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71화 (371/404)

외전 - 105. 포윅숲 전투(2)

“헉헉!”

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포윅 숲 안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기병의 추격은 없었다. 아직 살아남은 자경단의 숫자가 많았고 숲 안에선 기병의 공격력이 제한되기에 숲 외곽 경계에서 멈춰 선 것이다.

“빌어먹을! 살아남은 자경단이 절반도 안 된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자경단을 보며 조셉이 분통을 터트렸다.

“정예기병의 추적에서 절반이나 살아남았다면 그것 역시 대단한 것이네. 너무 자책할 것 없어!”

볼란이 다가와 위로했다. 급작스럽게 만난 기병을 상대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전투를 치르고도 아직 절반 이상의 병력이 남았을 뿐 아니라, 적 기병대에 상당한 타격까지 입혔다. 볼란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얀이나 조셉의 경우는 달랐다. 자경단원들 모두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친구이자 동료이며 이웃집 아저씨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절반이 차가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두 사람으로선 볼란의 위로가 오히려 차가운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걸…!”

조셉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릴 지르려 했지만 얀이 조셉의 어깨를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볼란 님도 함께 온 기사들을 모두 잃었다. 그분들이 후위를 지켜줘서 자경단이 이만큼이나 살아남은 거다.”

얀이 볼란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럴 거 없네, 그들은 기사로서 명예롭게 죽었으니. 오히려 그들과 함께 죽지 못한 내가 부끄러울 뿐이지.”

볼란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후위에 남아 기병대를 막아섰지만, 마지막 순간 숲에서 빠져나온 얀의 맹렬한 공격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해 숲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런 말 마십시오.”

얀이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닙니다.”

“남은 병력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건… 힘들어.”

“우리가 전투를 끝내고 싶어도 저쪽에서 우릴 살려 보내려 하지 않을 겁니다.”

얀이 숲 외곽 경계를 맴도는 기병대를 가리켰다. 포윅 숲은 넓고 방대한 면적을 가진 숲이지만 그렇다고 숲 전체가 나무로 뒤덮인 것은 아니다. 북쪽으론 높은 언덕과 빽빽한 수림이 크레센트 숲까지 길게 이어진 반면 남쪽은 낮고 완만한 구릉과 능선 사이, 크고 작은 숲들이 남쪽 레드스톤 지대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자경단이 숨어든 숲 역시 구릉과 구릉 사이에 형성된 작은 크기의 숲으로, 사실상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날이 어두워져야 움직일 수 있겠군.”

“화공만 쓰지 않는다면 그럴 겁니다.”

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말게, 당분간 화공은 쓰지 않을 테니.”

“숲의 크기도 작은 데다가, 지금 우린 구릉 사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화공을 쓴다 해도 다른 곳으로 번질 염려가 없으니, 저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겁니다.”

“글쎄. 화공을 쓰면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 후엔 어떻게 되겠나?”

“…?”

“연기와 빛은 먼 곳에서도 볼 수 있지! 하물며 이곳은 영주성과도 멀지 않아! 화공을 쓰는 순간 아킨스 자작도 이곳 사정을 살피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거야! 그럼 저들도 정체가 금방 발각당할 텐데, 쉽게 쓰긴 힘들겠지.”

“그럼 저희가 먼저 연기를 피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기를 보면 아킨스 자작이 병력을 파견하지 않겠습니다.”

조셉의 말에 얀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랬다간, 적들도 망설이지 않고 숲에 불을 지를 거다.”

“얀의 말이 맞네, 정체가 드러났다고 판단되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으니 지금은 상황을 보며 판단하는 것이 좋겠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날이 어두워지면 소규모 부대를 나눠 기습하거나 숲을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얀의 말에 볼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까지 적들이 지켜보진 않을 거야! 어쩌면 전열을 정비하고 곧 숲 안으로 진입해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지.”

“자경단은 원래가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병력입니다. 숲에서의 전투라면 오히려 이쪽이 유리합니다.”

“그렇긴 한데, 상대의 병력이 월등하니 그것이 걱정이야.”

볼란의 말에 얀과 조셉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숲에 능한 자경단이라도 세 배에 달하는 기병대를 모두 상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숲 안쪽에서도 자경단의 하위 조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조장들은 다 모인 건가?”

델프의 물음에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주변을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많군.”

“전투 초반, 가장 앞 열에 있던 투창조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남은 투창병은 몇 명이나 되나?”

“28명이 살아남았는데, 모두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붉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헬켄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다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오틴! 경거망동하지 마라!”

헬켄의 말에 벌떡 일어난 거구의 사내를 델프가 제지했다.

“형님! 수백의 형제들이 죽었습니다. 정말 이대로 참고 있어야 합니까?”

“그럼 어쩔 생각이냐!”

“당장 조셉과 얀! 그 녀석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녀석들은 엑스퍼트다. 우리 모두가 달려간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쓸데없는 죽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가만히 있을 생각이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차라리 우리도 떠납시다.”

“당장 기병을 피해 도망가기도 힘들지만, 설령 도망에 성공한다고 해도 남작이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걸 모를 정도로 제가 멍청한 줄 아십니까?”

오틴의 말에 델프와 헬켄은 물론 조장들까지 오틴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얀과 조셉, 볼란 경까지! 이들 셋을 죽이고 사라지는 겁니다.”

“사라져?”

“그들이 모두 죽으면 가족들이 무시하지 못할 거다.”

“왜 가족들이 위험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우리가 죽인 게 아닌데요?”

“무슨 말이냐? 조금 전 얀과 조셉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오틴의 말에 가장 먼저 헬켄이 눈을 크게 뜨고 오틴을 바라보았다.

