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7. 집결하는 전력
카일의 경고는 동부 가문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아틸런 자작가는 곧장 비상 체제로 전환하고 바런트 왕국의 서부 귀족들의 동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원래 광산을 통해 상인들과 거래가 많은 만큼, 카일처럼 에렌 공국을 통해 동향을 살피는 것은 아틸런 자작가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밀한 정보나 군사적 상황이 아닌 서부 귀족 가문의 일상이나 소문을 알아보는 것은 상인들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허! 그럼 이 보고가 근거가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영주님! 아일론 상단의 보고와 크로먼 백작가의 경고, 그리고 에렌 공국의 상단을 통해 알아본 바런트 왕국의 서부 퍼뮤 남작가의 동향을 보았을 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 만약 급습을 당했다면?”
“와이번의 숫자에 따라 다르겠지요. 일단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습격한다면 사실상 대응 방법이 없습니다. 본가의 와이번이 날아오르기도 전에 기습공격을 당한다면….”
“제대로 된 대응도 하기 전에 전멸당하겠군!”
“그렇습니다.”
“흠… 좋아! 이번엔 아일론 상단과 크로먼 백작가에 신세를 졌다고 생각해야겠군.”
“제가 이번에 아일론 상단에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상한 소리라니?”
“이번 일을 앞서 예견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래하트 남작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번에 크로먼 백작가에 새로 장원가로 등록된 곳이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잘 알고 있지! 카일 공방을 말하는 것 아닌가? 아이론 상단의 요청으로 영지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 공방. 지금 마시는 찻잔을 만드는 곳 말이야!”
“맞습니다. 바로 그곳 장원의 공방장이 이번 일을 예측했다고 했습니다. 듣기론 지난번 장원가로 협상을 해 크로먼 백작가에게서 타바른 협곡을 얻어 냈다고 합니다.”
“타바론 협곡? 그것을 래하트 남작이 남부 방어 거점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곳 방어 자체를 피라네시아 장원에 일임한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장원에서 건립한 요새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평원 전체를 피라네사아 장원에 넘겼단 말이군.”
“네. 레하트 남작으로선 남부 방어에 한시름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군.”
아틸런 자작가의 가주 코닐 자작은 얼굴이 찌푸려졌다. 동부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아틸런 자작가로선 백작가의 전력이 상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부 병력 일부를 이동시켰을 것 같은데?”
“네, 알아본 바론 남부 병력 대부분들 펠트 요새로 보냈다고 합니다.”
“확실히, 에바크 산맥을 넘어 공격해 올 와이번을 감시하려면 펠트 요새 만 한 곳이 없지.”
“그렇습니다.”
코닐 자작은 찻잔을 들어 차향을 음미하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아까운 인재를 놓치긴 했어… 그래도 잘 주시하고 있으라고. 속 좁은 백작이 언제 카일이란 녀석을 내칠지 모르니까 말이야.”
코닐 자작의 말에 총관인 바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장원에 사람을 심어 두겠습니다.”
총관의 말에 코닐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잘못하다가 발각당하면 오히려 반감을 줄 수 있어. 일단 백작성을 통해 동향만 파악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좋아! 우리도 준비 해야겠지, 일단 각 최전방 마을에 봉화를 설치하고 놈들이 나타나면 연기로 신호를 보내도록 하게.”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코일 자작은 바브 총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크로먼 백작가로 한 명의 병사가 빠르게 성문 앞으로 말을 달려왔다.
* * *
덜컹-
묵직한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의 열리며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크로먼 백작이 천천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크로먼 백작가는 백작이 직접 갑주를 입고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이번 전쟁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갑주가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백작에게 왜소한 체구에 작은 키, 키보다 월등히 큰 대검을 비끄러맨 사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3년 전 왕실 파티에서 뵙고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니… 자넨, 아이작 남작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던 백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포트리안 자작가에서 사람이 온다고 하더니 자네가 온 건가?”
