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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385화 (385/404)

외전 - 119. 영지경매

흔들리는 마차 안, 작은 창밖으로 매번 보던 아름다운 건물과 거리를 환하게 밝힌 마법 등이 오늘따라 낯설고 어색해 보였다.

“아가씨,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쓸쓸해 보이는 베아트리의 모습에 하녀, 에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냥… 좀 낯설어서….”

“아!”

에슈가 베아트리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잘 어울리니까요.”

“응?”

“오랜만에 밤의 정장을 입으셨잖아요. 낯설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예요.”

에슈의 말에 베아트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밤의 정장, 갖은 보석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입는 화려한 드레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에슈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게이츠 경과 여러 가신들이 찾아오기 전까진 그녀도 화려한 파티와 티 타임을 즐기며 여느 귀족 영애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 걸까?”

“그럼요. 예전처럼 파티에 참석도 하시고 영애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시면 곧 왕도의 화려함도 익숙해질 거예요.”

에슈가 밝게 미소를 지으며 베아트리를 바라보았다. 무려 일 년이 훌쩍 지나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영애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언제나 표정 없던 얼굴엔 미소가 어렸고 왕실 승전파티 참석 선언은 타운하우스의 고용인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중 특히 베아트리의 전담 하녀인 에슈의 기쁨이 가장 컸다. 영애를 수행하고 동시에 다른 영애의 전담 하녀와 소통하며 사교계의 동향과 유행 등 여러 정보를 취득, 이를 바탕으로 영애가 사교계의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전담 하녀인 그녀의 역할이었다. 베아트리 영애가 몇 년 동안 사교계와 담을 쌓고 지내면서 그녀 역시 한동안 사교계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다시 영애가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니 에슈는 전담 하녀들과의 새로운 교류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에슈, 그게….”

베아트리가 안타까운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에슈를 바라보았다. 이번 왕실 승전파티는 그저 귀족들을 왕실로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일 뿐, 실질적인 목적은 전몰 귀족들의 영지와 작위를 매각하기 위한 경매였다. 베아트리 역시 영지를 낙찰받으면 곧장 장원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막 에슈에게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마차가 멈춰 섰다.

“왕성에 도착했습니다.”

윌리스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리며 그리미엄 자작가의 기사정복을 입은 윌리스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윌리스 경.”

베이트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윌리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 입구에 서 있는 늙은 시종장에게 다가갔다.

“전쟁의 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애.”

시종장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가문과 이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미엄 자작가의 베아트리라고 해요.”

“아! 그리미엄 자작가의 베아트리 영애셨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더니 작은 종을 손에 들었다.

“잠시만!”

베아트리가 재빨리 시종장을 불렀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시종장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다 베아트리가 품속에 넣어둔, 왕립은행에서 발행한 은패를 조심스럽게 내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매에 참석하고 싶어요.”

베아트리의 말에 눈을 크게 뜬 시종장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미엄 자작가가 경매에 참석한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전 대리인이에요.”

“…영애께서 대리인이란 말씀입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아닙니다. 기사 이상의 작위만 있다면 대리인을 통해서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리인에 대한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경매에 참석하려면 최소 1,000골드 이상이 왕립은행에 예치되어야 합니다. 만약 예치금 미달일 경우 낙찰을 받더라도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걱정마세요.”

“알겠습니다. 경매는 정확히 자정, 종이 울리면 풍요의 방에서 시작됩니다.”

시종장이 작은 종을 울리자 안쪽에서 시종이 걸어 나왔다.

“따라가시면 파티장으로 안내해줄 겁니다.”

“감사해요.”

“별말씀을…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베아트리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곤 안으로 향했다.

“그리미엄 자작가, 베아트리 영애십니다.”

묵직한 시종의 음성이 울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입구로 향했다. 그리미엄 자작가라면 백작령에 버금가는 대평원을 지닌 명문 귀족가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미엄 자작가?”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색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저 아이도 그리미엄 자작가의 영애라고 하지 않았나요?”

“헬레나 영애라고 했죠, 아마? 발렌시아 공녀와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마 도자기를 가장 먼저 공녀에게 선물한 사람일 거예요.”

