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87화 (387/404)

외전 - 121. 사슴가면(2)

“윌리스 경!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는 즉시 왕도를 벗어날 겁니다.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윌리스가 급히 마차로 달려가자 베아트리가 고개를 돌려 멍한 얼굴로 서 있는 헬레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헬레나, 정신 차려!”

“언니…!”

“넌 이제 그리미엄 자작가의 주인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히 있을 거야!”

“하지만… 난, 난 아무것도….”

헬레나의 얼굴에 또다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가씨!”

멀리서 유모인 메아린이 달려와 헬레나를 빼앗듯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가서는 베아트리를 경계하듯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베아트리가 도테트를 돌아봤다.

“도테트 경, 이야기는 들었겠죠?”

“네! 아가씨.”

“상황이 좋지 않아요. 서둘러 왕도를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해요. 늦으면 우리 모두 왕도에서 죽을 수도 있어요.”

“아가씨가 위험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야기는 돌아가면서 하죠.”

베아트리는 단호하게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아가씨, 이제 어쩌실 겁니까?”

“최대한 빨리 왕도를 빠져나가야죠. 윌리스는 만약을 대비해 주세요. 어쩌면 돌아가는 중 공격이 있을지도 몰라요.”

“걱정 마십시오.”

고개를 숙인 윌리스와 호위 기사가 서둘러 말에 올랐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여러 귀족 영애의 전담 하녀들과 오랜만에 뜻깊은 대화를 나누던 에슈는 갑작스럽게 끝나버린 파티와 다급하게 돌아가는 귀족들을 보며 황급히 달려왔다.

“난 괜찮아!”

베아트리가 고개를 돌려 막 마차 안으로 들어선 헬레나와 유모 메아린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왜 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왕도를 떠나려는 거예요? 단순히 자작가의 일 때문만은 아니죠?”

메아린이 날카롭게 베아트리 영애를 쏘아보며 물었다.

“휴…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헬레나도 알아야겠죠.”

베아트리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왕도에 돌아온 건 전몰 귀족들의 영지와 남작 이하의 계승 작위에 대한 경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영지… 경매?”

메아린의 놀란 표정에도 베아트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작위를 계승 받지 못한 귀족들과 영주가 되고 싶은 귀족들이 모여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경매죠. 이번 승전 파티도 영지와 작위 경매를 위해 귀족들이 왕성으로 정당하게 들어올 수 있게 개최한 파티예요.”

“영애께서 직접 영지를 매입하기 위해 참석하셨단 말인가요.”

“…저와 관련된 일이니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할 거예요.”

메아린이 놀란 얼굴로 베아트리를 바라보았다. 헬레나에게서 베아트리가 그리미엄 자작가를 포기했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솔직히 메아린은 믿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헬레나를 죽이려 했던 베아트리가 갑자기 자작가를 포기했다는 말을 선뜩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지 경매에 참석해 작위와 영지를 매입하려 했다는 베아트리의 말에 메아린은 그녀가 자작위에 미련을 버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위에 미련이 남았다면 굳이 경매에 참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의문이 모두 풀린 건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둘러 왕도를 떠나야 하는 이유가 영지 경매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영지 경매 중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갑자기 상당수 귀족들이 어떤 소식을 듣고는 영지 경매를 대거 포기했거든요. 전 경매가 끝난 후에야 그리미엄 자작의 공격을 들었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메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둘만 사라져 준다면 자작가의 영지가 경매장에 올라올 수 있다는 말이 되겠죠.”

베아트리가 메아린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헬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한가요? 분명 남작 이하의 작위만 경매에 오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잊었나 본데, 현재의 그리미엄 자작가는 영지 전을 통해 지금의 영지를 만들었죠. 영지가 통합되었다면 반대로 분할도 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지금… 영지를 쪼개서….”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작위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죠.”

“그, 그럼 이대로 있을 게 아니라… 공녀, 공녀께 도움을 청하면 되잖아요. 그분이라면 분명… 아가씨를….”

“소용없어요. 공녀는 우릴 도와주지 않아요.”

베아트리의 싸늘한 목소리에 메아린이 겁에 질린 얼굴로 헬레나를 꼭 끌어안았다.

“무슨 말씀이죠?”

“공녀는 자작가가 무너진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게… 무슨!”

“공작가의 정보력은 왕실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해요. 더구나 그리미엄 자작가는 왕도에 비하면 공작령과 훨씬 가깝죠. 과연 공녀가 자작가의 일을 몰랐을까요? 아니, 제 생각은 달라요. 공작과 공녀는 자작가로 돌아가는 헬레나를 일부러 붙잡은 거예요. 자작가의 일을 알게 되면 헬레나가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할 사람은….”

“외할아버지일 테니까요.”

베아트리가 눈을 닦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헬레나를 향해 끄덕였다. 바르칼은 상급 엑스퍼트다. 바르칼과 용병들이 적극적으로 헬레나의 옆에서 보호한다면 사실상 암살은 불가능했다.

“맞아! 공녀가 널 왕도로 데려오면서 오히려 널 위험에 빠뜨렸어! 그런 공녀가 널 보호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래서… 제 안전이 아닌 목숨을 책임지라고 한 건가요? 공녀에게?”

“맹세를 한다면 공녀는 공작가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함부로 널 죽이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공작 때문에 실패했군요.”

헬레나의 말에 베아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

마차 밖에서 윌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꼬리가 붙었습니다.”

“…떨칠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마차를 타고는 어렵습니다.”

