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55화 (355/404)

외전 - 89. 백작가의 농간(2)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위, 창공을 맴돌던 다섯 마리의 와이번이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여긴가요?”

얼굴은 물론 몸 전체를 어두운 회색빛 피풍의로 감싼 여인이 옆으로 다가온 사내에게 물었다.

“네! 이 주변에서 4호의 신호가 끊겼습니다.”

“상대가 에렌 공국 상인이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보샤트 상단이라고 중소규모의 상단입니다. 본국과 제국 사이 중계무역을 해 오던 곳입니다.”

“평범한 상단이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4호가 갑자기 보샤트 상단에 잠입한 것 역시 의외였습니다.”

“상단의 행보에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까?”

“왕도에서 접촉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탐문 했지만, 특이할 만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4호가 추적하던 자들이 바런트 왕국 쪽인가요?”

“정확히 이번 설원 침입 사건을 조사 중이었습니다.”

“보샤트 상단이 관련되었다고 보는 건가요.”

회색 피풍의로 여인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4호가 암호만 남긴 채 급작스럽게 잠입한 걸 보면 의심할 만합니다. 더구나 마법 신호까지 보낼 정도였으니 아마도 확실할 겁니다.”

사내가 씁쓸하게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신호기는 위급하거나 고립되었을 때, 혹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현 위치를 알리는 일종에 단발형 발신기다.

“단장님!”

그때 숲을 수색하던 기사 하나가 다급히 사내에게 달려왔다.

“찾았느냐?”

“그보다 먼저…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고하는 기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저도 함께 가겠어요.”

“직접 말씀입니까?”

“네!”

여인의 말에 사내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잔혹한 모습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함께 가시죠.”

“고마워요. 테링 자작님.”

“별말씀을.”

테링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여인과 함께 앞서가는 기사의 뒤를 쫓았다.

“잠시만!”

기사를 따라 숲속을 한참 동안 걸어가던 여인이 갑자기 멈춰서서 고목 여기저기에 남은 흔적을 살폈다.

“강한 회전력을 동반한 관통 흔입니다. 아마도 윈드 계열의 마법 무구에 의한 흔적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전투가 있었단 말인가?”

4호는 정보나 잠입에 능할 뿐 검술은 고작해야 엑스퍼트 초급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더구나 값비싼 마법 무구를 소지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만약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4호 이외의 다른 사람들 있었다는 뜻이다.

“이건 마법에 의한 흔적이 아니에요. 물리력에 의한 공격 때문에 생긴 흔적이에요. 그것도 아주 강력한 회전력이 실린….”

눈을 빛내며 나무에 난 흔적을 면밀히 살피던 여인의 말이었다.

“물리력?”

여인의 말에 놀란 자작이 다시 나무에 난 흔적을 살폈다.

“마법으로 이 정도 위력의 관통력을 내려면, 맞아요. 윈드 계열, 그중에서도 3서클 윈드 에로우라고 보는 게 타당해요. 하지만 윈드 에로우는 이렇게 거칠고 파괴적이지 않아요.”

여인이 곧장 두 손으로 수인을 맺더니 낮게 영창했다.

“윈드 에로우!”

거샌 바람이 빠르게 회전하며 긴 화살 형태를 만들더니 곧장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퍼억-

윈드 에로우는 정면 나무를 관통하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윈드 에로우에 관통된 흔적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윈드 계열 마법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회전력이 실려있어 관통력이 강해요. 하지만 물리력이 없어 파괴적이진 않죠. 하지만 이곳에 난 관통 흔은 달라요.”

“앞쪽과 달리 뒤쪽에 난 흔적이 더 파괴적이군요.”

“물리력에 강력한 회전력이 실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나무를 관통시킬 정도면 속도 역시 아주 빠를 거예요.”

“서로 다른 마법을 조합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조합 마법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전에 그에 대한 이론이 알려지면서 제법 인기를 끈 적은 있지만… 결국 효용성이 떨어져 사장된 마법 이론이에요. 그리고 조합 마법에 물리력을 가미한 경우는 듣지 못했고요. 한마디로 말해, 마법만으론 이런 위력의 마법 무구를 만들 수 없어요.”

“…제법 심각한 말씀이군요.”

“일단 이 부분에선 조금 더 연구해 봐야겠어요.”

“혹, 성과를 얻게 된다면 제게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무구가 바런트 왕국과 관련되어 있다면 아무래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이죠. 가장 먼저 자작님께 알려드리죠.”

여인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자작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두 사람은 다시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테링 자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갔다. 매끄럽게 잘려나간 나무와 충격파로 인해 속살을 드러낸 대지, 황폐화된 숲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무에 난 검흔들은 모두 강력한 오러 소드에 의한 흔적이었습니다.”

“놀랍군! 이곳에서 상급 엑스퍼트 간 결투가…!”

주변을 살피던 테링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흔이… 다르다?”

“이곳에 남은 검흔을 살핀 결과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상급 엑스퍼트가 셋이나 있었단 말이냐?”

“그것이… 이상합니다. 검흔은 분명 셋인데 발자국의 흔적은 둘뿐입니다.”

“뭐?”

자작이 황급히 바닥을 살폈다. 이리저리 끌리거나 밀린 자국과 검흔의 흔적을 유추해 대결을 복기하던 테링 자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자… 두 개의 검술을 동시에 사용했다.”

