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90. 백작가의 농간(3)
“오랜만입니다, 공방장님!”
집무실로 들어선 토일이 카일을 향해 깍듯이 존대하며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카일이 급히 토일에게 다가갔다.
“토일 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라니요. 아닙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죠. 혹 그동안 공방장님께 범한 무례가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
또다시 자세를 잔뜩 낮추며 고개를 숙인 토일의 행동에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토일은 지금 카일에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카일은 상행에서 돌아온 뒤 에바크 산맥 요새 보수와 마법 가마, 그리고 수로 건설 문제로 그동안 토일과 만날 일이 없었기에 딱히 잘못한 일도 없었다. 왜 토일이 갑자기 심통을 부리는지 카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토일 님.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아이쿠, 무슨 큰일이 날 말씀을. 공방장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아일론 상회의 성세가 날로 커지고 있는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다 또 다른 곳에 도자기를 매각하시면 큰일이죠.”
토일이 카일을 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보니 보샤트 상단과의 거래 때문에 시위를 하고 있었군.’
카일은 곧 토일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런 식으로 서운함을 드러냄으로써 카일을 압박해 아일론 상회와 독점적인 거래를 지속하려는 목적인 듯 보였다.
물론 카일 역시 지금껏 정직하게 거래를 이어온 아일론 상회 이외의 상단과 거래할 생각은 없었지만, 분명 토일의 지금 행동은 말로 직접 표현하지 않았을 뿐 카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월권에 가까웠다.
“…허 참,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토일 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뭐?”
카일의 갑작스런 돌변에 당황한 토일이 되물었다.
“저야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시면 좋겠지만… 제 생각만 할 수 없죠. 토일 님께서 편하시다면 앞으로 서로 존대를 하기로 하죠.”
“아니, 카일….”
“아! 그러고 보니 석재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유가 있는 겁니까?”
카일이 급히 화제를 바꿨다. 사실 토일이 이곳에 온 이유 역시 석재 공급 문제 때문이라 토일로서도 카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흠… 제가 카일, 아니 공방장님께 찾아온 이유도 바로 석재 때문입니다.”
“역시 문제가 생긴 겁니까?”
카일도 이미 짐작했는지 심각하게 물었다. 빈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전부터 장원 북쪽 평지를 중심으로 도로와 건축에 필요한 석재는 꾸준히 공급받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필요한 석재 물량이 급격히 늘어, 석재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이… 크로먼 상단에서 갑자기 석재를 대량으로 매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겠지만 크로먼 상단은 영지소속 상단이라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럼 당분간 석재수급이 힘들단 말입니까?”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갑자기 크로먼 상단이 왜 석재를 매입하는 겁니까? 영지에 대규모 공사라도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수년 전 무너진 북쪽 성벽 보수도 힘겨울 정도로 재정이 어려운 백작가가 다른 사업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혹, 이번에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려는 건 아닐까요?”
“그러기엔 주문량이 너무 많습니다.”
결국 필요도 없는 석재를 과하게 독점하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백작이 이젠 석재로 공방을 압박하려는 모양이군요.”
“저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백작이 원하는 게 뭘까요?”
카일의 물음에 토일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아마도 공방을 차지하고 싶은 거겠죠.”
“차라리 무력을 쓰면 더 편하지 않을까요? 크로먼 백작가의 기사단이면 공방을 차지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요?”
“크로먼 백작가의 레하트 단장과 제정관인 캐프 남작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두 사람 모두 전대 백작의 막역지우이자 가신단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니 권위로만 누를 수는 없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방장님이 도주라도 하면 공방을 차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압박을 못 이겨 스스로 항복하고 백작가에 들어가길 기다리거나 최소한 공방을 압박해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겠다는 건데, 차라리 세금을 좀 올려주면 어떨까요?”
손해를 감당해야겠지만 계획한 공사 중단으로 입을 피해를 생각하면 적당한 세금 인상을 통해 백작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좋을 지도 몰랐다. 수로가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평원개발이 시작되면 인상된 세금의 몇 배를 더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백작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네. 고작 세금 인상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거야!”
토일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럼 결국 제가 항복하길 원한단 말입니까?”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겠지만, 그보단 크로먼 상단을 통한 도자기와 옹기 납품을 원할 거네.”
“…이건, 좀 다른 문제군요.”
도자기와 옹기 납품은 카일로서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납품 상단이 다양해지면 아일론 상단 독점에 대한 폐단을 막을 수 있고, 더 넓고 다양한 계층으로 도자기와 옹기를 판매할 수 있었다. 아일론 상단의 유통망은 대부분 동부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도자기의 인기 덕분에 왕도와 중부지역에 새로운 유통망을 만들고는 있지만, 아직은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크로먼 상단의 경우 주 품목이 와인과 곡물로 중부는 물론 서부까지 넓은 유통망을 가지고 있었다.
“쯧! 크로먼 상단의 유통망이 넓다고 해도 우리 아일론 상단만큼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협상도 하기 전 이따위 압박이나 하고 있는데?
“그것도 그렇군요. 그런데… 이젠 존대를 하지 않으십니까?”
