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81화 (381/404)

외전 - 115.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이상합니까?”

“전략무기인 와이번을 밀수에 이용하겠다는 자네의 생각을 누가 동의하겠나?”

“하하! 재밌는 말씀이군요. 제가 와이번을 이용해 도자기를 밀수하는 것과 도자기를 얻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자작님의 행동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과 이것은 다르네!”

“하하! 글쎄요. 어차피 목적은 도자기를 확보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와이번을 적극적으로 무역에 활용하게 되면 얼마나 큰 이득이 생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카일의 말에 자작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로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상인인 동시에 와이번 나이트였던 사람이다. 하늘을 통한 무역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획기적으로 운송비를 줄일 수 있겠지.”

상단이 원행을 하려면 거리와 기간, 운송량에 따라 일꾼을 뽑아야 하며 몬스터와 도적 등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상단을 보호할 용병을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와이번은 다르다. 운송량에선 제한을 받겠지만 육상과 달리 목적지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빠르게 비행할 수 있고 몬스터나 도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따로 일꾼이나 용병을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죠.”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와이번 나이트들이 강하게 반발할걸세.”

“어차피 밀무역입니다. 어느 누가 와이번으로 밀무역을 한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에렌 공국과의 중계무역 없이 대량의 자기가 유통된다면 분명 누군가는 의심을 할텐데?”

“맞습니다. 가장 먼저 에렌 공국의 상인들이 의심을 할 겁니다. 그러니 페네시스 가문만의 독자적인 자기를 생산해야겠죠.”

카일의 말에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일은 피식 웃더니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네드 자작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일단 열어보시죠.”

카일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은 자작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엔 크기와 형태가 똑같은 두 개의 작은 찻잔이 놓여있었다.

“이건… 그냥 찻잔이 아닌가?”

“자세히 보시면 아마도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다시 두 찻잔을 살피던 자작이 눈을 크게 떴다. 자세히 보니 두 찻잔엔 명확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질 자체가 다르군.”

“맞습니다. 한쪽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백자라면 다른 한쪽은 백자를 비슷하게 모방한 찻잔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빛깔과 모양, 재질이나 두께에서 백자와 차이가 있죠.”

“벌써 누군가 모방품을 만들었단 말인가?”

자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자작 역시 도자기를 모방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참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비록 기존 도자기보다 질이 떨어지긴 했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도자기를 모방한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모방품 역시 제가 만든 겁니다.”

“이걸 자네가 만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사실 도자기를 생산하려면 아주 중요한 재료가 필요한데, 구하기가 쉽지 않아 대체품을 사용해 만들어 본 겁니다.”

보일이 샤론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되자 고령토를 채취가 어려울 것에 대비해 고령토 대신 석영질 재료를 섞어 백자를 만들어 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형태가 무너지거나 유약의 접착력이 떨어지면서 실패해, 카일이 낮은 온도에서 소성한 연질 자기를 시범적으로 만들어 보았다.

“얼마나 귀한 재료이길래 대체품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란 말인가?”

“지금까진 오크랜드 안쪽에서 채취한 재료를 사용해 왔지만, 이제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크… 랜드?”

“그렇습니다. 다행히 몇 달 전 운 좋게도 인근에서 질 좋은 재료를 찾은 덕분에 이 모방품 레시피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죠.”

카일은 품 안에서 양피지로 대출 엮은 작은 책자를 꺼냈다.

“이건 모방품의 레시피가 기록된 노트입니다. 만약 자작께서 저와 거래를 하시겠다면 이 노트를 선물로 드리죠.”

“이… 걸 내게 주겠단 말인가?”

“이것만 있다면 페네시스가에서 자기를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질이 조금 떨어지긴 하겠지만 백자를 살 수 없는 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겐 인기를 끌 겁니다. 폰티 아일랜드와 자유롭게 거래를 할 수도 있겠죠.”

카일의 말에 자작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가 급속하게 시들어 갔다. 모방품이라고는 하지만 자기를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페네시스가는 사양길에 접어든 면직물 산업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얻는 게 크다면 그만큼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거래의 기본임을 자작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건 뭔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엔 이유가 있을 듯 보이는데?”

“항로가 필요합니다.”

“항로?”

“자작님께서 이곳 동부까지 은밀하게 이동한 경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건….!”

네드 자작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작은 은밀하게 중부 평원에서 동부의 무어 자작과 합류한 뒤 에바크 산맥을 넘었다. 만약 이 경로가 역으로 크로노스 왕국에 알려질 경우 적국의 와이번들이 중부나 남부까지 은밀하게 진출할 길을 만들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작님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아마도 아국 와이번들의 기습을 우려하시는 것이겠죠?”

“부인하진 않겠네. 자넨 지금 네게 반역을 제안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

“그렇다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알려지진 않을 테니까요.”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자작이 날카롭게 카일을 쏘아보았지만 카일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자작을 바라보았다.

“자작님! 조금 이상하진 않습니까?”

“무슨… 말인가?”

“바런트 왕국 남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페네시스 가문의 가주께서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고작 동부의 작은 용병 가문 장원에 머물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점은 네드 자작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부분이다. 바런트 왕국 남부 명문인 페네시스 가문이라면 최소한 남작 이상의 가문에서 정식으로 몸값 협상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재까지 만난 사람이라고는 장원이나 공방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물론 자작으로선 이런 생활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알고 싶었던 도자기의 제작 방법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었고, 응접실 가득 전시된 최고의 도자기들도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었기에 불만을 제기한 적은 없었다.