“크로먼 백작가란 말에 제가 직접 자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하! 자네 형님께서 골치가 좀 아팠겠군.”
아이작 남작은 포트리안 자작가의 기사단장으로 현 포트리안 자작의 동생이었다. 원래 왕실 근위 기사로 근무하던 중 전대 기사단장의 강권에 못 이겨 자작가로 돌아오면서 남작 위를 받고 기사단장에 오른 인물로, 래하트 남작과 겨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다만 성격이 자유롭고 고집이 세다 보니 형인 포트리안 자작의 잔소리를 달고 사는 인물이었다.
“어쩌겠습니까? 왕실 기사단에서 잘살고 있는 사람을 데려왔으니, 형님이 감당하셔야 할 일이죠.”
아이작 남작의 태연한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자넨 정말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변한 게 하나 없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일 난답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백작님께서도 갑주가 제법 잘 어울리십니다.”
“그런 말 말게, 이젠 나잇살을 먹어서인지 갑주가 맞지 않는다네.”
백작이 불편한 갑주를 매만지며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 자네가 와이번을 데려왔다지?”
“그렇습니다. 모두 다섯 기입니다. 따로 트라발트 공작령에서도 20기, 왕실에서도 10기의 와이번 나이트가 오는 중입니다.”
“지금… 왕실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왕실에서도 이번 일을 제법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허, 왕실에서까지 지원병이 온단 말인가?”
크로먼 백작이 놀라 물었다. 사실 백작은 피라네시아 장원에서 흘러나온 이번 정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지만, 래하트 남작과 오랜만에 마음이 맞은 재정관 케프 남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대비하여 비상 체제로 전환했다. 그런데 트라발트 공작가에 이어 따로 정보조직까지 갖춘 왕실까지 지원병을 파병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자, 백작으로선 피라네시아 장원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카일의 경고대로 바런트 왕국이 그들을 습격해온다면,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왕실에 보고한 백작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도 왕실 근위 기사단 동료의 연락을 받고 알았습니다. 듣기론 아주 높은 분이 함께 내려올 거라 들었습니다.”
“높은 분이라니, 혹 누가 내려오는지 아는가?”
“거기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제 동료도 근위 기사단에선 제법 지위가 높은데, 도통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설마… 근위 기사단장이 직접 오는 건 아니겠지.”
“…근위 기사단장님은 국왕 전하의 옆을 떠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단장님이 직접 오시진 않을 겁니다.”
“…흠, 왕실 지원병이 도착해 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회의실 안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누가 오든 왕실 소속 고위 귀족이 온다는 것은 백작 가문으로선 영광이었다. 하지만 재정 여력이 부족한 백작 가문의 재정관 케프 남작은 그들을 접대하고 관리할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카일을 만나봐야겠습니다.”
“허허, 이미 타베론 협곡의 요새 건립으로 재정 소요가 많았을 텐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그래도 지금으로선 손을 벌릴 곳이 그곳뿐이니 어쩌겠습니까? 제루아에게 들어보니 이번에 에렌 공국의 하멜 상단과 장기계약을 맺었다 했습니다. 자금 사정이 제법 괜찮을 겁니다.”
“이제 보니 제루아를 공방에 남겨둔 이유가 있었구려.”
“클클, 이거야 부수적인 이유고, 진짜 이유야 따로 있지요.”
“진짜 이유라니… 자네 설마!”
“동부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일가를 이룬 아이도 없지요.”
“하지만 그에겐 다른 이가 있지 않나?”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일이죠.”
“허허, 자넨 완전히 마음을 굳힌 모양이군.”
“왜 이러십니까? 단장께서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습니까?”
케프 남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녀석의 창술에 좀 관심이 있을 뿐이네.”
“그런 말 마십시오. 제가 단장을 모를 것 같습니까? 아마 단장께서도 딸이 있었다면 저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 아니래도….”
