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94. 가신회의
끼아악-
창공을 맴돌던 거대한 레드 와이번 한마리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더니 부드럽게 바닥에 착륙했다. 뒤이어 골드 와이번 두마리도 가볍게 내려앉았다.
“으차!”
레드 와이번 위에 앉아 있던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안장 위에서 수 미터나 되는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리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탁자 위에 던져 놓고는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또 사냥을 나가신 겁니까?”
“어? 언제 왔느냐? 오늘, 그… 상단의 부단주 만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보일이 의아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자 카일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휴, 부단주는 이미 다녀갔습니다. 그보다 또 레토아를 타고 사냥을 다녀온 겁니까?”
“어차피 녀석도 사냥을 해야 하니 겸사겸사 다녀왔다. 봐라! 오늘 수확이 제법 괜찮치 않느냐?”
보일이 허리에 매어놓은 날짐승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두 라이플로도 맞추기 쉽지 않은 작은 크기였다. 만약 비행 중 사냥에 성공했다면 놀라울 정도의 사격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카일의 얼굴은 절로 찌푸려졌다. 정작 맹약자인 카일은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정신이 없는데, 보일은 이곳에서 레토아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카일이 보일을 탓할 수는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에바크 산 요새에 보일을 붙잡아 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일 본인이었다.
“휴… 그래서 진전은 좀 있으세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상념을 털어버린 카일이 기대에 찬 눈으로 찻잔을 내밀며 물었지만 동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난 틀렸다.”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겁니까?”
카일이 재차 물었지만, 보일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와 정령은 인연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조금만 더 노력해 보시면….”
“이제 와 그릇을 빚는다고 흙과 친숙해지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가마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다고 너처럼 불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선 안 될 것 같다.”
보일의 말에 카일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보일을 공방으로 부른 것은 정령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빈민들이 몰려들면서 새롭게 마을을 조성하고 수로를 건설하고는 있지만, 인력만으로 공사가 진행되다 보니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그나마 벽돌이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공사 진행이 빨라지고는 있지만, 지금의 속도라면 가을까지 수로가 완성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보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일단 보일이 흙의 정령과 계약만 맺을 수 있다면 조금 더 공사 시일을 앞당길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어쩔 수 없군요.”
“도움에 못 돼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걸요.”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냐? 나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긴건 아니냐?”
“그럴 리가요. 계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에요.”
“그나마 다행이구나!”
“이제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세요?”
카일의 말에 보일의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 생각이다.”
“네?”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보일이 카일의 요청으로 샤론 마을을 떠나 공방을 찾아왔지만, 그의 성격상 오랜 시간 마을을 비울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경대, 그중에서도 정찰대의 주축인 필론과 매튜는 물론 테일과 무트까지 데려온 것은 카일로서도 의외였다.
“요즘 자경대 사이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말이다.”
“문제요?”
“사실, 말하진 않았다만 얼마 전 얀과 조셉은 물론 폴론 무리까지 모두 마을로 복귀시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들을 모두 복귀시키다니! 설마 다핸 남작이 영향을 미친 겁니까?”
“아니라곤 할 수 없다. 1년 전 있었던 사냥터에서의 몬스터 습격으로 기사들의 피해가 너무 컸다. 남작으로선 다시 기사단을 재건하기에 너무 시간이 촉박하니 어쩌겠느냐?”
“그래서 얀과 조셉을 또다시 회유하기 시작한 겁니까?”
“얀과 조셉만이 아니다. 마스터는 물론 나와 필론, 거기에 테일과 무트에게도 똑같이 회유와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대답을 망설이는 보일을 대신해 매튜가 대답했다.
“압박이라니요?”
보일은 상급 엑스퍼트에 자유민이다. 아무리 남작이라고 해도 남부의 작은 남작가가 상급 엑스퍼트에게 압박을 가한다는 건 이해 할 수 없었다.
“물론 다핸 남작이 마스터를 상대로 직접 압박하진 않는다. 대신 교묘하게 마을 사람들을 압박하면서 그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
매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핸 남작은 영지의 주인이다. 보일은 몰라도 평민에 불과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식은 스프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여기에 대해 보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주는 영지민의 생사 여탈권을 가진 존재다. 영주가 샤론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든 그것 역시 영주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보일을 지지하며 남작의 행태를 남모르게 비난하던 마을 사람들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보일을 멀리하더니 급기야 점점 거리 두기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 이면엔 카일이 구축한 다층 방어 요새 계념이 안정되면서 이젠 보일이 없어도 안전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 깔려있었다.
“결국 저 때문이란 말이군요. 제가 만든 방어 체계 때문에….”
“아니다. 남작의 욕심을 생각하면 언제라도 일어날 일 중 하나였다. 신경쓸 것 없다.”
“하지만…!”
“너도 너에게 주어진 일이 있듯 이번 을은 자경대장인 내가 해결할 일이다. 그러니 넌 관여하지 말 가라!”
보일이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스터의 말대로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마스터께선 지금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결과라니요?”
“그런 게 있다. 그보다 넌, 저 사람들에게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매튜가 고갯짓으로 멀찍이 떨어져 안절부절못하며 이곳을 바라보는 비터와 마크를 가리켰다.
“기다리라고 하죠, 수련을 미뤄두고 아버질 따라 사냥을 갔다 왔으니 좀 늦는다고 서운하단 말은 못할 겁니다.”
카일은 최근 비터와 마크에게 태극권 정요 18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난번 부상 당했 던 자신을 구해준 보답인 동시에 그만큼 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엔 보일에게 배운 검술 일부를 가르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익힌 검술을 버리고 새로운 검술을 익히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해 마나 연공법이라 할 수 있는 태극권 중 기본, 정요 18식을 전수해 준 것이다. 대륙의 검술이나 체술과는 전혀 다른 형태 연공법이라 아직 두 사람에겐 카일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게 어디 저 사람들 탓이겠냐?”