“그야… 아직 아서 가문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그럴 리가요?”

“그럼 고위 귀족들이 찾아오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왕국에서 자작님의 존재, 아니 바런트 왕국 남부 와이번 편대가 국경을 넘었단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부 연합의 존재를 모른… 다?”

네드 자작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무려 20명의 와이번 나이트가 죽고 자신은 포로로 잡혀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크로노스 왕국의 누구도 알지 못한다니 네드 자작으로선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바런트 왕국 남부 와이번 편대가 국경을 넘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접한 크로먼 백작가 역시도 자작님의 존재를 모릅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애초에 자작님의 존재를 밝히지 않고 장원의 자체 병력으로 남부 편대를 공격한 것이니까요.”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아무리 기습이라고 하지만 20기의 와이번을 생포하려면 최소한 그 절반 이상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동원되어야 하네! 설마 용병 길드를 통해 와이번 라이더를 대거 동원했다는 헛소릴 할 생각은 아닐 거라 믿겠네”

자작은 카일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 용병 길드에 소속된 와이번 라이더는 고작해야 십수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왕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동부로 일제히 불러들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용병을 기용한 건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요.”

“필요도 없다? 설마 장원에 소속된 단 세 마리의 와이번으로 지금 20기의 와이번 편대를 전멸시켰다고 말할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이미 짐작 하셨겠지만, 장원에 소속된 와이번은 모두 베지톤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보유했던 와이번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20기의 와이번을 상대하기엔 부족하죠. 하지만 저희에겐 실력 있는 용병들 수십 명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용병이 아닌 베아트리 영애를 따르는 기사들이지만, 이들 모두 정식 기사보다는 아직 서임을 받지 못한 수련 기사에 불과했다.

“아무리 많은 용병이 있다고 해도 하늘 위에 떠 있는 와이번 나이트를 공격할 수는 없네!”

“물론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마법 무구라면 어떻습니까?”

“마법 무구라면… 설마! 자네가 소지했던 그 무기 말인가?”

“비슷합니다.”

“…지금, 용병 수십 명을 마법 무구로 무장시켰다고 말하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늑대 기사단은 물론 마라스의 용병대와 최근 합류한 자경 대원들까지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명에게 라이플을 보급하고 있었다.

“허허!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 어디까지 자네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모두 사실입니다. 만약 자작님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졌다면 지금쯤 분노한 동부 귀족들 손에 목이 잘렸을 겁니다.”

“목이 잘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포로가 된 귀족을 함부로 죽이는 경우는 없어!”

“그야 무어 자작님께서 분탕질 치고 다니지 않았을 때의 일이죠.”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무어 자작의 존재까지 파악했단 말인가? …헌데 분탕질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무어 자작께서 동부는 물론 중부와 남부 일대의 영지들을 돌며 약탈에 파괴는 물론 귀족들까지 가차 없이 죽이고 있거든요. 일부 소규모의 남작령의 경우 어린 후계자까지 죽이면서 멸문한 귀족 가문도 여럿 생긴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라 귀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자작님이 잡혀있단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 죽이려 할 겁니다. 물론 이 사실을 그동안 감춰온 저희 장원도 무사하긴 힘들겠죠.”

카일의 말에 네드 자작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야만인 녀석! 언젠가 크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 생각은 했는데, 기어이 사고를 치는군.”

“무어 자작과는 친하신 모양입니다.”

“녀석과는 왕립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다. 그리고 녀석과 친하다니! 그런 야만인 녀석과 친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날 모욕하는 말일세!”

“하하! 그렇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사과를 했다.

“아니… 그렇다고 사과를 할 필요까지야…!”

자작이 카일을 향해 손을 저었다.

“사실 자작님과 지루하게 몸값 협상을 할 생각이었지만 무어 자작의 일로 귀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자작님을 오래 장원에 남겨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날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만약 자작님께서 저와의 거래에 응하신다면 3백 점의 도자기와 함께 자작님의 영지인 남부 페네시스가로 저희를 안전하게 안내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첫 거래를 기념해 자작님에 대한 몸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거절하셔도 어떤 보복이나 조치도 없을 겁니다. 그저 처음 약속대로 몸값만 지불하신다면 다음번에 하멜 상단을 통해 에렌 공국으로 안전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자넨… 날 믿을 수 있나? 아무리 모방품이라고는 하지만 서책을 받게 되면 자넬 배신할 수도 있을 텐데?”

자작의 물음에 카일이 히죽 웃었다.

“배신하실 생각입니까?”

모방품이라고는 해도 카일의 도움 없이 서책 하나만 보고 자기를 생산하려 한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이다. 아니, 서책이 진짜인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카일을 배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휴!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처음이군.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오랜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알겠네!”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그만 식사를 하러 가실까요? 마침 오늘이 수수로 만든 위스키를 개봉한 날입니다.”

“위스키! 설마 지난번 보일 경과 함께 지하창고에서 마셨던 그것 말인가?”

“아버지와 지하창고에서 마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카일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린 네드 자작이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험험, 이야기를 길게 했더니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어서 가세!”

자작이 카일의 시선을 피해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가자 카일도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자작의 뒤를 쫓아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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