“아! 저도 들었어요. 헌데 자작가에 또 다른 영애가 있었군요.”

커다란 공작 깃으로 만든 부채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들이 베이트리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관심을 보였다. 부유한 그리미엄 자작가라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제법 훌륭한 신붓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귀족자제들이 하나둘 눈을 빛내며 베아트리 영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언니!”

헬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베아트리에게 다가왔다.

“헬레나!”

“언니가 파티에 참석할 줄은 몰랐어요.”

“어쩌다 보니… 그런데 넌 영지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니?”

헬레나는 분명 며칠 전 영지도 돌아가기 위해 타운하우스를 떠났었다.

“돌아가던 중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요.”

“반가운 사람?”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홀 한쪽,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을 바라보았다.

“발랜시아 공녀예요. 트라발트 공작 전하를 따라 왕도로 올라오셨어요.”

“공녀?”

파티엔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이 참석하지 않는다. 이번 승전파티의 목적이 전몰 귀족의 작위와 영지를 매각하기 위한 목적의 파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공녀가 나타난 것이다.

“공작님께선 국왕 전하를 만나고 계세요.”

“전하를?”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귀족 회의 때문이구나!”

“맞아요. 대귀족 회의에 앞서 국왕 전하와 논의할 일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공녀와 제가 이곳에 있는 것도 공작께서 고위 귀족들의 시선을 피해 자연스럽게 입궁하기 위해서예요.”

헬레나가 주변을 살피더니 베아트리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아마도 바란트 왕국과의 전면전에 대한 논의 때문인 것 같아요.”

“전면… 전?”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발트 공작의 중부 귀족파가 주축이 되어 전쟁을 반대해 왔지만 이번엔 아마도 어려울 것 같아요. 당장 공작과 함께 전쟁을 반대해 왔던 동부 3대 가문이 가장 먼저 병력을 모아 보복을 천명했고, 서부와 북부 귀족들도 속속 지원군 파병을 논의 중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왕실은….”

“대대로 정복욕이 강했지.”

베아트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귀족파를 이끌어온 트라발트 공작은 야만족 아스란 왕국과 맨피스 왕국을 왕국 최대의 적으로 판단, 강력한 군사적 통제를 주장한 반면 제국이나 바런트 왕국과는 꾸준히 화친을 주장하며 무역을 장려해 왔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맞아요. 그리고 공작 역시 이번 전쟁을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반대하지… 않아?”

베아트리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반전파의 핵심인 공작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전면전은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나 다음이 없었다.

“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헤레나의 말에 배아트리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와이번들의 기습공격에 동부 전역이 전쟁터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정보가… 꽤 빠르구나.”

“공녀의 옆에 있다 보면 가끔 쉽게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얻기도 하거든요.”

“그렇구나….”

“그런데 언니는 어쩐 일어나세요? 저야 공녀를 수행하기 위해 왔지만 언닌 이런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잖아요.”

정확히는 사교계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베아트리가 갑자기 하위귀족들이나 모이는 승전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건….”

베아트리가 난감한 얼굴로 헬레나의 시선을 피했다.

댕댕-

그때였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던 파티장 안으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자 여유롭게 파티를 즐기던 귀족들 일부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헬레나! 미안하지만 급히 가야 할 데가 있어, 나중에 다시 보자!”

베아트리가 헬레나를 남겨두고 윌리스와 함께 급히 풍요의 방으로 향하는 귀족들의 뒤를 쫓았다.

“언니?”

핼레나가 다급히 사라져 가는 베아트리를 급히 불렀지만 베아트리는 애써 헬레나를 외면하고 풍요의 방으로 향하며 황급히 면사를 썼다.

“실례하겠습니다.”

막 풍요의 방안으로 들어서자 두 명의 기사가 손을 뻗어 베아트리의 입장을 제지했다.

“무슨 일입니까?”

윌리스가 급히 베아트리의 앞을 막아서며 두 기사를 노려봤다.

“죄송합니다. 경매 참석을 위해선 예치금 확인이 필요합니다.”

기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한쪽에 자리한 마법사를 가리켰다.

“왕립은행 소속 마법사입니다.”

“확실하군요.”

