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99. 대련(1)
끼이익-
달빛마저 사라진 칠흑같이 어두운 밤, 북측 목책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작은 가방을 등에 짊어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소리 없이 빠르게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만 출발하지!”
앞서 사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들이 목책을 벗어났다.
“내가… 여길 떠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군.”
가장 마지막으로 목책을 벗어난 사내가 씁쓸한 목소리로 목책을 돌아보며 말했다.
“폴론 형, 서둘러야 해요. 곧 얀과 조셉이 눈치챌 겁니다.”
캐츠가 다가와 폴론의 빈 소매를 잡았다.
“휴… 그래 가자.”
폴론이 고개를 흔들더니 앞서간 사내들의 뒤를 쫓았다.
“저기… 형, 남은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그들의 선택이니 어쩔 수 없지, 가족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갈 수는 없었을 거다.”
“쟝과 조셉, 그 빌어먹을 녀석들이 그런 결정만 하지 않았어도….”
“녀석들도 다핸 남작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을 테니, 어쩌면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경단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잖아! 우리가 마스터를 배신하면서까지 얻으려 했던 건 우리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이었지, 자경단의 희생이 아니었다고. 마스터께서 어떻게 키워온 자경단인데! 아무리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지리 않아도 이건 아니라고!”
투스가 분노를 토하듯 말했다.
“그만 해요. 형, 어차피 우리가 두 사람을 비난할 자격은 없잖아요.”
폰티의 말에 투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칫! 그래도 우린 대가를 치렀다고, 하지만 녀석들은 아니야.”
투스가 버럭 소릴 지르며 비어버린 오른쪽 소매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있잖아요.”
“얻은 것? 그래. 있지!”
투스가 피식 웃으며 허리에 찬 완만하게 휘어진 검을 툭 쳤다. 팔이 잘리고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찾아온 카일은 보일의 검식과는 전혀 다른 왼손 검식을 전수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단순하지만 강력한 그들만의 새로운 검식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말 마스터가 우릴 다시 받아 줄까요?”
“아이 참!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 절 믿지 못하겠다면, 제가 드린 동패를 믿으세요.”
케츠가 답답한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캐츠는 무트, 테일과 함께 보일이 새롭게 받아들인 제자 중 하나로, 얼마 전 은밀히 마을로 돌아와 이주를 결정한 자경단과 폴론 형제들에게 용병패를 건내주었다.
“폰티! 의심은 그만해라! 케츠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고, 설령 거짓을 말했다고 해도 용병패가 생겼지 않느냐! 마스터께서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뭐! 이번 기회에 함께 세상 구경이나 하지.”
“하하, 세상 구경이라! 그것도 좋긴 하지.”
어둠 속에 잠겨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마을을 외면하던 투스가 애써 웃으며 답했다.
“사실 전 의외였습니다. 마스터께선 절대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영주의 압박도 문제지만,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마스터를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 중 하나겠지, 때마침 카일이 부르기도 했고, 마스터로선 망설일 이유가 없었겠지.”
“난 솔직히 마스터를 따르는 인원이 이렇게 적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수백의 자경단 중 마스터를 따르겠다고 나선 인원이 고작 수십 명 밖에 안되다니.”
“어쩔 수 없다. 영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심적으로야 마스터를 따르고 싶겠지만, 현실적으론 가족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데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다.”
“어차피 결과가 달라지진 않잖아요. 결국 모두 끌려가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가족들은 지킬 수 있을 거다.”
“휴, 그건 그렇죠.”
캐츠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며칠 전 마을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남서부 변경백인 티렌 백작가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바런트 왕국 베지톤 백작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티렌 백작가는 전선의 확대로 피해가 급증하자 남서부 일대에 변경백의 권한으로 동원령을 내리고 각 귀족가에 지원을 요청했다. 다핸 남작은 티렌 백작의 지원요청에 5백 명의 정예 병사와 20명의 기사와 함께 직접 참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웬만한 자작 영지에서도 쉽게 감당하지 못할 대병력을 약속한 것이다. 실제 다핸 남작령 전체 영지병을 모두 모아도 5백 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작에게도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 다름 아닌 샤론 마을 자경대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었다. 보일은 천인장에 오른 뒤 꾸준히 자경단의 숫자를 늘려 수백이 넘는 정예자경단을 조직하고 있었다. 남작은 바로 이들을 주축으로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얀과 조셉이 있었다. 자신들의 충성심과 명예를 높이기 위해 얀과 조셉이 자경단을 이끌고 첨전하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여기에 남작이 동조하면서 티렌 백작가에 말도 안 되는 병력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폴론은 계획을 앞당겨 자경단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삐이익-
그때였다. 마을에서 불화살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젠장! 벌써?”
