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86화 (386/404)

외전 - 120. 사슴가면(1)

“아가씨?”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무슨 일 때문인지 경이 알아봐 주세요.”

“그럼 아가씨께선….?”

“전 경매를 끝내야죠. 아마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대거 빠져나갔으니 막강한 경쟁자 대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윌리스가 황급히 밖으로 달려간 사이 경매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사슴 가면을 쓴 누군가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다 다시 돌아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경매가 지체되어 송구합니다. 그럼 필 테론 남작령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가는 2천 골드입니다.”

일반적인 시작가와는 달리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다. 남아 있던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리며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도 시작가를 높이 불러 경매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2천 골드.”

베아트리가 팻말을 들어 올리자 소란스럽던 풍요의 방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뭘 하는 거죠?”

멍하니 팻말을 바라보던 경매사를 향해 베아트리가 싸늘하게 묻자, 깜짝 놀란 경매사가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2천 골드 나왔습니다. 다른 분 없습니까?”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경쟁자들이 사라진 이상 베아트리는 가볍게 필테일 영지를 낙찰받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필테일 영지를 낙찰받기 위해 열성적이었던 귀족들이 한순간 돌아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위를 받으실 분이 카일 님 맞습니까?”

“맞아요. 크로먼 백작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크로먼 백작령…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경매사가 귀족원에서 나온 행정관에게 알리자 곧 행정관이 다가와 서류 하나를 가져왔다.

“피라네시아 장원의 주인이군요. 자유민 출신에 반년 전 작위를 받았군요.”

경매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슴 가면을 쓴 누군가에게 서류를 넘겼다.

“영애, 카일 경과는 어떤 사이죠?”

가면 속에서 들려온 뜻밖의 맑은 목소리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베아트리는 곧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래 줬으면 좋겠군요. 그래야 좀 더 쉽게 행정처리가 이루어질 것 같거든요.”

사슴 가면의 말에 베아트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귀족원의 행정처리란 상황에 따라 빨리 끝날 수도, 때론 몇 년간 시간을 질질 끌며 늦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행정관에게 뇌물을 쓰는 귀족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왕실이 직접 나선 경우엔 상황이 다르다. 비공식적인 영지 경매를 통한 전비 확보가 목적인 왕실로선 행정적인 문제로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그건… 월권 아닌가요?”

“상대가 용병 출신이라면 상황에 따라선 트집거리가 되기도 하니까요.”

베아트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대답을 해주면… 어떻게 되나요.”

“제 직권으로 이 자리에서 바로 승인을 내려주죠.”

사슴 가면 여인의 말에 베아트리는 그녀의 신분이 생각보다 높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제… 정혼자예요.”

“정혼자? 정통귀족인 그대와 용병이 정혼을 했단 말인가요?”

“집안 사이의 문제랍니다. 그런 것까지 대답할 의무는 없을 것 같군요.”

“…그건, 그렇군요.”

“그럼 이제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잠시 베아트리를 바라보던 사슴 가면 여인이 귀족원에서 나온 행정병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행정관이 재빨리 다가와 미리 준비해둔 돌돌 말린 서류 두 장을 베아트리에게 내밀었다.

“승인은… 이미 떨어졌었군요.”

“물론이죠. 이런 일은 작은 빌미도 없이 깨끗하게 처리해야 하거든요. 시간을 끌어선 왕실로서도 좋을 것이 없죠.”

사슴 가면 여인의 말에 베아트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행정관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필테일 가문의 후계자임을 증명하는 왕실의 공식 서류입니다. 이건 작위를 계승 받아 남작 위에 올랐다는 서류입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행정관이 뒤로 물러나자 사슴 가면 여인이 베아트리에게 다가왔다.

“대답에 대한 답례로 충고 하나만 하죠. 이 길로 곧장 왕도를 벗어나 카일에게로 돌아가세요.”

“네?”

베아트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사슴 가면 여인을 돌아봤지만, 그녀는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 뿐이었다.

“아름다운 토파즈 목걸이가 있으니 돌아가는 길이 위험하진 않겠군요.”

사슴 가면 여인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서자 베아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맹약석의 존재를 알아… 봤어!’

베아트리의 맹약석은 고투가 특별히 세공해 만든 맹약석이다. 마법진을 안으로 감추고 겉으로 드러난 와이번의 형상은 오히려 부각해 겉보기엔 와이번이 세공된 여느 보석 목걸이와 다를 것 없이 보이건만, 사슴 가면 여인은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사슴 가면 여인을 돌아본 베아트리가 서둘러 풍요의 방을 벗어났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가씨!”

베아트리를 향해 윌리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알아봤나요?”

“…그게!”

“무슨 일이죠?”

“…!”

“어서요!”

베아트리의 재촉에 윌리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 그리미엄 자작령이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과 수백의 기병대가 연합한 공격으로 농지 대부분이 불에 탔고… 영주성 또한…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인가요! 자작가가 공격을 받다니… 자작가는 국경과 한참이나 떨어진 중부에 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

베아트리의 머릿속에 장원을 떠나기 며칠 전 도착했던 샤론 마을의 자경단원들이 떠올랐다.

“포윅 숲!”

베아트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자경단이 만났다던 바런트 왕국의 수백 기병대. 그저 흘려들었던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요? 영주성이 무너졌어도 살아남은 사람은 있을 것 아닌가요?”

베아트리의 물음에 윌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놈들은 무너진 성을 포위하곤 철저하게 파괴했다고 합니다. 그리미엄 자작가과 대평원을 불태운 건 아마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전선과 가장 가까운 대평원의 곡식들이 전선으로 공급될 테니 그걸 막으려는 거겠죠.”

