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92. 상급 엑스퍼트 카일
“워~.”
평원을 가로질러 달리던 마차가 급히 멈춰 섰다.
“아이쿠, 이 이 녀석아! 갑자기 마차를 세우면 어떡하냐!”
“마, 마스터… 저길 보십시오.”
필론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뭘 보라는 거냐?”
보일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평원을 따라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딱 봐도 낡은 옷차림이 모두 빈민들로 보였다.
“마, 마스터…. 여기가 공방이 있다는 장원이 맞습니까?”
“여긴… 나도 처음이라.”
보일은 물론 앞서가던 매튜나 테일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야기를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보일의 짐마차를 쫓아오던 게이츠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전투가 끝나고 몇 번이나 보일과 대화를 나눠보려 했지만 보일이 곧장 짐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대화는커녕 얼굴도 보지 못하던 게이츠였다. 그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하고 말을 건넨 것이다.
“이야기라니? 무슨 말씀인지?”
“카일 님께서 이곳에 수로를 만들려 하십니다.”
“평원에 수로를 만든다고 했단 말입니까?”
“아! 물론 당장 평원 전체에 수로를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새로 건설할 마을과 농사에 필요한 수로만 건설할 겁니다.”
“마을과 농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 아무 말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보일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전 그저 급히 와 달리는 전갈만 받고 온 것뿐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아마도 카일 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려 한 모양입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보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게 말입니까?”
보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게이츠를 바라보았다.
“저… 혹 최상급에 오르신 겁니까?”
“최상급요?”
“조금 전 겨뤄보셔서 아시겠지만 바르칼 경은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지 수십 년입니다. 그와 겨뤄 이겼다면….”
“하하! 오해를 하셨군요. 조금 전 결투에서 제가 승기를 잡은 듯 보였겠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싸움을 지속했다면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바르칼 경도 쉽게 물러난 것이겠죠.”
“그, 그렇습니까?”
“뭐, 그래도 제가 좀 유리한 건 사실입니다. 어쨌든 바르칼 경보다 체력이나 힘에선 확실한 우위에 있으니 말입니다.”
보일은 감추는 것 하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실제로도 두 사람 모두 상급 엑스퍼트 중 상위권에 들 정도로 비슷한 경지에 올랐지만 보일은 바르칼 보다 젊었고, 힘도 그만큼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보일과는 달리 이야기를 듣는 게이츠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바르칼이 누군가? 왕국 전체를 따져도 수십 명에 불과한 상급 엑스퍼트다. 그가 비록 자작가를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기사들이 존경하는 자작가 최고의 기사이자 전력이었다.
지금껏 베아트리 영애가 가신들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후계에 오르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의 영향력이 아직도 자작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바르칼보다 젊고 새로운 강자가 영애를 지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르칼이 이미 수십 년간 경지를 넘지 못하고 정체된 것과 달리 보일은 젊은 나이에 바르칼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다. 바르칼과 달리 최상급에 오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었다. 기사는 강자를 동경하고 따른다. 보일이 베아트리 영애를 지지하는 순간 자작가의 기사들은 흔들릴 것이다.
“일단 공방으로 가봐야겠습니다. 녀석에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알아봐야겠습니다.”
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게이츠가 보일의 말에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수로 건설을 하면서 기존 통로가 바뀌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게이츠가 환하게 웃으며 후위를 따르는 기사들을 척후로 내보냈다. 수로는 북쪽 마을에서 시작해 장원을 반원으로 감싸는 형태로 건설되고 있었다. 수로 안쪽에 마을을 건설하고 이후 격자 방사형으로 새롭게 농토와 도로를 구축할 계획이었다.
“여기가 장원, 아니 공방이란 말입니까?”
“원래가 몬스터 방어 요새를 겸해서 건설된 장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생각보다 더 대단하군요. 정문 이외엔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립되기 쉽다는 말이죠.”
장원으로 들어서는 보일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장원이 요새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외침이 강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좁은 성문을 따라 장원으로 들어선 마차를 향해 카일이 달려왔다. 벌써 마을을 떠난 지 한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만큼 카일로서는 보일과의 만남이 기쁘고 반가울 수밖에는 없었다.
“카일!”
보일 역시 마차에서 뛰어내려 카일에게 달려갔다.
스릉-
보일의 허리에서 부드럽게 뽑혀 나온 은빛 검광이 달려오는 카일을 향해 뻗어 갔다.
“헉!”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보일의 검격에 깜짝 놀란 카일이 진각을 밟듯 오른발 강하게 내디뎠다. 동시에 그는 달려가던 가속도를 살려선 몸을 회전시키고 동시에 급히 허리를 꺾어 보일의 검을 피했다.
“하하! 녀석, 몸이 더 빨라졌구나, 좋아! 그럼 속도를 좀 더 올려볼까?”
카일을 향해 찔러가던 검이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지만 카일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손으로 바닥을 치는 동시에 허리를 틀며 검을 피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젠장! 아버지, 하나뿐인 아들을 죽일 작정입니까?”
“엄살 피우기는! 어디 검술이 얼마나 늘었는지 제대로 해볼까?”