“빌어먹을! 이미 다 들통났는데 존대는 무슨 얼어 죽을!”
토일이 투덜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존대를 하시든 말든 토일 님께서 알아서 하시고, 그보다 백작가에서 납품권을 원하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크로먼 상단에 캐프만이라는 자가 있다. 세 명의 부단주 중 하나로 다음 대 상단주인 동시에 캐프 남작의 뒤를 이어 제정관이 될 유력한 인사다. 그 녀석이 요즘 도자기와 옹기 판매에 대해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고 있어 알았다.”
“그자가 석재 매입을 주도한 자입니까?”
“그래! 녀석이 주동자다. 아마도 그 뒤엔 백작이 있겠지.”
“압박 뒤 협상이라면… 도자기와 옹기 가격을 후려치겠군요.”
“요구 물량도 적지 않을 거다. 너도 알겠지만, 빈민들이 피라네시아 평원에 있는 이상 그들에 대한 책임도 너에게 있다.”
겨울이 되기 전 마을을 조성해야 한다. 지금이야 날이 따뜻해 천막생활이 가능하지만 겨울 맹추위를 버티긴 힘들다. 여기에 식량 역시 문제다. 지금이야 베아트리 영애 덕분에 곡물 수급에 어려움이 없지만, 언제까지 영애의 도움으로 빈민들을 먹일 수는 없었다. 최소한 겨울이 되기 전 수로를 완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야 가을에 밀과 보리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음… 다른 영지에서 매입할 수는 없습니까?”
“매입은 어렵지 않다. 다만 운송비용 때문에 석재 가격이 수배로 뛸 거다.”
“손해가 크다는 말이군요.”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어떻게 해서든 백작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공방을 옮기는 건 어떻겠느냐?”
“네?”
“최근 상단에도 백작가의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아직까지 심하진 않지만 단주님께서는 앞으로 압력이 더 커질 거라 걱정하고 계시다. 그래서 다시 본가인 아틸런 자작가로 이전을 고심 중이지. 너만 좋다면 우리와 함께 가자.”
“하지만 이곳에서 만든 기반도 적지 않습니다. 다시 옮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곳을 선택한 것도 외부와 거리를 두기 위해선데….”
“그건 걱정 마라! 이전만 한다면 아틸런 자작가에서 이곳과 비슷한 규모의 장원을 내어주기로 했다.”
“이미… 이야기가 오간 겁니까?”
카일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지 토일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이야기가 오가다니! 아니다. 자작가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 이주만 한다면 빈 장원을 내어주겠다고 말이다.”
“아틸런 자작가에도 빈 장원이 있습니까?”
“그게… 지난번 오크 습격으로 에바크 산맥 아래 장원 하나가 큰 피해를 입었다. 장주였던 기사와 병사 다수가 죽으면서 더 이상 장원을 운용할 수 없게 됐거든….”
“그곳을 제게 주겠단 말이군요.”
“물론 공방 설립 비용은 자작가에서 부담할 거다. 인근에 강이 있어 물도 풍족하고, 피라네시아 평원보단 작지만 농사가 가능한 농토도 적잖이 있다. 토질 역시 이곳과 큰 차이가 없고. 몬스터 침입에 대비해 병사도 지원해 주실 거다.”
토일이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하나하나 장원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하나같이 좋은 조건 같지만 카일은 그 속에 내포된 함정을 이미 간파했다. 일단 아틸런 자작가가 장원에 설비까지 모두 지원한다면 결국 공방의 주인은 카일이 아닌 자작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병사들까지 지원한다면 카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이 말에 따랐다간 몇 년 안에 도자기와 옹기의 제작기법을 빼앗기고 쓸모없어진 카일은 버려지거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흠….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그렇다. 어떠냐? 원한다면 당장 장원을 확인시켜 줄 수도 있다.”
“이주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의도 해야 하고….”
“그러냐? 알겠다. 결정이 되면 바로 알려다오.”
카일의 결정이 아쉬운지 토일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라! 석재가 도자기처럼 마구 찍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닌 이상 이번 일은 백작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밖에는 없다.”
고심에 빠진 듯 토일의 말을 듣고 있던 카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무슨 말 말이냐?”
“지금 찍어낸다고 하셨습니까?”
“아니… 난 그냥….”
“멍청한, 왜 지금껏 그걸 생각 못 한 거지!”
카일의 갑작스런 행동에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토일이 당황하고 있을 때, 카일이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려다가 멈춰 섰다.
“아! 석재 매입건은 모두 취소해 주십시오.”
“모두… 말이냐?”
“네!”
“그럼, 이주를…!”
“하하! 그건 다음에.”
카일이 토일을 보며 크게 웃더니 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토일이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달려 나간 카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카일은 베아트리 영애를 찾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집무실로 들이닥친 카일의 모습에 당황한 베아트리 영애가 물었다.
“지금 마을 조성 공사를 모두 중지하고 수로 공사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마을 조성 공사를 중지하다니요?”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석재는 수로 건설에 투입할 겁니다.”
“지금… 마을 조성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요?”
“아니, 아닙니다. 두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석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요. 두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건….”