“결국 왕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군요.”

“지금으로선….”

“좋아요. 이대로 곧장 왕성을 벗어나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붕에 저격수 하나를 배치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윌리스가 고개를 숙이며 마차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마차 위로 기사 하나가 올라서더니 곧 ‘탕’ 소리를 신호로 동시다발적인 총성과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정을 넘어서면서 길가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잡아! 녀석들이 도성을 빠져나가게 해선 안 돼!”

지붕 위에 올라선 검은 복면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마차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을 돌파하고 마차로 접근한 복면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낮은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날아드는 보이지 않는 공격에 복면인들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흠… 역시 대단하지?”

“누구냐!”

갑작스런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복면인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슴 가면을 쓴 여인이 하늘 위에 둥실 떠 있었다.

“마법사!”

“맞아!”

여인이 손을 흔들자 복면 사내가 다급히 단검을 뽑아 던지려 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커억-”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곤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을 바라보았다.

“언제….”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얼굴 전체를 가린 검은 복면인의 모습이 보였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복면인을 힐끔 바라보던 사슴 가면 여인이 죽은 사내의 옷에 핏물을 닦고 있던 또 다른 검은 복면 사내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작정 죽이면 어떡해! 물어볼 게 있었단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럼 다른 녀석을 잡아 오겠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사내가 일어났다.

“됐어! 그보다 확인은?”

“파워가 좀 약하긴 하지만 흔적 자체는 동일합니다.”

“원본이 아니라 복제품이란 말인데… 어쨌든 내 생각이 맞았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사슴 가면 여인이 멀어져가는 총성을 들으며 사내를 돌아봤다.

“보내줘!”

“사로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흥! 누구 좋으라고!”

“성문을… 열어주란 말씀입니까?”

“그래! 붙잡지 말고 보내줘! 아마도 크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나머지 추격자들은 알아서 정리하고!”

“알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곤 지붕 아래로 뛰어내리며 낮은 피리를 불자 사내와 비슷한 모습의 복면인들이 그늘 속에서 뛰쳐나왔다.

“컥-”

“습격-”

“아악-”

마차를 추적하던 복면인들은 사방에서 뛰쳐나온 검은 복면인들에게 쓰러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세상에!”

계곡을 막기 위해 무너트리며 생긴 넓은 대지 위로 수많은 통나무집이 건설되고 있었다. 최소 수백 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살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건물이건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산 중턱 여기저기에서도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이미 카일이 손을 쓰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게 대체…!”

“카… 일!”

멍하니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카일을 향해 무트와 테일이 달려왔다.

“카일… 여긴,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냐니!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게 말 한마디 없이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카일이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자 무트와 테일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니… 난 반대했다. 정말이야!”

“맞아! 우린 반대했다고, 너와 상의 하자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대장과 캐츠가….”

“캐츠?”

“그래! 이번 일은 전적으로 캐츠가 먼저 일을 벌인 것이란 말이야! 물론 캐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만….”

“맞아! 다핸 남작이 참전을 선언하면서 영지의 세금이 엄청 높아져서 샤론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거든. 우리가 있을 때와는 완전 달라졌단 말이야!”

“그렇다고 영지민을 빼 오면 어찌합니까? 저희가 계획한 건 샤론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거지 영지 전체를 옮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초기 계획은 샤론 마을 사람들을 빼돌린 뒤 오크의 침입으로 위장해 마을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자경 단원들이 떠났고 일부 마을 사람들도 다른 마을로 이주했기에 그쯤은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지만….”

“더구나 이주에 와이번까지 사용했다고 하던데, 이게 밝혀지면 어쩔 생각입니까? 당장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장원은 물론 지금 유입되고 있는 유민들까지 문제가 될 겁니다.”

“아니, 난… 그냥….”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 겁니까?”

“아… 그게.”

끼아악-

그때였다. 하늘을 위로 거대한 붉은 와이번과 함께 세 마리의 골드 와이번이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씩 매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바구니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러자 바구니 안에서 노인들과 아이들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휴… 저걸 저렇게 쓰다니!”

보일은 지금 도자기 운송하기 위해 만든 바구니로 사람들을 옮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은 와이번을 아공간으로 되돌리고 마을로 내려선 보일을 향해 다가갔다.

“아주 즐거워 보이십니다.”

“응?”

바구니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카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린 보일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어, 언제 온 거냐?”

“조금 전에 왔습니다. 아주 큰 사고를 치셨군요.”

“…그게 말이다.”

“영지민은 영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런 영지민을 데려왔습니다. 이게 어떤 뜻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귀족은 물론 왕실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토벌대가 장원으로 밀어닥칠지도 모르겠군요.”

잔뜩 굳은 카일의 목소리가 점점 사나워지자 보다 못한 매튜와 필론이 다가왔다.

“카일! 너도 다핸 남작가의 상황을 목격했다면 참지 못했을 거다. 우리가 영지를 떠난 후 상황이 정말 안 좋았다.”

“그래, 대장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한 거다.”

매튜와 필론이 보일을 옹호하려는 듯 다가오자 카일의 몸에서 일어난 막강한 기운이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커억-”

“억-”

매튜와 필론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강력한 압박감에 놀라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다핸 남작령의 영지민만 보이는 겁니까? 피라네시아 평원에 이제 막 정착한 수천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겁니까?”

“커억-”

잠시 잠깐이었지만 거대한 압력에서 벗어난 매튜와 필론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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