베아트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은패를 마법사에게 내밀었다. 은패를 받아든 마법사가 붉은 시약을 은패 위에 떨어트렸다.

웅-

붉은 시약이 은패 위에서 소용돌이치더니 은패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

“5천 골드!”

마법사가 놀란 얼굴로 베아트리를 바라보았다. 비록 저서클 마법사로 마탑이 아닌 왕립은행에 몸을 담고 있긴 하지만 오랜 시간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얼굴을 가렸어도 드레스나 몸짓, 목소리, 장신구를 보면 대략적인 나이와 재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눈앞에선 여인은 많아야 이십 대 초반의 어린 귀족가의 영애로 예치금도 기준에 미치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치금은 무려 5천 골드, 앞서 확인한 경매 참석자들 중 세 번째로 많은 예치금 보유자가 등장한 것이다.

“확인이 끝났나요?”

“물론입니다. 부인!”

마법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한 예치금 보유자가 나이 어린 귀족 영애일 리 없다고 판단한 마법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부인?”

베아트리가 마법사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

“아니, 아니에요.”

왠지 밝아진 음성에 마법사가 의아한 듯 베아트리를 바라보더니 작은 팻말을 내밀었다.

“낙착을 받으시면 팻말 뒤쪽에 현 직위와 이름을 적어 제출하십시오. 영지와 작위 증서가 발급될 겁니다.”

“귀족원 등록은 어떻게 되는 거죠?”

“걱정 마십시오. 귀족원 등재 역시 동시에 이루어질 겁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영지와 작위 경매는 공식적인 절차가 아닙니다. 때문에 공식적으론 전몰가문의 정식 상속인으로 기록되어 가문과 작위를 계승하게 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저희도 작위를 거래했다는 치부를 남길 생각은 없으니까요.”

베아트리의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원하시는 성과를 이루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마법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시지요.”

“감사해요.”

베아트리가 윌리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저쪽으로 가시죠. 부인!”

윌리스가 웃음기 가득 담긴 목소리에 베아트리 역시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경매는 총 두 파트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영지는 없지만 전몰한 계승 귀족의 작위와 영지를 가진 전몰 귀족 가문으로 나뉘었다. 보통 이렇게 거래되는 작위는 남작 이하의 하위 작위들로 작위를 계승 받지 못하는 남작이나 자작가의 자제들을 위해 찾아온 귀족들이 낙찰받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기부를 통해 얻게 되는 단승 작위보다 높은 값에 거래되었다. 또한 가난한 계승 귀족들이 비싼 값을 받고 작위를 매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작위의 거래는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거래되는 영지를 가진 전몰 귀족 가문의 거래는 다르다.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이처럼 귀족 가문 전체가 몰살당하는 경우는 극히 희박할 뿐 아니라 설령 전몰 귀족 가문이 생긴다고 해도 대부분 종전 이후 논공행상을 통해 귀족들에게 하사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직 전면전이 시작도 되기 전 급습을 받으면서 영지가 불타고 귀족 가문이 전몰되어 왕실로서도 영지와 작위를 매각해 앞으로 있을 막대한 전비확보의 당위성이 생긴 것이다. 물론 왕실이 이런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무조건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있을 막대한 전비를 왕실과 함께 감당해야 할 고위 귀족들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대망의 마지막을 장식할 영지는 필테일 남작령입니다.”

경매사의 외침에 그동안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던 귀족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경매가 치열해질 것 같은데요. 아가씨?”

“언제 전면전이 벌어질지 모르니 동부 영지보단 작더라도 지형적으로 유리한 필테일 영지에 관심을 가는 거겠죠.”

필테일 영지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영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인 데다 안쪽으로 제법 넓은 농토가 있고 중부와 동부 사이에 위치해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전쟁에 직면한 시점에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쉽게 낙찰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걱정이군요.”

윌리스가 긴장한 얼굴로 경매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을 때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풍요의 방 안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찾아와 경매에 참석한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한 사람씩 경매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당황한 경매사가 급히 귀족들을 붙잡았지만 귀족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서둘러 풍요의 방을 벗어나 버렸다. 수십 명이 몰려있던 귀족들 대부분이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은 고작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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