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17. 마나엔진
어둠과 함께 찾아온 옅은 안개로 인해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낮은 구릉 위로 수백의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숍 남작에겐 아직도 연락이 없나?”
코엘 자작의 차가운 목소리에 보관이 고개를 숙였다.
“없습니다.”
보관의 말에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음.”
코엘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품 안에서 꺼낸 낡은 단검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얼마 전 코엘 자작은 숍 남작과 내기를 했다. 약속한 시간까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자작이 가진 행운의 단검을 내어 놓기로 말이다. 헌데 벌써 약속 시간까지 이틀이 지났지만 숍 남작과 기병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자작님!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저쪽에서 조금 전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면… 그냥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부관의 말로 자작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지만 곧 차분히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약속을 어기고 시간을 뒤로 미룬 건 자작이었다. 그들로서는 이미 최대한 자작을 배려해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작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계획한 모든 것이 어그러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휴… 어쩔 수 없지. 신호를 올려라!”
자작의 명에 부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바로 올리겠습니다.”
부관이 급히 안장에서 활과 화살을 꺼낸 뒤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꽝-
하늘 높이 날아간 화살에서 폭음과 함께 일어난 붉은 빛이 하늘을 밝혔다.
“신호가 올랐습니다.”
부관의 외침에 육포를 씹고 있던 무어 자작이 고개를 들어 폭발하는 붉은 불덩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결국 항복했나 보군.”
“코엘 자작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더 이상 지체했다간 작전을 망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자작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불러! 이번 작전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다.”
“예! 알겠습니다.”
부관이 환하게 웃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어 자작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봤다.
끼아아-
하늘 위 옅은 안개를 뚫고 칠흑 같은 거대한 어둠이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 멜번이 환하게 웃으며 카일을 반겼다.
“절 찾으셨다지요?”
“조만간 원행을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네드 자작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보름 후 초도 물량으로 도자기 삼백 점을 먼저 보낼 생각입니다.”
“잘됐군요. 그럼 마나석도 쉽게 구할 수 있겠군요.”
멜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폰티 아일랜드와의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되겠지만 이번 거래는 어디까지나 첫 거래다 보니 마나석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멜번의 아쉬운 표정에 카일이 의아한 듯 물었다.
“혹시 마나석이 부족하십니까? 그런 거라면 떠나기 전 아이론 상회나 제아루에게 말해놓겠습니다. 아마도 최대한 빠르게 구해줄 겁니다.”
“아! 아닙니다. 지난번 구해주신 마나석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것보다는 따로 부탁드릴 것도 있고 보여드릴 것도 있어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멜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실험실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마법사의 실험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공구와 부속들이 널려 있었다.
“설마… 성공하신 겁니까?”
깜짝 놀란 카일의 물음에 멜번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적인 실험이 몇 번 더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연구를 진행한 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곧 떠나실 것 같아 이렇게 급히 모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빨리 성과를 낼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카일 경의 아이디어가 아닙니까? 전 그저 마법적 도움만 드린 것뿐입니다. 전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한 카일 경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아이디어였을 뿐 지난 반년간 실험실에서 연구해서 완성시킨 건 멜번 님이 아닙니까?”
카일의 칭찬에 멜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는 실험실에서 아무 걱정 없이 연구하고 실험할 때가 가장 행복한 법입니다. 특히 새로운 이론을 연구하고 실현할 때 가장 보람을 느끼죠. 이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카일 경께서 아무런 걱정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끊임없는 지원을 해주신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죠.”
카일은 지난 반년 동안 수천 골드에 달하는 마나석과 마법 시약, 특수 금속을 꾸준히 공급했고 때론 직접 필요한 공구를 제작해 주기도 할 정도로 멜번의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하! 이거 서로에 대해 칭찬만 하다가는 대화가 끝날 것 같지 않군요. 일단 연구성과를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보여드려야죠.”
멜번이 직접 작업대로 걸어가 두터운 천을 걷어내자 붉은빛 특수 합금을 사용해 만든 직사각형 형태의 낯익은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카일이 멜번에게 의뢰해 만든 직렬 4기통 마나 엔진이다. 원리는 기본적으로 마나 라이플과 원리는 비슷하다. 라이플이 익스플로전 마법의 폭발력으로 탄환을 쏘아 보내는 방식이라면 마나 엔진의 경우 실린더 안에서 일어난 폭발을 이용해 피스톤을 밀어내는 형식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멜번이 마나 엔진 한쪽에 파인 작은 홈에 끼고 있던 반지를 가져갔다. 순간….
쿵-
쿵쿵-
낮은 진동과 함께 소음이 일며 마나 엔진과 연결된 금속 막대가 회전을 시작했다.
“서, 성공이군요!”
카일이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금속 막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각 실린더의 폭발력을 일정하게 조절하느라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건 통제 마나석 하나를 추가해 해결했습니다.”
