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8. 탈취(1)
“왜 그러나?”
험준한 산길을 따라 걸어가던 게이츠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윌리스를 노려봤다.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못마땅한 것 아닌가?”
“그럴 리가요. 착각입니다.”
윌리스의 담담한 말에 게이츠 단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냥 욕을 하게.”
“그래도 됩니까?”
“뭐?”
“아닙니다.”
“…이!”
게이츠가 윌리스를 사납게 노려봤지만, 윌리스는 가볍게 게이츠의 시선을 외면하며 천천히 속도를 줄여 뒤따르는 부하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모두들 장비를 철저하게 정비해라! 이번이 너희들에게 평생에 한번 있을지도 모를 기회가 될 거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부하들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윌리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난 십 여일, 윌리스와 부하들은 이번 계획을 위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문제는 자신들의 이런 노력을 중간에서 가로채려는 인물이 이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모두 알겠지만, 불청객의 등장으로 너희들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러니… 실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윌리스의 말에 부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게이츠에게로 향했다.
“하하….”
게이츠가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빌어먹을! 욕을 하라고 했더니… 눈으로 하는군.”
게이츠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가장 후미에서 바라보던 카일과 베아트리가 가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카일 경! 덕분에 가라앉았던 기사들이 다시 밝아진 것 같아요.”
베아트리 영애의 말대로 이번 카일의 계획은 기사들 전체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바르칼 경과 그의 용병단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인해 일명 울프 팩 기사단으로 통칭되는 3개의 기사단 90여 명 중 2개 기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심각한 타격을 받고 고작 19명 만이 겨우 장원으로 몸을 피했다. 게이츠는 남은 19명의 기사단을 하나로 묶어 붉은 늑대 기사단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기사들 대부분은 나이 어린 소드 유저나 이제 막 엑스퍼트에 오른 기사들로, 노련한 선임 기사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목숨을 잃은 탓에 기사단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게이츠는 이들의 사기를 다시 정상적으로 올리기 위해 다독이기도 하고 강도 높은 수련을 시키기는 등 수없이 노력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바로 카일의 계획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카일 경께서 저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내어 주셨어요.”
베아트리 영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앞서 걸어가는 기사들의 어깨로 향했다. 그들의 어깨에는 하나같이 긴 쇠막대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바로 카일이 제작한 단발식 볼트액션 라이플이었다. 본래 소량의 라이플을 제작해 혹시 모를 와이번의 습격에 대비할 계획이었지만, 얼마 전 에바크 산맥 일대를 정찰하던 마크와 비터에게 바런트 왕국 와이번 나이트들이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카일은 계획을 바꿔 20정 이상의 라이플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비밀공방 안에서 고투가 라이플 추가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일엔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들이 필요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고마워하실 일이 아니죠.”
이번에 라이플을 받은 기사는 모두 열다섯, 대부분이 윌리스가 이끄는 궁 기사단 출신의 기사들이다. 모두 궁술에 뛰어나서인지 사격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물론 앞서 걸어가는 기사들 전부가 궁 기사단의 기사들은 아니다. 붉은 늑대 기사단의 엑스퍼트 중 사격에 재능이 있는 기사들을 뽑아 이번 작전에 참여시켰고, 덕분에 붉은 늑대 기사단의 사기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게 올라가 있었다.
“그래도 감사한 건 어쩔 수 없는걸요.”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카일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도착했습니다.”
윌리스의 말에 카일이 앞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어떻습니까?”
윌리스가 긴장한 얼굴로 카일의 표정을 살폈다.
“…제법, 좋은 곳을 찾았군요.”
“그, 그렇습니까?”
굳어있던 윌리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거리와 위치 모두 좋습니다. 장소를 잘 선택하셨습니다.”
“다행이군요.”
“많이 긴장하셨나 보군요.”
“시간이 촉박하지 않습니까? 제 실수로 작전이 잘못되면 절 믿어준 카일 님과 부하들, 그리고 아가씨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윌리스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 전 이미 윌리스 님이 잘하실 거라 믿었는걸요. 이번 작전도 분명 잘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믿어주신 만큼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윌리스가 카일을 향해 고개까지 숙이며 다짐하듯 말했고 기사들 역시 신뢰가 가득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비터와 마크에게 사격술을 배우면서 은연중 카일이 상급 엑스퍼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가 왕국의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는 소문이 은밀히 돌면서 기사들 사이에서 카일은 이미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모두 원하는 성과를 이루길 기원하겠습니다.”
카일은 기사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더니 마지막으로 베아트리 영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카일은 이곳과 다른 곳에서 새로운 작전을 시행할 계획이기에 늦지 않게 떠나야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일 경께도 건투를 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올려봤다.
끼아악-
“레드 와이번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 위로 향했다.
“세상에….”
“와~.”
“…내가 레드 와이번을 보게 되다니.”
“저 동체를 봐! 골드 와이번과는 비교도 안 된다.”
기사들이 너도나도 흥분된 얼굴로 소리쳤지만 윌리스나 게이츠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 역시도 하늘 위를 선회하는 레드 와이번에 이미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카일이 곧장 절벽을 박차고 하늘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가 곧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카일 경!”
일행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자 협곡 아래에서 거대한 붉은 동체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하늘을 선회하던 레드 와이번이 어느새 내려와 협곡 아래로 추락하는 카일을 가볍게 받아 다시 위로 날아오른 것이다.
“흠… 이거, 사태가 심각하군.”
잠시 하늘 위를 바라보던 게이츠의 시선이 선망 가득한 눈길로 사라져가는 레드 와이번, 아니, 카일을 바라보는 기사들에 멎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단장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아가씨, 저들의 눈빛을 보십시오. 저들은 이미… 카일이란 사람에게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돌아가면 기사단 전체가 카일에게 돌아설 겁니다.”