“당분간 석재를 수급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백작이 석재를 매점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베아트리 영애가 화로에 올려진 찻주전자를 들어 카일에게 따라주었다.
“그동안 무리를 하면서 석재를 꾸준히 매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까?”
“맞아요. 이런 일을 막으려 미리 준비를 했는데, 아쉽게도 백작의 행동이 좀 빨랐어요. 그보다, 마을 조성을 중단하라니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빈민 전부를 수로 공사에 투입해 주십시오. 그럼 자연스럽게 석재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공방 책임자인 카일의 결정이니 그대로 시행할게요.”
“감사합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이후 토일이 제안했던 아틸런 자작가 이주에 대해서도 베아트리 영애와 상의 했지만, 카일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베아트리 영애는 이주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 * *
“마을을 떠난 게 그리 좋으냐?”
“형님은 좋지 않아요?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왔는데요?”
무트의 물음에 매튜가 고개를 저었다.
“글쌔? 난 마을에 남는 것도 좋았는데?”
“핏,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무슨 소리야?”
“필론 형님이 말해준 것과는 다른걸요.”
“필론?”
매튜가 짐마차를 몰고 있는 필론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얼굴을 구겼다.
“저 녀석이 뭐라고 했는데?”
“그건 말이죠… 비밀이에요.”
“뭐?”
무트와 테일이 매튜를 놀릴 듯 웃으며 황급히 앞으로 달려갔다.
“이 녀석들! 잡히면 혼날 줄 알아!”
매튜가 황급히 두 사람을 쫓았다. 그 모습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필론이 고개를 저었다.
“한심한 녀석들!”
퍽-
“으윽-”
그때 뒤에서 날아든 흙덩이가 필론의 머릴 강타했다.
“싸움을 붙이니 재밌냐?”
짐마차 안에서 누워있던 보일이 일어나 마부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오셨어요.”
필론이 머리에 묻은 흙덩이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냐?”
“조금만 더 가면 피라네시아 평원에 도착할 겁니다.”
“곧 도착하겠군.”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냐?”
“쟝과 조셉 말입니다. 둘에게 자경단을 맡기고 온게….”
“걱정되는 거냐?”
“폴론이나 투스 무리를 다시 불러들인 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해보니 더는 기사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요. 물론 손목이 잘린 이유가 가장 크지만, 아무튼 배신에 대한 걱정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쟝과 조셉은 다르지 않습니까? 벌써 중급 문턱에 들었으니 다시 남작에게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내가 도착하기 전 기사로 임명해 버리면 나 역시 막을 방법도 없고.”
보일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녀석을 복귀시킨 이유가 있는 겁니까?”
“글쌔? 아직 녀석들에게 미련이 남아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
“역시 녀석들을 시험하려 하신 거군요.”
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이라…. 뭐, 틀린 말도 아니다.”
“시험에 통과하면, 녀석들에게도 검술을 전수하실 생각입니까?”
“왜? 걱정되는 거냐?”
“걱정이라기보단 바램이죠.”
“바램?”
필론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저와 매튜에겐 형제나 다름없던 친구들이니까요. 비록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이번만은 마스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럼, 넌 어떠냐? 두 사람이 정식 기사가 되고, 어쩔 수 없이 마을를 떠나야 한다면, 날 따라올 생각은 있느냐?”
“그야… 당연히 따를 겁니다. 고향은 떠날 수 있지만 마스터를 떠나긴 힘들 것 같거든요.”
필론이 말에 피식 웃음을 짓던 보일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굳었다.
“잠깐, 마차를 세워라!”
“네?”
필론이 싸늘하게 굳은 보일의 표정을 보며 급히 마차를 세웠다. 매튜 역시 마차가 멈추자 무트와 테일을 데리고 황급히 마차로 달려왔다.
“마스터!”
“전방에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요?”
보일의 말에 깜짝 놀란 일행들이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경계했다.
“어떻게 할까요. 마스터?”
“일단 천천히 접근한다. 피라네시아 평원과 가까운 곳이니 어쩌면 카일과 관련된 사람일 수 있다.”
보일이 짐마차에서 내려 선두에 서자 필론도 급히 마차를 무트에게 넘기고 매튜 옆에 나란히 섰다.
“말이 놀라지 않게 테일과 천천히 쫓아 와라!”
“네! 매튜 형.”
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한 얼굴로 말고삐를 잡았다. 매튜가 미소를 지으며 무트와 테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마스터와 함께 있으니 긴장할 것 없다.”
매튜가 두 사람을 안심시킨 뒤 앞서가는 보일과 필론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보일은 길을 따라 전투가 일어난 장소로 천천히 접근했다.
전투는 평원이 시작되는 접경지역 끝에서 일어났는데, 곡물 마차 10대와 이를 지키는 기사 20명, 그리고 이들을 공격하는 열 명의 용병무리가 벌이는 독특한 전투였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20명의 기사들이 열명의 용병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강렬한 오러 소드를 휘두르며 기사단을 압박하는 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상급… 엑스퍼트?”
보일이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전투를 바라보다 전투가 벌어지는 평원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