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14. 혼란(2)
“카일!”
막 회의실을 빠져나온 카일을 향해 마크가 급히 달려왔다.
“어? 언제 돌아왔습니까?”
“지금 막 돌아왔다.”
마크와 비터는 협곡에서 죽은 와이번과 와이번 나이트의 무장을 챙겨오기 위해 지금껏 에바크 산맥 인근을 뒤지고 다니다 이제 돌아온 것이다.
“일은 잘 끝났습니까?”
“몇몇 장비는 찾지 못했지만 와이번 사체와 무장 대부분은 수거했다. 지금 고투님 께서 확인 중이다. 그보다 큰일이 터진 것 같다.”
“큰일이라니요?”
“아무래도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마크가 카일을 끌고 황급히 장원 외곽 성벽 위로 올랐다.
“이건!”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평원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마차와 수레를 끌고 장원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와이번을 타고 돌아오던 중 목격하고 곧장 달려오는 길이다. 아마도 이번에 습격받은 영지의 영지민들이 폐허가 된 영지를 떠나 유민이 되었다가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소문을 낸 건 카일이다. 수원이 확보되고 본격적으로 평원이 개발되면서 일손이 부족해지자 작은 가족 단위의 떠돌이 유민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용병 길드를 통해 소문을 낸 것이다. 하지만 영지가 공격당하고 집과 농토가 파괴되자 집과 식량을 주겠다는 소문을 듣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피라네시아 장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을 감시하고 제재해야 할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대거 목숨을 잃으면서 떠나는 영지민을 통제할 방법도 마땅히 없게 된 탓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작은 유민 정도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저들은 엄연히 소속이 있는 영지민들이다. 자칫 귀족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마크의 말에 카일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마크의 말대로 자유민이 아닌 이상 영지를 이동하는 것은 영주의 허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영지를 벗어난 영지민이나 이들을 받아들인 카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받아들이죠.”
“카일! 이건 심각한 일이다. 영주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마크의 말에 카일이 피식 웃었다.
“어떤 영주들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당연히…!”
“저들 대부분은 영지가 파괴되고 영주와 귀족들이 죽으면서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한 혼란을 틈타 빠져나온 사람들입니다. 제가 저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영주가 죽었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과연 괜찮을까? 인접한 귀족들이 나설 수도 있다.”
“아니,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랬다간 자칫 유민들을 자신들이 떠안아야 할 텐데? 과연 그럴까요?”
“영지민이 늘어나면 영지로서도 좋은 일 아니냐?”
“그땐 식량이 넉넉할 때의 이야기죠.”
카일의 말에 마크가 의아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식량이라니…!”
“동부는 물론 남부와 중부까지 영지가 파괴되었어요. 사실상 대부분의 농지가 파괴되었다는 말이죠. 조금만 생각이 있는 영주라면 겨울을 대비해 아마도 지금쯤 식량 매입을 시작했을 거예요.”
“그래서 요새를 지키던 마라스 대장과 용병대를 중부로 보낸 거냐?”
최근 마라스 대장은 카일의 지시에 따라 식량 매입을 위해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상대적으로 식량 가격이 낮은 중부로 떠나있었다.
“맞아요.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상 당분간 혼란은 계속될 테니 그때를 대비하는 게 좋겠죠. 가을이 되면 평원에서 본격적으로 수확이 시작될 테니 유민들이 유입된다고 해도 걱정이 없을 거예요.”
“휴! 난 당장의 전쟁만 생각해 걱정했는데, 더 먼 곳을 보고 있었구나!”
“책임질 사람이 늘어나니 어쩔 수 없죠. 아마도 전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카일의 말에 마크도 동의하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네드 자작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유민들 문제는 네가 처리하겠다. 걱정 마라!”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저택에 도착했지만 한참 동안 찾아도 자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딜 간 거야?”
카일이 화가 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으로서 자작 스스로가 포로를 자처한 상황이라 따로 가두지 않고 손님으로서 대우하고 있다 보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장원과 공방 여기저기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기 일쑤였다. 최근엔 자신의 팔을 자르고 와이번까지 빼앗아간 보일과 무슨 재밌는 일을 하는지 딱 붙어 다니기까지 하고 있어 포로인지 손님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설마 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건 아닐 텐데…?”
고개를 저으며 작업실 안쪽으로 걸어가던 카일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평소 단단하게 닫아 놓았던 문이 반쯤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계셨습니까?.”
독특한 형태와 문양의 도자기를 세심하게 살피던 네드 자작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커험, 왔는가?”
자작이 겸연쩍은 얼굴로 카일을 돌아봤다.
“제 기억으론 이곳은 허락된 곳이 아닙니다만?”
“…하하! 그게, 그만 길을 잃어서 말이야.”