게이츠가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이곳까지 따라온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카일은 기사들이 동경하는 모든 것을 갖췄다. 어린 나이에 상급 엑스퍼트에 오를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과 강력한 레드 와이번을 가졌을 뿐 아니라 막강한 재원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사가 아닌 자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급기야 강력한 마법 무구까지 안겨줬으니 나이 어린 기사들뿐 아니라 선임 기사들까지 동요하지 않는 기사들이 없었다. 그중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가 바로 윌리스였다. 게이츠 입장에선 애써 키워 놓은 기사단을 졸지에 카일에게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요. 주인으로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면….”
“아가씨!”
게이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베아트리 영애는 오히려 담담하게 게이츠를 바라보았다.
“정말! …소영주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실 생각입니까!”
게이츠의 말에 오히려 베아트리 영애가 게이츠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게이츠 경은 제가 정말 그리미엄 자작가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가씨는 주군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갑작스런 베아트리 영애의 물음에 게이츠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영애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게이츠로서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역시 게이츠 경도 이미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군요.”
“아닙니다. 카일과 보일 경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맞아요. 상급 엑스퍼트 둘이 절 도와준다면, 어쩌면 자작가를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예요. 그런데, 과연 그게 옳은 일일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바르칼 경을 끌어들인 현 자작과 카일을 끌어들인 제가 뭐가 다르죠?”
“아가씨는 그리미엄 자작가의 정당한 계승자로….”
“그럼 헬레나는 어떤가요? 그녀 역시 현 그리미엄 자작가의 유일한 딸이자 정당한 계승권을 가졌어요. 그와 제가 다른 점은 뭘까요. 그녀도 나처럼, 복수를 꿈꾸며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진 않을까요?”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게이츠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베아트리 영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왔을지 어렴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억울하게 죽어가던 소영주를 직접 모셨던 게이츠와 달리 베아트리 영애는 수많은 가신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뜻이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의 복수를 무겁게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르칼 경에 의해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이 하나둘 무너지면서 더 이상 복수가 불가능함을 처음으로 인정했어요. 그리고 그동안을 돌아보니, 참 어리석게 살아왔더라고요.”
“아가씨….”
“저들을 보세요. 저들은 아직 어린 기사들이에요. 더 이상 과거의 망상에 집착하기보단 더 나은 미래를 보며 새롭게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여기서 말이에요.”
멀리 사라져버린 카일과 레드 와이번을 주제로 웃고 떠드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베아트리 영애가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아!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거야! 아주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게이츠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윌리스도 당황해 서둘러 기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들! 아무튼 내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단 말이야!”
게이츠가 투덜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라트리 영애를 바라보았다.
“영애께선 뭐하십니까? 어서 자리를 잡지 않고요? 그렇게 멍하니 서 있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예? 아… 네!”
베아트리 영애도 게이츠를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서둘러 자신의 자리를 찾아 달려갔다.
“자! 그럼 나도 가볼까?”
게이츠가 피식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각 티엘 백작가의 후방을 공격하고자 남쪽으로 향한 네드 자작 일행의 뒤로 골드 와이번 한 마리가 은밀히 따라붙었다. 하지만 네드 자작을 위시한 와이번 나이트들은 뒤따르는 골드 와이번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 * *
“허허, 에바크 산맥이 이렇게 아름다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광활하게 펼쳐진 숲, 높은 절벽과 깊은 협곡, 그리고 사이로 구불거리며 흐르는 깊고 푸른 강물까지. 산맥은 끝없이 펼쳐진 넓고 푸른 바다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도 항상 바다만 보다가 이렇게 깊고 넓은 산맥을 보니 왜 동부 녀석들이 산맥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맨날 바다만 보니 산맥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거지만 그래도 전 바다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네드 자작과 헨치 남작의 대화에 갑자기 기사 헌트가 끼어들었다.
“헌트 이 녀석,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이냐?”
헨치 남작이 헌트를 나무라듯 말했지만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네드 자작은 남부 와이번 나이트와 함께 먼 바다에서만 사는 아툰이란 거대 물고기 사냥을 자주 나가다 보니 이런 장난스러운 대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핏! 두 분만 대화하실 거면 개인 통신 채널을 쓰시면 되잖아요. 괜히 공용 통신 채널을 쓰시고선….”
“이 녀석! 자작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됐네! 가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공용통신 채널로 사적 대화를 나눈 우리 잘못이지.”
네드 자작이 허허 웃으며 인자하게 말했다. 얼마 전 무어 자작을 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자한 모습이었다.
“자작님께서 너무 감싸니 너 녀석이 버릇이 없는 겁니다. 이젠 저 녀석 아비도 감당을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놔두게! 이제 저 녀석도 나이가 제법 들었고 한 가문의 기사단을 책임지기로 했으니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제법 성숙해져 있을 거야!”
“저 녀석이 말입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헨치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두 분, 제발 욕을 하실 거면 개인 통신 채널을 쓰시라니까요! 다 들린단 말입니다.”
“이런, 미안하네, 개인 통신 체널로 바꾼다는 게 깜빡했군.”
“지금 그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감히 자작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헨치 남작이 다소 엄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말투엔 웃음기 가득했다. 분명 자작과 남작 두 사람 모두 헌트를 놀리려는 속셈이 분명해 보였다.
“아휴, 네가 말을….”
“위험!”
“…피해!”
그때였다. 네드 자작과 헨치 남작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갑자기 또 무슨…!”
헌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드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