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82화 (382/404)

외전 - 116. 뜻밖의 손님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가는 느지막한 저녁, 십여 명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마차 한 대가 귀족 거주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작은 타운하우스에 멈춰 섰다.

“아가씨!”

허둥지둥 마차로 달려온 늙은 집사가 황급히 마차 문을 열자 와이번이 정교하게 세공된 황금빛 토파즈 목걸이에 수수한 푸른빛 원피스를 입은 베아트리 영애가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이야, 버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집사 버먼과 인사를 나눈 영애가 저택을 돌아봤다. 이곳은 전대 그리미엄 자작이 물려준 장원과 농토처럼 일찍 부모를 여읜 베아트리 영애를 불쌍히 여겨 마련해준 왕도의 타운하우스였다. 넓은 농토에서 생산된 곡물을 바탕으로 모자람 없이 왕도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조부의 배려가 담긴 자택이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않고요. 그럼 준비를 했을 텐데요.”

“내 집이잖아! 연락은 무슨.”

베아트리가 피식 웃었다.

“아가씨…지금 웃으신 겁니까?”

버먼이 놀란 얼굴로 영애를 바라보았다.

항상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서인지 베아트리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기란 엄청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 한가요?”

베아트리가 어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아니! 아니에요. 아주 좋은걸요.”

어느새 다가왔는지 버먼의 옆에 선 중년 여인이 베아트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브리엔!”

하녀장 브리엔을 향해 다가간 베아트리가 브리엔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럼요. 전 잘 지냈답니다. 아가씨께선… 잘 지내신 것 같네요.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요. 좋아 보여요.”

“…그런가요?”

베아트리의 어색한 물음에 브리엔과 버먼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좋아 보인다니. 그보다 언제까지 날 여기 세워둘 생각이죠? 그만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요?”

하녀정인 브리엔과 집사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버먼이 고개를 들이 베아트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요.”

“저택에… 손님이 계십니다.”

“손님?”

갑작스런 버먼의 말에 베아트리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베아트리가 왕도에서 오랫동안 살긴 했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 손님으로 머물 만큼 친분을 쌓은 귀족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러니까… 일 년 전쯤에… 오셨는데….”

버먼이 난처한 얼굴로 망설였다.

“벌써 일 년이나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요?”

“아… 네, 아가씨… 헬….”

그때였다. 저택 안쪽에서 한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황금빛 머리와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모. 베아트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헬레나…!”

딱딱하게 굳은 베아트리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윌리스와 기사들이 달려와 베아트리를 에워싸자 헬레나의 유모 메아린 역시 다급히 헬레나의 앞을 막아섰다.

“괜찮아요.”

“하지만 아가씨!”

핼레나가 메아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 언니를 만나기 위해 일 년을 기다렸는걸요.”

헬레나가 메아린을 밀어내며 베아트리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물러나세요.”

“주변에 바르칼 경과 용병들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윌리스와 기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라이플을 손에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괜찮아요. 그분이 있었다면 헬레나를 이렇게 혼자 보내진 않았을 거예요.”

헬레나를 끔찍이 아끼는 바르칼이다. 만약 누군가 숨어 있었다면 윌리스와 기사들이 달려오기 전 먼저 헬레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타났어야 했다.

잠시 베아트리와 헬레나를 번갈아 돌아보던 윌리스가 결국 뒤로 한걸음 물러나 베아트리에게 길을 열어줬다.

“대신, 기사 몇 명을 보내 저택을 수색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영애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고집스러운 윌리스의 표정에 베아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소란이 일지 않게 집사와 상의해보세요.”

“네!”

고개를 끄덕인 윌리스가 집사와 하녀장 브리엔과 대화를 나누더니 집사를 따라 라이플을 손에 든 기사 넷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무기를 손에 들었군요.”

헬레나가 기사들의 손에 들린 긴 쇠막대기를 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지만 베아트리는 헬레나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곳엔 어쩐 일이지?”

베아트리의 싸늘한 목소리에 메아린과 윌리스가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탕-

탕-

그때, 연이은 두 발의 총성과 함께 2층 창문이 와장창 부서지며 검을 뽑아 든 사내가 창문을 뚫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영애!”

창밖으로 뛰어내린 도테트가 황급히 헬레나에게 달려오려 했다.

“멈춰! 더 이상 다가오면 쏜다.”

윌리스가 다가오는 도테트를 향해 라이플을 겨눴다.

“이놈들! 감히!”

도테트가 분노한 얼굴로 윌리스를 보며 외쳤지만 헬레나에게 더 이상 다가갈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겨누고 있는 쇠막대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 무구인지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도테트 경, 멈춰요.”

“하지만 영애!”

“전 괜찮아요.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잖아요.”

헬레나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도테트가 어쩔 수 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윌리스 경.”

베아트리가 윌리스를 돌았다.

“죄송하지만 도테트 경은 저보다 상위 기사입니다. 라이플이 아니면 아가씨께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야 도테트 경이 온전한 몸일 때의 말이겠죠. 부상 당한 몸으로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베이트리의 말에 윌리스가 다기 도테트를 차분히 살폈다. 정확히 왼쪽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몽글몽글 솟아나고 있었다.

윌리스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라이플을 내렸다.

“치료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윌리스가 천천히 도테트에게 다가갔다.

“이미 당해봤으니 라이플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 무구인지는 알 겁니다. 먼저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 저희도 공격할 생각은 없습니다.”

“과연 그대들을 믿을 수 있을까?”

“죽이려 했다면 허벅지가 아니라 머릴 노렸을 겁니다.”

윌리스가 품 안에서 푸른 빛이 감도는 포션 하나를 도테트를 향해 던지며 돌아섰다.

