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3. 전쟁의 목적
“휴! 이 문젠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요. 일단 가문에 사실을 알리는 것이 어떨까요?”
제루아의 말에 베아트리 영애가 가장 먼저 반대 했다.
“안 돼요! 그랬다간 카일의 와이번을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빼앗으려 할 거예요.”
“그렇다고 이대로 전장이 확대되는 걸 지켜볼 수는 없잖아요.”
“설마, 이 사실을 알린다고 전쟁이 끝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한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지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진 않을까요?”
“백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카일에게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려 할 거예요. 결국 우린 전쟁을 끝내지도 못하면서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죠.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하죠?”
“그건….”
“그리고 이미 전쟁은 일어났어요. 설령 카일이 와이번을 아서 가문에 돌려준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아요. 오히려 전쟁의 명분만 더 확고히 할 뿐이죠.”
“저 역시 레토아를 내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카일의 단호한 말에 비터와 마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잔 말인가요?”
“그럴 수는 없죠.”
“무슨… 뜻이죠?”
“잊었나요. 에렌 공국 상인의 경고?”
“와이번!”
“맞아요. 일단 백작가와 아틸런 자작가에 경고를 하는 거죠. 머리가 있다면 대비를 할 거예요.”
“좋은 방법이군요. 저희도 에바크 산맥 일대를 정찰하며 와이번 무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알겠어요. 일단 전 곧바로 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릴게요. 아마도 에렌 공국 상인과 접촉한 이유도 함께 설명해야 할 거예요.”
그동안 비밀로 했던 도자기 거래 내용을 밝히겠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죠. 감수하겠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찾아오실 거예요.”
국내가 아닌 국외 도자기 거래의 가능성이 열렸으니 크로먼 상단주로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루아 씨에게 일임하죠.”
“지금… 제게 국외 거래 일체를 맡기겠단 말로 들리는데, 맞나요.”
“세밀한 사항에 대해선 논의를 거쳐야겠지만, 일단 그렇습니다. 크로먼 상단의 일도 제루아 씨께서 함께 해결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카일의 말에 제루아의 굳어있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걱정 마세요. 제가 깔끔하게 해결하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일론 상단을 통하면 아틸런 자작가에도 소식이 쉽게 전해질 겁니다. 토일 지부장님과는 제가 만나보겠어요.”
아일론 상회는 본점을 공작가로 옮기면서 카일과의 거래를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백작가에 지부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 지부장 역시 카일과 친분이 두터운 토일이 맡고 있었다. 아미도 베아트리 영애가 직접 토일에게 경고를 해준다면, 쉽게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기사단장인 래하트 남작이 아톱스와 함께 직접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장원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장원의 규모와 시설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원을 가로지르는 수로로 반듯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작은 집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케프 남작이 늦은 저녁 찾아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네. 그래서 자네의 의견도 함께 들어보려 찾아왔다네.”
“전 전력이나 전술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겸손할 것 없네. 장원의 위치나 수로의 설계, 마을의 배치까지 모두 자네의 뜻이 반영되었단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이야! 모두 장원의 방어에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더군.”
“…그건.”
“그저 의견을 듣자는 것이니 부담가질 것 없네.”
래하트 남작이 아톱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아톱스가 커다란 양피지를 탁자 위에 펼쳤다.
“에바크 산맥과 동부 인근 지형을 대략적으로 그려놓은 지도라네!”
정확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대략적인 위치와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군사지도라고 할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아일론 상회에도 경고를 했다지? 아틸런 자작가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어떤가. 만약 자네가 적국의 사령관이라면 이번 전쟁에서 저들이 노리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담 없이 이야기해 보게. 이런 경고를 했을 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을 것 아닌가?”
래하트 남작의 재촉에 카일의 시선이 베아트리 영애를 잠시 향했다. 어제저녁, 두 사람은 바런트 왕국의 목적에 대해 깊은 논의를 했었다.
“전쟁의 목적은 결국,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익?”
“그렇습니다.”
