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2. 추적대
깊은 어둠 속, 숲을 헤치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곳인가?”
“네, 이, 이곳이 레드… 강 상, 상류에서도 가장 얕은 곳입니다요.”
고개를 잔뜩 움츠린 노인이 바닥에 엎드려 고했다.
“확인해라!”
검은 가죽 피풍의를 두른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강을 살피더니 곧장 검은 피풍의 사내에게 다가와 부복했다.
“유속이 빠르긴 하지만 수심이 옅고 바닥을 다져놓아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바닥을 다져놓았다?”
피풍의 사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에 엎드린 사내에게로 향했다.
“네놈들이 만든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요.”
“재밌군, 상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덕분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럼, 약속은 지켜주시는 겁니까?”
“약속? 아! 가족들을 말하는 것인가?”
피풍의 사내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요, 여길 알려드리면 마을과 가족들을 살려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것 말인가? 물론 약속은 지킬 것이네, 마을이 아직 남아있다면 말이지!”
“무슨,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엎드려 있던 노인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밀수를 돕거나, 행하는 자는 모두 참한다! 너도 알 것이 아니냐!”
“하, 하지만 약속을,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이야! 약속은 약속이니,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네의 가족과 마을 사람이 있다면 살려주겠네, 물론 아직 살아남은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야!”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노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 안돼! 코엘 자작! 당신은 약속을 했다. 나와 약속을 했단 말이다!”
노인이 울부짖으며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코엘 자작에게 달려들었다.
퍽-
조금 전까지 바닥에 부복해있던 검은 피풍의 사내가 어느새 일어나 노인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억-”
노인은 피를 토하며 뒹굴면서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닥을 기어 자작을 향해 다가서려 했다.
스릉-
검은 피풍의 사내가 검을 뽑아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만!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코엘이 싸늘하게 웃으며 노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노인장은 약속대로 살려주지! 하지만 조금 전 귀족인 날 능멸한 벌은 내려야겠지?”
코엘이 피풍의 사내의 검을 빼앗더니 곧장 노인을 향해 내리그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노인의 왼쪽 어깨가 잘려 나갔다.
“으윽! 널,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
노인의 외침에 코엘 자작이 피식 웃었다.
“큭큭, 네놈이 날 죽이겠다고… 좋다. 원한다면 찾아와라!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반드시… 네놈을 반드시…!”
코엘 자작을 죽일 듯 노려보던 노인이 결국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코엘이 돌아섰다.
“날아 밝기 전 산맥을 벗어나야 한다. 크롤 기사단과 기병들은 신속히 도강하라!”
코앨 자작의 명에 검은 피풍의를 두른 크롤 기사단과 기병 수백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휴,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왔군!”
한동안 멍하니 영주성을 바라보던 폴론이 고개를 흔들며 투스를 돌아봤다.
“표식은?”
“미리 나와 있던 녀석들까지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다. 우리가 마지막이다.”
“다행이군.”
“저기, 형! 좀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약속한 시각까지 자작성에 도착하려면 빠듯할 것 같은데요.”
“녀석, 얀과 조셉이 쫓아올 것 같아 걱정이냐?”
폰티가 캐츠의 어깨를 툭 치며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솔직히… 그래요. 오래전 매튜 형에게 들었는데, 둘 다 오랫동안 순찰대 조장을 하면서 익힌 추적술이 대단하다고 했거든요.”
캐츠의 말에 투스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추적술을 잠시 잊고 있었군.”
“아무래도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얀, 그 녀석이면 지금 당장 성문을 열고 쫓아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어.”
폴론이 성문을 잠시 노려보다니 고개를 돌려 언덕을 빠르게 내려가자 그 뒤를 형제들이 다급히 뒤쫓았다.
“빌어먹을! 감히 날 속여!”
얼마 전까지 폴락 형제들이 머물렀던 언덕 위 남은 미세한 표식을 보며 조셉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얀이 재빨리 다가와 제지했다.
“멍청하게 굴지 마! 단장님께서 계신 자리다.”
얀의 말에 조셉이 화를 누그러트리며 켈토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아니, 괜찮아! 그보다 여기 녀석들이 있었던 것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녀석들은 조를 나눠 성을 빠져나온 뒤 저기 교차로 가지가 꺾인 나무에 표식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모두 용병패를 지니고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캐츠라는 녀석이 은밀히 마을로 돌아와 전해준 것 같습니다.”
“캐츠? 보일의 제자 중 그런 녀석이 있었던가?”
“마스터께서 새롭게 받아들인 세 녀석 중 하나입니다. 다른 두 녀석과 달리 떠돌이 유민 출신으로 몇 해 전 영주성으로 왔다가 어미는 병으로 죽고 홀로 남은 걸 마스터께서 거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얀의 말에 켈토 단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유민이라… 그 녀석, 실력은 어떤가?”
“셋 모두 비슷합니다. 그중 캐츠의 실력이 가장 떨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체구는 작지만 몸이 날래고, 단검술도 제법 잘 쓴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확인한 적은 없나?”
“마을로 돌아오던 날 마스터와 함께 떠나는 바람에 확인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멀리서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입니다.”
“보일 대장이 제법 잘 감춰두고 있었단 말인데, 어떤가?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켈토 단장의 물음에 얀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진 않겠지만 자경단 절반을 끌고 간다면 가능합니다.”
“영지병이 아닌 자경단을 말인가?”
“죄송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영지병들을 쉽게 생각하지 말게. 그들 역시 오랫동안 훈련을 거듭한 정예 병사라네!”
“하지만 실전을 겪지 않았죠. 단장님이라면 그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흠!”