“허허! 중급 포션이군.”

도테트가 황당한 얼굴로 포션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피를 멎게 하는 것은 하급 포션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값비싼 중급 포션까지 던져줄 정도면 정말 상처를 치료해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녀석들이군.”

찌이익-

도테트가 상처 난 주변 옷을 넓게 찢어낸 뒤 조심스럽게 포션을 부었다.

부글부글

푸른빛 액체가 붉은 피와 만나며 보랏빛 거품을 일으키더니 서서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다행히 탄환이 절묘하게 근육을 관통한 덕분에 작은 흉터만 남긴 채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안쪽 상처까지 아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도테트는 상처가 아물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헬레나의 뒤에 섰다.

“괜찮아요?”

헬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중급 포션이라 상처 대부분이 아물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군요.”

헬레나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하녀장 브리엔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이렇게 서로 무장을 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언제까지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응접실로 가죠.”

“잘 생각하셨어요,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시면 차를 내어 올게요.”

하녀장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자 베아트리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희도 가요.”

“아가씨… 정말 이러시면 안 돼요.”

메아린이 굳은 얼굴로 헬레나의 손을 잡았다. 벌써 몇 달째 헬레나를 달래기도 하고 설득도 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 이미 결정했어요.”

또 한번 단호하게 말한 헬레나가 베아트리의 뒤를 쫓았다.

“도테트 경! 정말 가만히 보고만 계실 건가요?”

“어쩌겠습니까? 아가씨의 선택인걸요.”

“하아! 이 사실을 자작께서 아시면 아가씨를 가만두시지 않을 거예요.”

“그것 역시 아가씨께서 감당하셔야겠죠.”

도테트가 웃으며 헬레나의 뒤를 따르자 유모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은 중앙정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큰 창과 고풍스런 가구들이 배치된 아름다운 곳이지만, 또한 수십 명의 들어가기엔 작은 크기의 방이라 결국 영애를 호위할 윌리스와 도테트, 그리고 유모인 메아린만이 응접실로 따라갈 수 있었다.

“아직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뜨거웠던 차가 알맞게 식을 정도로 침묵이 길게 이어지자 베어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언니를 만나기 위해서죠. 이곳이라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 생각했거든요. 처음엔 한 달 정도면 만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한 달이 두 달, 석 달이 되면서 기다린 시간이 아깝더라고요.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1년이 훌쩍 지나버렸어요.”

헬레나가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베아트리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넌 네가 무섭지도 않니?”

“글쎄요? 무서워해야 하나요?”

“난… 널 죽이려 했다.”

베아트리가 굳은 표정으로 헬레나를 보며 말했다.

“알아요. 언니가 왜 그랬는지도 들었어요. 할아버지에게. 단순히 후계 싸움 때문만은 아니란 걸….”

“…바르칼 경이…?”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기다렸어요. 언니에게 선대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지금 후계자 자릴 포기하겠다는 거니?”

베아트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헬레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후계자 자리는 포기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작과 가신들이 허락하지 않을 거다.”

“알아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저와 할아버지께서 언닐 강력하게 지지하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바르칼과 후계자인 헬레나가 베아트리를 다음 대 자작으로 지지한다면 바르칼의 무력에 의해 돌아섰던 가신들도 자연스럽게 다시 베아트리를 지지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기만 했던 베아트리 영애의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원래부터 제 자리가 아님을 알았으니까요.”

헬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정략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거든요.”

헬레나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졌다.

“벌써… 정략혼에 대한 말이 나오나 보구나!”

“맞아요. 북부 스타인 백작가의 삼남과 이야기가 오간다고 들었어요.”

스타인 백작가는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와 문관을 배출한 북부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가문과 멀리 떨어져 있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면서도 가장 정통성 높은 고위 귀족 가문이었다. 이번 정략결혼을 결정하기 위해 그리미엄 자작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스타인 가문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어, 북부의 명가라고 했으니 분명 네게 좋은 짝이 될거야!”

베아트리가 담담하게 말하자 오히려 헬레나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정략결혼이라고요. 이게 뭘 뜻하는지 정말 모르나요?”

“아마도 곧 널 후계자로 선정하겠다는 말이겠지.”

“그런데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지금이라도 저와 함께 영지로 돌아가면 후계자가 될 수 있어요.”

헬레나가 다급하게 말했지만 베아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달라질까? 아니, 자작은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건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니?”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베아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난 더 이상 후계자 자리나 작위 같은 건 원하지 않아!”

“…그게 무슨.”

갑작스런 베아트리의 선언에 핼레나는 물론 메아린과 도테트까지 놀란 얼굴로 베아트리를 바라보았다.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자넨 이미 알고 있었군.”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선 이미 오래전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왜죠? 왜 갑자기 후계자 자릴 포기한다는 거죠?”

헬레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어!”

“네?”

“복수심? 영지와 작위? 과연 이 모든 것이 내가 원했던 걸까? 생각해보니 아니었어, 난 그저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어. 그래서 이전엔 내가 직접 결정하기로 했어.”

“그래서 복수도 작위도 포기했단 말인가요?”

“아니! 난 남이 아닌 날 위해 살기로 했을 뿐이야. 내겐 이제 영지와 작위 같은 건 필요 없거든. 그러니 선대의 약속은 잊어도 좋아!”

“그럼 복수는요. 복수도 잊었단 말인가요?”

“…아마 잊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의 복수 때문에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할 생각은 없어.”

베아트리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원하는 만큼 있다가 돌아가도 좋아!”

“…다시 떠날 건가요?”

“아마도… 나도 이제 너처럼 돌아갈 곳이 생겼거든!”

베아트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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