“언뜻 보기엔 와이번을 동원한 단독 공격 같지만, 과연 지상군의 참전이 없을까요?”
“와이번이 오히려 미끼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오히려 티렐 백작가와 아서 가문의 전쟁 자체가 미끼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무에 시선이 쏠린 사이 와이번과 지상 병력을 투입한다?”
“와이번의 빠른 기동력을 생각한다면 지상군 대부분은 기사단이나 기마대일 거라 생각합니다.”
카일의 말에 래하트 남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단순히 와이번의 단독 공격일 때와 달리 기마대나 기병대가 와이번 나이트와 함께 남부와 동부를 휩쓴다면 전력을 제대로 집중시키지 못한 남부나 동부의 영지들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티렐 백작가의 전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만약 제가 바런트 왕국의 사령관이라면, 먼저 와이번 나이트를 동원해 동부와 중부 영지를 기습하며 동시에 기병을 동원, 티렐 백작 가문을 지원하러 백작가로 향하는 남부 병력을 요격할 겁니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넓은 곳을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하겠다는 말이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왕국의 전력 역시 넓게 분산시킬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왕국의 전력이 분산될 때 오히려 전력을 집중해 한 곳을 공격한다면….”
카일의 손가락이 포트리안 자작령을 가리켰다.
“동부와 남부에서 티렐 백작가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이곳만 점령하면….”
“앞뒤에서 공격받은 티렐 백작가는 이틀을 버티지 못하겠군.”
“반면 왕국이 흩어진 병력을 모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이걸 자네가 생각했단 말인가?”
“여기 베아트리 영애의 도움으로 고민해 본 것일 뿐, 정확하지도 않고 오류도 많습니다.”
“아니야! 충분히 일리가 있네. 정말 그 같은 공격을 한다면 대항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아마도 왕국에선 적들의 뒤꽁무니만 쫓다가 어이없이 땅을 내어주고 말았을 거야!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네. 왜 포트리안 자작가가 아닌 아틸런 자작가에게 먼저 경고를 보낸 것인가?”
“제가 생각하기에 동부에서 가장 취약한 곳은 공중 전력이 부족한 크로먼 백작가와 아틸런 자작가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예측이지만, 적긴 해도 와이번 전력을 확보한 아틸런 자작가가 가장 첫 번째 타깃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아틸런 자작가의 와이번이 무너지면, 포트리안 자작가의 전력으론 와이번을 막긴 힘들어지겠군요.”
야톱스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좋은 지적이야! 아톱스 부단장!”
“네!”
“자넨 이 길로 아틸런 자작가로 가게! 아일론 상회를 통해 말이 전달되었다고는 해도 자네가 직접 지금의 심각성을 알리게, 포트리안 자작가는 내가 직접 찾아가지!”
“알겠습니다!”
아톱스는 카일과 래하트 남작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포트리안 자작가로 가서 와이번을 펠트 요새로 데려올 것이네!”
펠트 요새는 백작성 동부에 위치한 몬스터 방어 요새로 현재 백작가 대부분의 전력들이 이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안하네만, 펠트 요새의 와이번은 위급한 상황이 오면 아틸런 자작가와 연합해 싸워야 되기에 자네 장원을 지키기 위해 남하시킬 수는 없을 것 같네! 자칫 전력의 분산으로 각계격파 될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네!”
래하트 남작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원은 자체적으로 방어할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 케프 남작도 그런말을 하더군, 자네의 장원은 자체적으로 방어가 가능할 거라 걱정 말라고….”
“재정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렇네. 헌데 정말 괜찮겠나? 잠시 장원 사람들을 영지 안으로 피신시키는 것은 어떤가? 백작님께는 직접 말씀을 올려 보겠네.”
래하트 남작이 해줄 수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와이번들도 전략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장원보다는 오히려 백작성이나 펠트 요새 쪽으로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일의 말에 래하트 남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좋네! 자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무사함을 기원하는 수밖에는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엄청 바쁠 것 같군.”