캐츠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마을에선 하나둘 불꽃이 일어나더니 이내 대낮처럼 밝아졌고, 뒤이어 긴 횃불 행렬이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캐츠! 선두에 최대한 속도를 높이라고 해!”
“네!”
캐츠가 앞서가는 자경대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폴락이 고개를 돌려 긴 횃불 행렬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검을 뽑아 길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나무를 향해 횡으로 휘둘렀다.
스각-
은은한 푸른 기운에 휩싸인 폴락의 검이 단번에 나무를 스치듯 베어내자 거대한 나무가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쿠웅! 소리와 함께 길을 막았다.
“다들 나무를 잘라! 이곳에서 최대한 저지한 뒤 빠져나간다.”
“좋은 생각!”
“다들 들었지, 시작해!”
투스가 가장 먼저 좌측 언덕으로 뛰어들며 나무를 맹렬하게 잘라내자 폰티 역시 우측 숲으로 뛰어들며 빠르게 나무를 잘라냈다.
“폴락!”
그때 멀리서 조셉의 분노한 외침이 들려왔다. 뒤를 쫓는 자경단에 앞서 일행을 뒤쫓아 온 것이다. 폴락은 조셉의 외침에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곧장 앞으로 뜅기듯 달리며 외쳤다.
“이동한다!”
조셉이 왔다면 얀 역시 주변에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검술을 만들고 수많은 실전을 거듭했지만 폴론 일행으로선 아직 조셉과 얀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폴락은 두 사람을 피하기로 결정 한 것이다.
“빌어먹을 녀석들, 감히 도망을 쳐!”
조셉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와 달리 얀은 굳은 얼굴로 어지럽게 쓰러진 나무를 바라보았다.
“녀석들, 생각보다 대단하군!”
“얀! 지금 녀석들을 칭찬하고 있을 때가 아냐! 녀석들을 잡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조셉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다. 곧 참전을 위해 자경단을 이끌고 남작성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자경단을 이끌 폴락 형제와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정예자경단 수십 명이 함께 탈주했다. 얀과 조셉으로선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 녀석들은 어차피 잡히게 되어있어.”
“무슨 소리야?”
“지금은 전시야. 이전과 달리 확실한 신분이 아니면 성을 빠져나가긴 어려울 거란 말이지.”
“하지만 영주성을 우회할 수도 있잖아?”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성 외곽을 우회한다고 해도 하루 이상 걸리고, 도착할 곳도 뻔하니 앞서가서 매복하면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럼 녀석들을 잡는 건 시간 문제란 말이군.”
“변수만 없다면 그렇겠지, 할 수 있는데… 흠.”
얀이 턱을 쓰다듬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잡을 수 있다면서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해서 말이야. 이런 건 폴론 정도면 쉽게 알 텐데, 왜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인 거지?”
“폴론! 맞아, 그 녀석이 있었지?”
그때서야 폴론이 떠올랐는지, 조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참전이 결정되고 자경단이 동원되었다는 말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바로 폴론과 형제들이었다. 군역은 평민으로서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자경단의 참전은 영주인 다핸 남작이 아닌 얀과 조셉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멍청한 녀석들, 평생 오크 때와 싸우다 죽는 것보단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게 더 낫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라고 잡힐 걸 뻔히 알면서 왜 도망을 친 거지?”
“맞아 그게 문제야! 이대로라면 잡힐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 가장 앞장서서 막아야 할 폴론이 왜 함께 도망을 쳤을까?”
“설마! 도망칠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참전이 결정된 건 고작해야 열흘도 안 됐고, 폴론 일행에게 알린 것도 삼 일도 되지 않았어, 도망칠 준비 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해!”