“그렇다고 해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변하지 않죠. 그보다 라이플은 어떻습니까?”
카일의 시선의 매튜의 어깨에 매어진 라이플로 향했다. 카일이 만든 초기형 볼트액션 라이플로 스크롤을 이용해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의 라이플이다.
요새엔 상위 포식자인 골드 와이번과 레드 와이번이 상주하고 있어 몬스터의 침입 걱정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간혹 떠돌이 오크나 몬스터, 그리고 인근 오크 부족에서 보낸 정찰 오크들이 간혹 접근해 오기도 해 원거리 저격에 필요성을 느껴 지급한 것이다.
“이건, 정말 확기 적이고 대단한 마법 무구다. 이런 걸 내가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매튜가 조심스럽게 라이플을 쓰다듬었다.
“지금이야 마나석이 없어 완벽하진 않지만, 중급 마나석만 구하면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중급 마나석이라니 그럴 필요 없다. 이걸로도 오크 녀석 잡는 덴 큰 무리가 없는 걸.”
“그래도 더 좋은 무구가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침 중급 마나석을 싸게 구할지도 모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마나석을?”
매튜가 놀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카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긴 채 마크와 비터를 향해 걸어가 버렸다.
* * *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않은 회의실, 가신들이 늘어선 곳에 캐프만이 천천히 들어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그만! 자네 입에서 더 이상 죄송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난 그래도 자네를 믿었다. 두 가신의 반대를 무시하고 자네를 믿은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백작의 목소리가 캐프만에게 차갑게 다가왔다. 백작은 지금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캐프만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했다. 캐프 남작에게까지 밀려난 캐프만에게 남은 사람은 결국 백작뿐이기 때문이다. 백작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캐프만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캐프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백작을 걸고 넘어졌다면 백작 역시 난감했을 것이다.
“자네의 처분은 가신 회의가 끝이나면 결정하지!”
백작이 다소 가라 앉은 음성으로 캐프만을 내려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캐프만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지만 회의실 안은 여전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번 석재 매점 계획이 실패하면서 가문과 상단이 막대한 재정적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피해가 어느 정도나 되지?”
백작의 물음에 재정관인 케프남작을 대신해 크로먼 상단의 프란토 부단주가 자리에서 일어 났다.
“현재까지 나타난 피해는 일단 상단 자금 3백 골드, 백작가에서 지급한 5백여 골드 모두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석재를 기존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구매했다는 겁니다.”
“매입에서부터 이미 손해를 봤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대략 300여 골드 정도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런 대량의 석재를 재매입 할 곳이 사실상 영지엔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카일 공방이지만 이미 거부한 상황이라….”
“일단 석재를 창고에 보관했다가 단계적으로 판매하는 건 어떤가?”
“그것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창고 보관 비용입니다. 아시겠지만 석재는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물건이라 보관에 드는 비용 역시 한 달에 수십 골드입니다.”
프란토 부단주의 설명에 가신들은 물론이고 관리들 사이에서도 긴 한숨이 들려왔다.
“카일 공방에 다시 문의해 보면 어떻겠소, 언뜻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기존 석조 건물들을 해체하고 거기서 나오는 석재로 수로를 건설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손해를 보더라도 가격을 낮추어 구매를 타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백작이 보고 받은 내용은 그저 이번 석재 매점일이 실패했다는 것뿐이라 그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백작의 말에 제정관인 케프남작이 바닥에 놓여있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 카일 공방에서 개발해낸 물건입니다.”
제정관이 내어놓은 물건에 관리들은 물론이고 가신들까지 관심을 보이며 바라보았지만 볼품없는 사각형 물체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도자기와 옹기라는 물품처럼 새롭고 가치 있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보잘 것 없는 돌덩이 같은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건 뭐 하는 물건입니까? 그냥 보기에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데?”
백작의 말에 제장관인 케프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셨습니다! 이건 공방에서 직접 만든 돌덩이입니다. 이걸 벽돌이라 부르더군요.”
“벽돌?”
“그렇습니다. 보기엔 이런 볼품없는 돌덩이지만 보는 것과 같이 일정한 크기에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걸 사용하면 굳이 무겁고 가공이 어려운 석재로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는데 과연 석재를 매입하려 할까요?”
제정관의 말에 관리들과 가신들이 비로소 벽돌의 가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프란토 부단주가 일어나 벽돌을 들어 올렸다.
“보기엔 단순한 돌덩이지만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고, 일반 석재보다는 강도가 조금 떨어지지만 크기가 작고 석재보다 가벼워 이걸로 건물을 짓는다면 기간이 단축될 겁니다. 가격 역시 석재보다 싸겠죠.”
“거기다 운송도 쉽겠지.”
“맞습니다. 이게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석재로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될 겁니다.”
“그럼, 우리가 매입한 석재는….”
“아마도 매각하긴 힘들게 될 겁니다.”
프란토의 말에 가신들과 하급관리 뿐 아니라 백작의 얼굴까지 창백하게 굳어졌다. 프란토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상 수백 골드가 쓸모없는 석재에 묶이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 카일 공방의 확장 계획은 처음부터 석재를 사용 빈도가 크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단순해 보여도 이런 물건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개발한 게 분명합니다.”
재정관인 케프남작의 말에 여기저기서 침통한 듯 침음을 삼켰다.
재정관의 말은 모두가 듣기에도 타당한 말이었다.
더불어 재정관의 말에는 사실상 백작의 어리석음에 대한 지탄의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작과 캐프만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석재를 매점해서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한거나 다름 없었다.
물론 이러한 뜻을 가신들이나 관리들이 모를리 없었고 대부분 동의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