래하트 남작이 고개를 흔들며 서둘러 장원을 떠나고 곧이어 비터와 마크가 들어왔다.
“알아봤어?”
“그래! 알아봤다. 하멜 상단의 말로는 얼마 전부터 바런트 왕국의 퍼뮤 남작가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더군.”
“퍼뮤 남작가?”
“바런트 왕국 서부의 작은 남작가인데, 이곳에 하멜 상단과 거래 중인 작은 상단이 얼마 전 이상한 말을 했다더군.”
“이상한 말?”
“용병 복장을 한 다수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거야!”
“사라져?”
“그래! 헌데 그 숫자가 수백에 달한다더라고. 일단 남작가에서 최대한 입을 막음을 하고 있어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분명 이상하긴 해.”
카일은 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정보를 더 얻을까 해서 에렌 공국의 하멜 상단에 알아본 것이 의외의 정보를 얻은 것이다. 물론 마법 통신을 이용한 덕분에 하멜 상단은 크로노스 왕국뿐만 아니라 바런트 왕국과도 교역을 할 수 있었고, 주로 바런트 왕국의 서부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법 통신을 넣어 알아본 것이다. 4골드가 날아갔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정말이냐?”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은 이 방법뿐인 것 같아요. 시간도 없고요.”
“휴! 맞는 말이긴 한데….”
“뭔 걱정이야! 카일이 고민하고 결정 한 일인데, 잘 될거다.”
비터가 밝게 웃으며 마크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카일이 선택했으니….”
“좋아요. 일단 출발은 삼일 뒤! 시간이 좀 촉박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알겠다! 최선을 다해 훈련 시켜 보겠다.”
“부탁드려요.”
“그동안 비터도 고생 좀 해주세요.”
카일의 말에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공중 정찰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비터가 가슴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하자 피식 웃음을 지은 카일이 돌아섰다.
“그럼 전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준비할 게 많네요.”
“그래, 수고해라!”
“네! 그럴게요.”
카일이 손을 흔들며 공방 안쪽 깊은 곳에 자리한 작업실로 향했다.
“이제야 온 거냐?”
작업실 한쪽, 작달 만한 키에 긴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카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떠세요?”
“이제 겨우 하나 완성한 것 같다.”
“정말이세요?”
카일이 깜짝 놀라 노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빼앗듯이 손에 쥐곤 살폈다.
“이걸 정말 한번 보고 만들었다고요?”
“클클, 이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이번이 처음이라 시간이 걸렸지만, 손에 익기 시작하면 이보다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거다.”
“감사해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아니다. 오히려 이런 놀라운 걸 알려줘서 내가 더 고마운 일이지! 그보다 어서 맞춰 보거라! 제대로 만들었는지 한번 보고 싶구나!”
“잠시만!”
카일이 한쪽 벽면에 걸쳐 놓은 기다란 쇠 막대를 들어 조금 전 노인이 만든 물건을 결합했다.
철컥-
“잘 된 거냐?”
“네! 아주 훌륭해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아니다. 나도 라이플이란 걸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구나!”
“아닙니다. 30정이 넘는 라이플을 생산해야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덕분에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걸 30정이나 더 만든단 말이냐?”
환하게 웃던 호빗 노인 고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고투 역시 라이플의 정확한 위력은 알지 못하지만, 상당히 위협적인 마법 무구란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다.
“설마 이번 전쟁 때문이냐?”
“네, 생각보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들에게 초기형으로 만들어 보급할 생각입니다.”
“하긴, 많은 사람을 지켜내려면 무력도 필요한 법이지. 알겠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공짜로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네?”
“설마… 공짜로 도와 달라고 한 것이냐?”
정색하고 돌아선 고투의 물음에 카일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당연히 원하시는 만큼 드려야죠.”
“크흠, 당연히 그래야지!”
고투가 난감한 얼굴로 서 있는 카일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자리로 돌아가 방아틀 뭉치를 새롭게 조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