“변명이 궁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작님의 거처는 3층입니다만?”
“아니… 난 그저 자넬 찾고 있었을 뿐이야!”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이미 이곳저곳을 무단으로 드나들며 도자기 공정을 살핀 전적이 있는 네드 자작의 말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이네!”
“전혀 믿음이 가진 않지만 그렇다고 하죠.”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나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얼굴을 찌푸린 카일과 눈앞에 놓인 도자기를 번갈아 보며 망설이던 자작이 아쉬운 표정으로 빈 소매를 휘적이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휴! 그래서, 궁금한 게 뭡니까?”
“…궁금한 것이라니?”
자작이 짐짓 모른 척 카일에게 되물었지만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게 물어볼 말이 있는 것 아닙니까? 궁금한 게 없으면 그만 가시죠.”
카일이 단호하게 돌아서자 자작이 황급히 카일을 붙잡았다.
“아, 아니! 그렇다고 그냥 가면 어쩌나?”
“궁금한 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네!”
자작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뭡니까? 비밀만 아니라면 최대한 알려드리죠.”
“정말인가?”
“단! 식사 시간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네드 자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곧장 카일을 향해 물었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인가? 여기 있는 도자기들, 기존 도자기와는 전혀 달라 보였네!”
“당연하죠. 이곳은 제작 방법을 조금씩 달리해 만든 도자기들을 전시해 놓은 것들이니까요.”
“도자기의 제작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재료나 공정에 따라 보시는 것처럼 독특하고 다양한 색감이 나오죠. 조금전 보셨던 게 이것이었던가요?”
카일이 조금 전 자작이 살피던 작은 술병을 꺼냈다. 두세 줄의 백상감 선 사이사이에 덩굴과 연꽃을 그리고, 연꽃 안쪽은 흑상감으로 장식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도자기였다.
“맞네! 워낙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지!”
“다행이군요. 이건 저도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거든요.”
카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청사기란 겁니다. 퇴토 표면에 백토로 분장해 만든 거라 백자를 제작하는 방법과 재료에서 차이가 있죠.”
“그걸 내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자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동안 도자기제작법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공방 이곳저곳을 살폈고 카일과 수 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럼에도 지금껏 도자기 제작법에 대한 이렇다 할 답을 내놓은 적이 없었던 카일이 갑자기 새로운 도자기 기법에 대한 단서를 내놓은 것이다.
“하하! 이만한 단서로 자기를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보다 더 복잡하고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죠. 아마도 공방 여기저길 살폈다면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독특한 재료의 특성과 제작기법, 그리고 소성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환원과 산화라는 복잡한 과정을 모르면 분청사기를 제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건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네드 자작의 눈이 반짝였다. 본능적으로 지금 카일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좀 시간을 두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좋습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금 말씀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손에 들린 분청사기를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은 카일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이제 말해보게, 내게 원하는 게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서둘러 자리에 앉은 자작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이야기하셨죠? 폰티 아일랜드와 자기 무역을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자네… 지금 폰티 아일랜드와 자기 무역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전 폰티 아일랜드와의 자기 무역을 원합니다.”
카일의 말에 자작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에렌 공국을 통한 중개무역은 큰 이익을 보긴 어렵네! 오히려 에렌 공국의 배만 불려줄 뿐이지.”
“맞습니다. 알아보니 에렌 공국 하멜 상단에선 저희에게 매입한 도자기를 바런트 왕궁이나 제국에 3배가 넘는 금액을 받고 넘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거래 방법을 좀 바꿀까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설마 상단을 이끌고 에렌 공국으로 직접 가겠단 생각이라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네!”
자작이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단을 이끌고 타국으로 원행을 떠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에렌 공국은 자체적으로 자국 상단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어 놓았기에 타국 상단이 공국에서 물건을 판매하기는 쉽지 않았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알아보니, 에렌 공국은 자국 상단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 상단 간 거래 시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있더군요.”
“맞네! 거래 물량의 몇 배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하기에 중간에 작은 중계 상단을 두고 거래를 하긴 하지만, 중간수수료 또한 부담되긴 마찬가지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 좀 다른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다른… 방법?”
“자작님과 직접 거래를 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단을 이끌고 직접 페네시스가를 찾아오겠다는 말인가?”
“자작님께서 하락만 하신다면 생각해볼까 합니다.”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바런트 왕국과 크로노스 왕국은 현재 전쟁 중인 적국이다. 국경 인근에서 이루어지던 소규모 밀수도 중단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직접 상단을 이끌고 페네시스가까지 찾아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작님도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카일의 말에 자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지금… 와이번을 밀수에 이용하겠다는 것인가?”
카일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허허… 자네 정말!”
자작이 황당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최고의 전략무기인 와이번을 밀수에 이용하겠다고 말하는 카일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