“관심 있으시면 이번 기회에 양녀라도 하나 얻어 보시지요. 혹시 압니까?”
케프 남작이 장난치듯 웃으며 말하자, 래하트 남작은 정말로 관심이 있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양녀라.”
“크흠… 두 분께서 하실 말씀이 많은 것 같은데. 잡담은 회의가 끝나고 하시지요.”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흠… 송구합니다.”
“죄송합니다.”
재정관과 기사단장이 백작과 아이작 남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기사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와 래하트 남작에게 양피지 하나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래하트 남작이 서둘러 양피지를 확인하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바런트 왕국의 놈들을 찾았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녀석들은 이곳에서 와이번을 타고 하루 정도 거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쯤에 놈들의 야영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래하트 남작의 말에 아이작 남작이 놀란 얼굴로 래하트 남작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이 하루거리에 도착했다면 결국 에바크 산맥에 머물고 있다는 말인데, 어떻게 정찰을 했단 말입니까? 설마 산맥 안으로 정찰대를 파견하신 겁니까? 허!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일 텐데… 이 아이작, 백작가의 희생과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이작이 일어나 백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와이번을 보유하지 못한 백작가에서 바런트 왕국의 와이번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과 희생을 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이작 남작의 말에 래하트 남작 대신 백작이 서둘러 나섰다.
“노고라니, 왕국에 소속된 일원인 백작가로서는 당연한 조치일세, 아쉽게도 와이번이 없는 우리로선 이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라네.”
“이 정도라니, 당치 않습니다. 에바크 산맥은 그 자체로도 위험한 지역이 아닙니까? 이런 곳에 정찰대를 보내 적들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녀석들을 발견했다면 당장 절반의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 남작의 말에 회의장 분위기는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으로 화기애애했지만 래하트 남작과 케프 남작만이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녀석들의 규모는 대략 30에서 40기 정도라고 하는군요.”
“생각보단 숫자가 적군요. 적어도 50기 이상은 동원해 티엘 백작가의 후방을 노릴 거라 생각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만약 적들에게 블랙 와이번이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이작 남작이 놀란 얼굴로 래하트남작을 바라보았다.
“지금 블랙 와이번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보고에 따르면 다소 낡은 레더 아머에 블랙 와이번을 탄 인물이 내렸다고 했습니다.”
래하트 남작의 말에 잠시 고민 하던 아이작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동부의 무어 자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략무기로 분류되는 와이번은 대부분 왕실 소속이거나 권력과 재력이 많은 가문에 소속된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동부의 무어 자작만은 다릅니다. 왕실의 지원과 소속을 거부하고 자체적으로 블랙 와이번을 보유하고 있는 거의 유일의 가문이라 들었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경제적인 사정이 좋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녀석들의 숫자는 그저 숫자에 불가하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 사실을 따로 왕실에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블랙 와이번을 상대하려면 로사르 백작님께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사르 백작이면, 왕실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이 아닌가? 그 사람을 불러야 할 정도란 말인가?”
“블랙 와이번이지 않습니까? 최소한 레드 와이번은 되어야 상대가 가능할 겁니다.”
“…흠.”
아이작의 말에 래하트 남작이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와이번은 스피드에서는 레드나 골드 와이번에 뒤지는 단점이 있지만, 화이트 와이번을 제외한 가장 큰 동체와 파워 덕분에 공중전에 있어서 가장 강한 와이번 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이미 수십 년 전 블랙 와이번 오너가 된 노련한 와이번 나이트이자 상급 엑스퍼트로 그에겐 와이번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블랙 와이번의 오너가 나타난 이상 당분간 공격보다는 방어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아틸런 자작가를 비롯한 동부 가문에게도 연통을 넣어 놓겠네.”
“부탁드립니다.”
아이작이 케프 남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카일이 전해준 정보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무어 자작 뿐만 아니라 남부의 네드 자작이 20여 명의 와이번 나이트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