“통제 마나석이요?”
카일이 초기 설계한 4기통 마나 엔진은 각 실린더에 하나씩 총 4기의 마나석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통제 마나석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각 실린더에 사용된 마나석과 병렬로 연결해 폭발에 필요한 마나석을 일정하게 공급하기 위해 마나석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이 마나석을 통해 마나의 공급량을 조절해 엔진의 파워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제 마나석이라 부르기로 했죠.”
“그 말씀은 통제 마나석을 통하면 엔진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를테면….”
“자유롭게 엔진을 가동하고 끌 수 있다는 말이죠.”
마나 엔진은 피스톤에 새겨진 1서클 익스플로전 마법진과 실린더 상단에 새겨진 룬 문자가 접하는 동시에 실린더 내부의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며 일반적인 익스플로전 마법보다 강한 힘을 발현하는 원리다. 성공만 한다면 마나석의 내구도가 버텨주는 한 무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점이 문제였다. 한번 가동되면 쉽게 엔진을 쉽게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멜번은 이 문제를 통제 마나석 하나를 추가해 간단하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요!”
카일은 솔직히 감탄했다. 멜번이 뛰어난 마법사이긴 하지만 생소한 기계학과 마법이 접목된 문제라 쉽게 해결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멜번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대단하다니요. 아닙니다. 비록 마나 엔진이 성공하긴 했지만 하급 마나석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출력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대략 12마력 정도 될 겁니다.”
멜번이 카일의 표정을 살피며 사실대로 말했다. 마나 엔진에 사용된 5개의 마나석과 특수 합금 비용만 따져도 값비싼 전투마 12마리의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일의 생각은 달랐다. 마나 엔진은 무한 동력이다. 한번 가동되면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돌아갈 뿐 아니라 따로 연료공급장치나 추가적인 동력장치가 필요없고 특수 합금을 사용해 작고 가벼워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그런 거야 실린더를 추가하면 될 겁니다.”
카일이 환하게 웃으며 마나 엔진을 자세히 살폈다. 엔진 출력이 생각보다 낮긴 하지만 실린더만 추가하면 그런대로 계획했던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마나석을 추가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추가로 엔진 제작이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추가생산이라고 하셨습니까?”
멜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나 엔진 제작엔 성공했지만 효용성은 그리 높게 생각하지 않았던 멜번으로선 카일의 제안이 놀라울 뿐이었다.
“네! 엔진 몸체야 이미 만들어 놓은 거푸집이 있으니 조금 수정하면 실린더 2개를 추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파워가 훨씬 올라갈 겁니다.”
“아! 6기통 엔진을 새롭게 제작하시겠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출력을 조금 더 높일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물론 임시적인 조치다. 일단 임시로 6기통 엔진을 제작한 뒤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엔진을 제작할 생각이었다.
“사실… 엔진 출력을 좀 더 높일 방법이 몇 가지 더 있기는 합니다.”
“정말입니까?”
“네! 가장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사용된 마나석을 상위 마나석으로 교체하는 겁니다.”
“그건….”
카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중급 마나석을 사용하면 폭발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출력을 높일 수 있지만, 하급 마나석과 달리 중급 마나석을 대량으로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마나석 전체를 바꾸는 건 부담스럽고 중급 마나석 공급도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통제 마나석만 중급으로 바꾸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통제 마나석 하나만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같은 등급의 마나석만을 하나로 클러스터 할 수 있다. 이것이 마법 학계의 정설이며 카일 역시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이었고 이것 역시 고차원적인 마법적 지식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멜번이 이런 정설을 깬 발언을 한 것이다.
“…마나 엔진을 연구하던 중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설마… 서클이!”
“아! 아닙니다. 그저 작은 실마리만 잡은 것뿐입니다.”
멜번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멜번 역시 수년 동안 정체되었던 마법의 실마리를 설마 1서클 마법과 마나석의 연구에서 찾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실마리를 잡았다면 곧 경지를 허물 길을 찾은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축하드립니다.”
“모두 카일 경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멜번이 카일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카일이 급히 손을 저으며 멜번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오리려 제가 매번 멜번 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걸요.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카일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중급 마나석을 최대한 구해보겠습니다. 그동안 마나 엔진 제작에 최선을 다해 주세요.”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석으론 두 기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두 기면 충분합니다.”
“엔진 몸체와 피스톤이 생산되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멜번을 향해 다시 한번 부탁을 한 카일이 서둘러 실험실을 빠져나와 장원 한쪽에 마련된 대장간으로 향했다. 이곳은 원래 공방에서 필요한 각종 도구를 제작하는 작은 규모의 대장간이었지만 최근 유민들과 함께 대장장이들이 유입되면서 십여 명이 넘는 대장장이들이 모인 제법 큰 대장간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공방장님 아니십니까?”
대장간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망치를 손에 든 중년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