“네! 아가씨의 생각대로입니다. 공작이 왕성에 급히 온 것도 왕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란 말이 나오더군요.”

“트라발트 공작!”

윌리스의 말에 베아트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어떤 작은 의혹이 풀리며 조금 전 사슴 가면 여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왕도를 떠나라! 사슴 가면의 말도… 귀족들이 경매를 포기한 이유도 바로 그리미엄 자작가가 공격받았기 때문이야!”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헬레나! 헬레나는 어디 있나요?”

“지금 공녀와 함께 있습니다. 그분도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왕도를 떠나야 해요. 이곳에 있다간 다 죽을 거예요.”

“네?”

베아트리가 윌리스의 의문을 뒤로 하고 당장 헬레나를 찾아 서둘러 전쟁의 방으로 달려갔다.

“헬레나!”

“…언니!”

의자에 앉아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베아트리가 황급히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서둘러 왕도를 떠나야 해!”

“언니, 가문이… 가문이…!”

“알아! 하지만 이렇게 있어선 안 돼! 어서 여길 떠나야 해!”

베아트리가 자신을 붙잡고 또다시 눈물을 쏟아내는 헬레나를 일으킨 뒤 그녀를 데려가려 하자 공녀가 다가와 그녀의 앞을 막았다.

“공녀!”

베아트리가 잠시 앞을 막아선 공녀를 노려보다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베아트리 영애라고 했나요? 아마도 죽은 전대 소영주의 딸이라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송구하지만 가문에 급작스런 일이 생겨 헬레나와 함께 영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베아트리의 말에도 공녀는 여전히 베아트리의 앞을 막아선 채 헬레나를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작가로 돌아간다고 어린 소녀에 불과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보단 저와 왕도에서 안전하게 함께 있는 게 헬레나에겐 더 좋을 것 같군요. 자작가의 일은 아버지께 말씀드려 해결하도록 하죠.”

공녀가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헬레나를 공녀께서 데려가겠단 말씀입니까?”

“그대보단 제가 차기 자작이 될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나요?”

공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변에 둘러싼 귀족들과 영애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요. 아무래도 영지를 복구하려면 많은 자금과 사람이 필요할 테니 헬레나 영애에도 공녀의 도움이 더 절실하겠죠.”

“맞아요. 두 사람은 서로 경쟁자잖아요. 솔직히 헬레나 영애만 없다면 차기 자작위는 베아트리 영애의 것 아닌가요.”

“확실히… 헬레나 영에의 입장에선 그녀에게 보호를 받는 것보단 공녀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안전하긴 할 거예요.”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과 영애들의 목소리에 공녀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여론이 공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헬레나 역시 갑작스런 베아트리의 다급한 모습에 의혹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아트리는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휴… 좋아요. 그럼 공녀를 믿고 저 혼자 돌아가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그녀는 제가 잘 돌보죠.”

공녀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영애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대신 공녀께서 헬레나의 목숨을 책임져 주세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공녀께서 헬레나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맹세를 해 주세요. 공녀의 명예를 걸고.”

“그건…!”

그저 안전을 책임지는 것과 목숨을 책임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안전이야 그에 대한 확약을 하더라도 여러 사정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지만, 목숨을 책임진다는 건 어떤 사정으로라도 헬레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공녀 스스로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니 공작가나 공녀에게 큰 부담이 되는 행위였다.

“조금 전 공녀께서 그녀를 돕겠다고 하셨잖아요. 공녀의 다짐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듣고 싶은 것뿐 다른 의미는 없답니다. 확약만 해주신다면 전 이대로 왕도를 떠나겠습니다.”

베아트리가 담담하게 공녀를 바라보며 말하자 귀족들과 영애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녀에게로 향했다. 목숨에 대한 책임이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상대는 트라발트 공작가의 영애다. 공작가의 영향력과 힘으로 어린 영애의 목숨 하나 책임지지 못 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공녀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귀족들의 시선에 작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 녀?”

헬레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공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당당했던 공녀의 당황한 모습이 헬레나에겐 낯선 모습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과 관련된 일에서 말이다.

“허허! 이곳에 있었구나!”

그때 파티장으로 잘생긴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공작 전하!”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귀족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던 공녀가 밝아진 얼굴로 황급히 공작에게 다가갔다.

“일은 끝나셨어요?”

“일은 무슨 그저 전하와 잠시 담소를 나눈 것뿐이란다. 헌데 무슨 일로 다들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인가?”

“그건….”

공녀가 베아트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금 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허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헬레나를 위로한 공작이 공녀를 엄하게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아무리 우애가 깊다고는 하나 공녀라 해도 한 가문의 일에 함부로 나서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번 일은 엄연히 그리미엄 자작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 외부에서 끼어들 일이 아니다.”

공작은 이번 일을 단번에 그저 깊은 우애에서 비롯된 일로 치부하며 그리미엄 자작가의 일에서 발을 빼버렸다.

“하… 하지만! 아버지….”

공녀가 공작을 향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헬레나와 베아트리를 돌아보았다.

“오늘 승전 파티는 끝났으니 이만 돌아들 가보게. 영지의 일 또한 잘 마무리되길 바라지. 혹! 어려움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청하게. 적극적으로 도울 테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아트리는 급히 예를 취하며 헬레나를 이끌고 파티장으로 벗어났다.

“아버지! 헬레나는….”

공녀의 말에 공작이 손을 들어 막았다.

“성급하게 나섰다간 오해만 살뿐이다. 차라리 지금 저 둘을 처리하는 것이 더 확실할 수 있지.”

“그럼 직접….”

“하하! 네가 아니라도 나설 사람들은 많단다.”

“네?”

공녀가 의아한 듯 공작을 바라보았지만, 공작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멀어져가는 베아트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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