“아니, 잠… 젠장!”
보일은 카일의 말을 끊으며 곧장 카일을 향해 달려들어 검을 종횡무진 휘둘렀다.
“으악! 오러까지! 정말 이러실 겁니까?”
“뭐 하느냐? 도망만 다니지 말고 어서 공격해 보거라!”
“그러다 다치십니다.”
“녀석, 네 녀석이 아무리 대단해도 아비를 이기려면 멀었다.”
“좋습니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
보일을 피해 달리던 카일의 몸이 ‘꽝’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등을 지고 날아들었다. 보일은 전혀 놀라지 않았는지 자연스럽게 검의 방향을 바꿔 카일을 향해 찔러 갔다.
스릉-
허공에 떠오른 카일이 허리를 트는 동시에 빠르게 검을 뽑았다.
꽈앙-
카일의 검이 보일의 검과 부딪히는 순간 보일의 신형이 빠르게 뒤로 날아들었지만 카일은 능숙하게 몸을 회전시켜 충격을 해소하더니 곧장 보일을 향해 달려들며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꽝
꽈광-
사방으로 퍼지는 오러의 충격파와 굉음에 성벽을 지키는 용병들과 기사들은 물론이고 서류를 읽고 있던 베아트리 영애까지 밖으로 달려 나왔다.
“아가씨!”
“게이츠 경, 무사했군요.”
“늦었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죄송합니다. 기사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그건 단장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만,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그보다… 저자는 누구죠?”
베아트리가 카일을 압박하는 보일을 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카일이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 그를 압박하며 밀어붙이는 중년 사내의 경지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카일의 부친인 보일 경입니다.”
“부친… 이라고요? 그런데 왜?”
마치 서로를 죽일 듯 달려드는 두 사람의 모습에 베아트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장원에 도착하자마자 보일 경이 갑자기 카일을 공격했습니다.”
“그런… 가서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그게, 오러의 충격파가 대단합니다. 잘못 접근했다간 오히려 부상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게이츠가 보일과 카일의 대결을 보며 내심 놀란 얼굴로 말했다 보일의 검에 어린 선명한 푸른빛 오러는 분명 대단했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어린 카일의 검에도 보일 못지않은 청백색 오라가 선명하게 자라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어쩌죠? 저대로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베아트리의 말에 게이츠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게이츠의 곁으로 매튜와 필론이 다가왔다.
“무슨 뜻인가?”
“훈련을 실전처럼, 마스터의 지론입니다.”
“저게 훈련이란 말인가?”
꽝-
광음과 함께 카일이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하하! 오늘따라 좀 과격하긴 하지만 이건, 일종의 시험입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일 년이나 지났으니 그동안 검술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겠죠.”
필론의 말에 베아트리 영애와 게이츠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점점 강해지는 오러 소드와 치명적인 공격 탓에 필론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어 보였다.
“진짜! 이러실 겁니까?”
“왜 그러느냐? 벌써 지친 거냐?”
“끝까지 해보시겠다는 겁니까?”
“오호! 뭔가 감춰 놓은 것이 있나 보구나?”
보일이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얼마든지 와 보거라!”
보일의 말에 카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카일의 허리에서 은빛 광채가 스며 나와 허공을 수직으로 갈랐다.
스각-
청백색 반원형 오러가 멀리 떨어진 보일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이건!”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반원형 오러에 깜짝 놀란 보일이 급히 검을 횡으로 그었다.
꽈앙-
“어떻게, 계속하시겠습니까?”
카일의 말에도 보일은 놀란 얼굴로 손을 들어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검을 바라보았다. 오러 샷, 상급 엑스퍼트의 상징과도 같은 공격법이다. 즉 카일이 상급 엑스퍼트에 올랐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하하, 훌륭하구나! 상급엔 언제 오른 것이냐?”
“얼마 되진 않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겠구나.”
보일이 피식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그래, 상급에 오른 녀석을 계속 이렇게 가르칠 수는 없지.”
“흠… 그래도 아직 아버님께 배울 게 많은데….”
“쯧,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거라! 그보다 왜 갑자기 날 부른 것이냐?”
“그건… 보여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일단 함께 가시죠.”
“지금 당장 말이냐?”
“시간 끌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좋다.”
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곧장 베아트리 영애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곤 보일과 함께 요새로 향했다.
“상급… 엑스퍼트. 빌어먹을, 어느 정도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필론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설마 카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냐?”
“마스터를 따라잡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건… 그렇지. 뭐, 이젠 중급에 올랐으니 어느 정도 따라가긴 했지.”
“따라가긴 개뿔, 상급과 중급은 하늘과 땅이다. 빌어먹을 녀석.”
“사실 난 카일이 상급 엑스퍼트에 올라서 좋은데?”
“칫, 나도 싫은 건 아니다.”
“아니,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일이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필론의 말에 매튜가 씨익 웃었다.
“마스터는 카일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검술을 조금씩 푸셨지.”
“그럼 설마?”
“어쩌면 이번에도 검식을 추가로 알려주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멀어져 가는 카일과 보일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