“그리고 자경단은 기본적으로 장궁을 다룹니다. 포위, 생포하려면 희생이 클 겁니다.”
“생포하지 않는다면?”
켈토 단장의 물음에 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곧 차갑게 식은 눈으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얀의 대답에 켈토의 시선이 성밖에 늘어선 자경단을 바라보았다. 모두 질긴 가죽 갑옷에 등에는 장궁을 비스듬히 매고 허리엔 검을 찼다. 창과 방패를 주로 다루는 영지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열흘! 출정까지 남은 시간이야! 그 안엔 반드시 돌아와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수행 기사인 볼란과 기사 몇 명이 따라붙을 거야!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되도록 생포가 목적이지만,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네! 남은 자경대원들에게 영주를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켈토가 고개를 숙인 얀과 조셉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 수행 기사인 볼란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수고해 주게!”
“직접 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영주께서 직접 참전하는 첫 전쟁이니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리고 녀석들을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만약 보일이나 카일이 보인다면 공격을 멈추고 곧장 영지로 돌아오게. 괜한 전투는 희생자만 늘릴 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보일의 실력은 이미 지난 영주의 사냥터에 나타난 트롤로 인해 기사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진 상태로 기사들 중엔 그를 동경하는 자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아마도 보일이 나타난다면 기사들이 알아서 물러나려 할 것이다.
“이만 가보겠네!”
볼란의 어깨를 두드린 켈토 단장은 곧장 말 위에 올라 고개를 숙인 기사들과 자경단 뒤로하고 곧장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볼란이 고개를 돌려 고심에 빠진 얀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자경단이 조별로 흩어져 이동한다면 잡긴 쉽지 않을 텐데?”
“성을 빠져나오기 위해 조별로 흩어지긴 했지만 곧 한곳으로 모여 이동할 겁니다.”
“흩어졌던 조들이 다시 모일 거란 말인가?”
“이번에 마을을 떠난 자경단 중 일부는 가족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습니다. 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집결지에 모여 함께 이동하려 할 겁니다. 우린 그때를 노려 놈들을 서로 잡으면 됩니다.”
“흠…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렇다면 이곳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집결지를 잡았겠군.”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마도 녀석들은 여기 아킨스 자작가에 집결할 겁니다.”
얀의 말에 볼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킨스 영지라… 난감한 곳이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자네들은 변경백인 티렐 백작가를 제외하면 남부에서 가장 강한 가문이 어디라고 생각하나?”
“그야… 켈토 기사단장님이 계신 다핸 남작령이 아닙니까?”
“아쉽지만 아니라네.”
“네?”
“아킨스 가문과 우리 다핸 남작가는 오래전부터 남부 최고의 가문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곳이라네. 사실 기사단의 숫자로만 본다면 아킨스 자작가가 우세했지만 우리에겐 남부 제일이라 할수 있는 켈토 단장님이 계시니 질적으론 우리 다핸 남작가가 우세하다고 할 수 있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얼마 전까지라면, 이젠 질적으로도 아킨스 자작가에 밀린단 말입니까?”
“몇 년 전 아킨스 자작가에서 핀크라는 중급 엑스퍼트를 영입했다고 하더군! 들어보니 이미 완숙한 경지라고 했으니 켈토 단장께서 라하트 단장과 핀크라는 자를 동시에 상대하긴 힘들 거라 생각하고 있다네!”
“흠… 그럼 아킨스 자작가의 도움을 받긴 어렵겠군요.”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거야!”
“영주성 안에서 잡긴 틀렸다는 말이군요.”
얀의 말에 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결국 성 외곽에서 놈들을 잡아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것도 아킨스 자작가가 간섭하기 전 신속하게 해결해야 하네!”
“…쉽지 않은 상황이군요.”
고심에 찬 얀의 표정에 볼란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단장님께서 자넬 도우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군.”
“무슨 말씀입니까?”
“아킨스 자작성 동문을 벗어나면 포윅이란 제법 큰 숲이 있는데, 그곳에 매복한다면 녀석들을 일거에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포윅 숲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영주의 사냥터인 크레센트 숲과도 이어진 곳이라 제법 넓은 숲이긴 하지만 동부로 향하는 길은 한곳 뿐이라네! 내가 지금 길을 알고 있으니 서두르면 저들보다 먼저 도착할 거야!”
“잘됐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얀의 말에 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둘러 가시지요.”
“그러지!”
볼란이 막 말에 오르려 하자 지금껏 입을 닫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셉이 급히 볼란을 향해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한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제가 궁금한 건 참지 못해서 말입니다.”
“조셉! 지금은 녀석들을 잡는 게 먼저다.”
얀이 급히 조셉의 팔을 잡았지만 볼란이 손을 저었다.
“간단한 질문이라면 대답해주지, 궁금한 게 뭔가?”
볼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조금 전 아킨스 자작가와 다핸 남작가가 최고의 가문을 두고 다투고 있다고 하셨는데, 남부 제일의 가문은 티렐 백작가가 아닙니까?”
“하하! 궁금한 게 그거란 말인가?”
“송구합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일단 티렐 백작가는 엄밀히 말하면 남부가 아닌 동부에 속한 가문이네. 동부의 경우 제국과 바런트 왕국 두 곳 모두를 감당할 수 없으니 남부와 가까운 티렐 백작가를 남부로 편입시킨 것뿐 실질적인 티렐 백작가의 세력은 동부에 몰려 있지!”
“아! 그런 것이었군요.”
“이젠 궁금증이 해고된 건가?”
“아… 예! 죄송합니다.”
조셉이 고개를 숙이자 볼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에 올랐다.
“그만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얀이 길게 물어선 자경대를 돌아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출발한다. 목적지는 포윅 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