳤다.

“이런… 미열이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장시간 비행도 무리였을 텐데,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거처가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아, 아녜요. 전…!”

헬레나가 급히 카일을 붙잡으려 했지만, 카일은 이미 응접실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괜찮은데….”

헬레나가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남은 이마를 매만지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니… 뭐가요?”

“앗!”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당황한 헬레나가 급히 물러나다 벽면 한쪽에 세워둔 커다란 도자기와 부딪혔다.

“조심하세요!”

메아린이 급히 손목을 잡아 겨우 넘어지려는 헬레나를 붙잡았다.

“휴… 다행이다. 조심하셔야죠. 이러다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항상 말씀드렸죠. 주변을 살피라고 말입니다.”

“그건… 유모가 갑자기 나타나 놀란 것뿐이라고.”

헬레나가 투덜거리며 메아린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응접실엔 갑자기 왜 들어온 거야? 남작님께서는?”

“아! 깜빡했군요. 아가씨, 어디가 안 좋으세요?”

“응? 무슨 소리야?”

“남작님께서 아가씨께 미열이 있다면 급히 부르셨어요.”

“남… 남작님께서?”

조금 전 느꼈던 차가운 손길에 다시 떠올랐는지, 헬레나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메아린이 급히 헬레나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난 괜찮아. 유모.”

“괜찮기는요. 정말 미열이 있는데…. 아무래도 장시간 찬바람을 맞아 감기에 걸린 게 분명해요.”

메아린이 급히 헬레나를 일으켰다.

똑똑-

그때, 노크 소라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리며 어린 하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장원에 계실 동안 영애를 모실 엘바라고 합니다.”

엘바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절 따라오시면 방을 안내해 드릴게요.”

엘바의 말에 메아린이 환하게 웃으며 헬레나의 손을 잡았다.

“어서 가요.”

메아린의 재촉에 마지못해 일어난 헬레나가 응접실 밖에서 대기 중인 도테트 경과 함께 하녀 엘바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이곳이에요.”

엘바가 멈춰 선 곳은 2층 동쪽 끝방으로, 베아트리 영애의 방과는 반대쪽에 위치해 있었다.

“여긴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이에요. 아마 들어가 보시면 깜짝 놀랄 거랍니다.”

엘바가 귀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사실 헬레나와 메아린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그녀들은 왕도의 여러 귀족가의 아름다운 방과 왕국 최고의 가문인 트라발트 공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도 보았기에 엘바의 말에 큰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그녀들의 생각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세, 세상에…!”

방안으로 들어선 메아린과 헬레나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금껏 수많은 귀족가를 방문했지만 이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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