“너!”

“어? 너, 벌써 눈치챈 거냐?”

“헬켄은 이미 눈치챈 것 같은데, 자네가 말해보게!”

“오틴의 말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전부가 전멸한 척 위장하자는 말인 것 같습니다.”

“위장?”

헬켄의 말에 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적 기병에게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남작도 가족들을 괴롭히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숲 외곽은 기병들이 철저하게 막고 있네, 위장을 하더라도 저들을 상대할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해!”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을 상대하지 않고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간단 말인가?”

“간단합니다. 화공입니다.”

“지금… 화공이라고 했나?”

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 불을 질러 아킨스 자작령에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숲에 불을 질렀다간 우리 모두 불에 타 죽을 거야!”

“그게…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닐 수도 있다니! 정확히 어떤 계획인지 솔직히 말해보게!”

델프가 답답한 듯 소리치자 오틴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힐끔 고개를 돌려 뒤편을 돌아보곤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숲이 협곡을 따라 동서로 긴데… 바람이…!”

오틴이 갑자기 횡설수설하며 뒤쪽을 힐끔거리자 델프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제 보니, 자네 생각이 아니군.”

“예? 아, 아닙니다.”

“지금 자경단원 전체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일에 거짓을 말할 생각인가?”

“아니, 그…!”

오틴은 델프의 추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자 보다 못한 자경대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 중인 조장들에게 다가왔다.

“누구냐? 여긴 조장들이 모인 곳이다. 돌아가라!”

선임 자경대원 중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

“들여보내 줘라!”

델프는 이미 짐작했는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

“오틴 녀석을 오래 봐온 나다. 그만한 계획이 녀석의 머리에서 나왔을 리가 없지.”

델프의 말에 오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일단 앉거라! 캐츠.”

“역시 알아보셨군요.”

캐츠가 투구를 벗더니 한쪽에 비어 있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앉았다.

“먼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고 말하는 거냐!”

호큰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만 캐츠는 침착하게 반박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땐 기병들과 뒤섞여 난전이 벌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들, 너희들이 떠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오히려 되묻고 싶군요. 저희들을 왜 추적해온 겁니까? 저흴 잡으러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뭐라고!”

호큰이 당장이라도 캐츠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소리치자 헬켄이 급히 그를 붙잡았다.

“놔! 저 녀석! 죽여버릴 거야!”

호큰이 헬켄을 밀어내려 했지만 덩치 큰 헬켄의 힘을 당해 내진 못했다.

“얀과 조셉 때문이란 변명은 하지 마십시오. 아직 자경단의 대장은 마스터입니다.”

날카롭게 노려보는 캐츠의 시선에 발버둥치던 호크가 멈춰 섰다. 맞다. 캐츠의 말대로 다핸 남작이 아직 보일의 천인대장 직을 거두지 않았고 얀과 조셉 역시 아직은 기사서임을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무리 강요해도 조장들이 추적을 거부하고 버텼다면 자경대가 추적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네 말이 맞네, 우리가 거부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었네. 영지병들이 마을에 있는 이상 얀과 조셉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어쨌든 우린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으니 말이야!”

“저희도 다르지 않습니다.”

“알고 있네, 자네들에게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 쉽게 나서긴 힘든 일이겠지.”

델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큰을 바라보았다.

“흥분이 가라앉았다면 그만 자리에 앉아!”

“…죄송합니다. 형님.”

“사과는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찾아온 캐츠에게 해라!”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는가입니다.”

캐츠의 말에 델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자넨 이곳에 어떻게 숨어든 건가? 기병들의 경계가 제법 삼엄한데?”

“숲으로 후퇴하는 걸 보고는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 숨어들었습니다. 오틴 님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어 잠시 합류했고요.”

캐츠의 말에 오틴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됐다. 그 일은 나중에 논하고, 화공작전은 자네가 말해준 건가?”

“전, 그저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작전은 폴론 님이 생각하신 겁니다.”

“숲에 불을 내겠다. 위험한 발상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건, 델프 님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캐츠의 말에 델프가 한참을 고심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아킨스 자작령에 이 사실을 알리는 건 어떤가? 자작가의 지원병이 온다면 기병들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델프의 말은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아킨스 자작이 과연 병력을 내어주겠습니까?”

“그건…!”

“다핸 남작령의 병력 이백이 자작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포윅 숲까지 진출했습니다. 지원은 커녕 공격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델프와 조장들이 캐츠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타 영지의 병력이 영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상대의 영지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 사실상의 공격행위로 간주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킨스 자작과 다핸 남작가 사이가 원만하다면 어느 정도 사정을 이해하고 원만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두 가문 사이가 당장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최악의 관계라는 건 영주성에서 멀리 떨어진 샤론 마을까지 알려질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킨스 자작에게 구원을 요청한다면 병력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를 빌미로 다핸 남작가를 더더욱 압박하려 할 것이다.

“결국 우리 힘으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인데, 정말, 화공을 쓰면 모두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솔직히 저도 알 수는 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캐츠의 말에 델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얀과 조셉… 그들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들까지 구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저흴 잡는 거니까요.”

캐츠의 말에 델프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획은 언제 시작하면 좋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자칫 기병이 먼저 습격하거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계획이 틀어질 수 있으니까요.”

“좋아! 시간을 끌 것 없으니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네, 일단 각 조장들,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조원들을 불러 모으게!”

“알겠습니다.”

델프가 결정을 내리자 조장들이 곧장 주변으로 흩어져 은밀하게 자신들의 조원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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