“그럼… 설마! 마스터가 돌아온 건…!”
“아직은 알 수 없지. 일단 녀석들을 쫓아 가보면 뭔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창-
얀이 검을 뽑아 앞길을 막아선 나무를 날라내며 폴론 일행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카일은 캐프 남작과의 협상이 마무리되자 곧장 용병등록 절차에 들어갔다.
공방에 남아 있던 마라스 용병단과 비터, 마크를 통해 끌어들인 용병들을 모아 레드 와이번 용병단을 창단한 다음, 등록서류를 백작가에 정식으로 보고했다. 이후 백작가에서 관련 서류를 다시 왕실에 등록하면 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용병가문 개설과 용병기사 서임 의식은 백작성에서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왕실의 허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명목상 허가일 뿐 귀족 가문이 승인한 용병 가문 개설을 왕실이 막은 전례는 없었다. 또한 재정이 바닥난 백작가로선 시간을 끌 일이 아니기에 서둘러 처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약식으로 이루어진 기사 서임식에서 백작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곧장 들어가 버렸다.
이어지는 파티는 최소한의 가신과 관리만이 참여하리라 예상했지만, 매달 수백 수천 골드를 벌어들이는 카일과 친분을 쌓기 위해 모여든 귀족과 상인들로 부랴부랴 음식과 술을 확보하느라 총관으로선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는 없었다. 골드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진리를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자네가 바로 카일 경이군. 반갑네!”
카일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사람은 바로 래하트 남작과 그의 이들인 아톱스였다.
“저야말로 백작가의 검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일이 마주 인사를 하자 래하트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보일 경이 보이지 않는군.”
“용병단에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급히 돌아가셨습니다. 이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이제 막 창단했으니 이런저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래도 아쉽군! 보일 경을 꼭 만나고 싶었는데.”
레하트 남작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깊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곧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벌써 중급의 경지에 들었다고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군, 어떤가? 용병대보단 차라리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이? 원한다면 내 적극적으로 자넬 영주님께 천거하지!”
“이런, 말씀은 감사하지만 딸린 식구들이 많아 어려울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가? 하루라도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걸, 정말 아쉽군.”
“감사합니다.”
“하하! 이런, 깜빡했군, 여긴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톱스라네, 부족하지만 내 아들이기도 하고.”
“아톱스라 합니다.”
아톱스가 짧게 이름을 말하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 모습에 래하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허! 그리 딱딱해서야…. 앞으로 함께할 용병 가문의 부단장이다. 우리 기사단과는 함께할 일이 많을 테니, 가깝게 지낼 사이인데, 이래서야 되겠느냐!”
래하트 남작이 아톱스를 돌아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짝이는 눈빛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카일입니다.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나이는 제가 어립니다.”
카일의 말에 래하트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너와 같은 중급 경지에 들어섰으니 가깝게 지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다.”
래하트 남작은 은근히 아들인 아톱스를 자극하며 말하자 주변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 왔다.
“허! 남작의 고질병이 또 도졌구만!”
“어찌 아들을 저리 괴롭히는지….”
“그래도 아톱스 부단장은 20대 후반에 엑스퍼트 중급에 올랐는데, 빠른 편 아닌가?”
“그럼! 부단장도 영지에선 한때는 천재 소릴 들었지!”
“자자! 그만들 하고 카일 공방장의 실력이나 한번 보자고, 아직까지 검술 실력은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번 기회에 확인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중급 경지에 저만한 덩치를 보니까 검술도 대단히 위력적일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분명 말소릴 들었을 래하트 남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얼굴에 미소까지 지으며 카일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아톱스가 카일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먼저 숙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저와 대련을 한번 해보겠습니까?”
아톱스의 말에 카일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자 캐프남작이 다가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래하트 남작이 종종 이런 일을 벌이기도 한다네, 이번에 대결을 거절한다면 다른 핑계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대결을 성사시킬 거야! 차라리 이곳에서 적당히 대결에 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네, 적어도 여기는 백작가의 공식 자리이니 말이야!”
캐프 남작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카일은 곧장 만찬장의 사람들과 함께 백작 성 뒤편에 있는 기사단이 사용하는 연무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