“쌍검술이란 말씀입니까?”

“아니, 이건 쌍검술로 보기 어렵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검식을 사용했으니 말이다.”

검술을 차근차근 복기하던 자작이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단하군. 이자, 자신보다 강자를 검술로 압도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검술로 강자를 압도하다니?”

여인이 테링 자작의 옆으로 다가와 흥미로운 듯 물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한 명은 검술이 강했지만, 경지가 낮았고 다른 하나는 경지는 높았지만, 검술에서 밀렸습니다.”

“검흔만으로 그런 것까지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요?”

“하하! 검흔만으론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보단 상황을 종합적으로 유추해야겠죠. 여길 보시면 쌍검을 사용한 자가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자작이 나무에 난 흔적과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곧 수세에 몰립니다. 여길 보시면 강한 충돌과 함께 쌍검수가 뒤로 밀려났습니다. 밀리던 상대가 여기서부터 검술이 아닌 오러의 대결로 몰고 갔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검술에서 밀리자 자신에게 유리한 오러 대결로 몰아갔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밀려난 거리나 충격파의 흔적만 보면, 상급 엑스퍼트, 그중에서도 최상급에 근접한 자가 틀림없습니다. 다만 발자국을 보니 체중이 우측 방향으로 쏠려있습니다. 아무래도 좌측에 부상을 당한 것 같습니다만 오러 소드의 위력은 전혀 줄지 않은 모양이군요.”

“부상이라면 조금 전 그 무구에 당했을 가능성이 크군요.”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부상을 당하면서까지 쫓아온 걸 보니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본다면 쌍검수가 이겼습니다.”

“조금 전 오러 소드의 위력이 줄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도 그것이 이상합니다. 분명 마지막에 승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부터는 흔적이 너무 엉망이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쌍검수가 살아서 저기 나무 둥치까지 걸어간 흔적이 있습니다. 이후 동료로 보이는 둘이 도착했고, 여기에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테링 자작이 타다 남은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여기서 되돌아갔단 말이군요.”

“맞습니다. 남은 흔적을 보니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게 분명합니다.”

“자작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자가 첩자일까요?”

“아직 단정 짓긴 힘듭니다. 두 개의 상반된 검술을 익힌 상급 엑스퍼트에 대해선 바런트 왕국이나 본국 어디에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아마도 최근 상급에 올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분간 신분을 감출 테니 당장 신원을 알아내긴 어려울 겁니다.”

“대신 패했다는 상급 엑스퍼트, 이자에 대해선 알아볼 수 있지 않나요? 최상급에 근접했다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것 같은데?”

“물론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최상급에 근접했다면 바런트 왕국이나 본국 모두 합쳐도 몇 되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좋아요. 그럼 거미들을 풀어 이자를 먼저 찾아보죠. 이자의 신분이 밝혀지면 쌍검수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있을 테니.”

“부탁드립니다. 에이린 공주님.”

“별말씀을.”

에이린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색은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모두 추적이나 수색에 능한 기사들이 나섰기에 카일 일행이 머물렀던 절벽까지 찾아냈고, 더불어 몬스터에 반쯤 뜯겨나간 사체들도 발견했지만, 이미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어 더 이상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 * *

“쯧! 오늘따라 와인이 쓰군.”

주석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을 바라보던 백작의 얼굴에 비틀어진 미소가 어렸다.

동부의 맹주!

백 년 전, 동부 최고의 가문으로 알려졌던 크로먼 백작 가문의 위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추락하더니 기어코 하찮은 기사 가문에서도 쓰지 않을 주석 잔에 싸구려 와인을 먹어야 할 정도로 쇠퇴하고 말았다.

“어떻게 됐나?”

“아무래도… 실패한 듯 보입니다.”

“실패?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아니라 실패란 말인가?”

“송구합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상단의 피해가 가중될 겁니다. 재정관께서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흠… 재정관은, 곤란하군.”

“차라리 그리미엄 자작가, 아니 바르칼 경에게 베아트리 영애의 거처를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멍청한 소리! 내가 원하는 건 온전히 공방을 손에 넣는 것이지 파괴하는 게 아니다.”

“기사단장께서 나서 주시면….”

캐프먼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찌푸려 졌다.

“레하트 단장은 이런 일에 움직일 분이 아니다. 오히려 재정관과 함께 잔소리만 늘어놓을 인사지.”

탁!

백작이 신경질적으로 주석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일단, 올렸던 곡물 가격은 원상 회복시키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자네가 말했던 것 말이야! 지금 실행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최근엔 주문 양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수요가 증가했습니다. 분명 크게 타격을 입을 겁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최대한 압박할 수밖에….”

“알겠습니다. 곧장 실행하겠습니다.”

“이번엔… 실패란 말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군.”

“걱정 마십시오. 이미 사전 준비는 마친 상태입니다.’

“좋아! 기대하고 있겠네.”

백작의 말에 캐프먼이 고개를 깊숙히 숙이더니 곧장 밖으로 향했다.

* * *

끼아악-

하늘을 선회하던 거대한 붉은 와이번이 거대한 날개로 부드럽게 날갯짓하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취익- 와, 와이번이다.”

“췩-”

“도망쳐…!”

먹잇감을 찾아 산맥을 어슬렁거리던 오크와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붉은 와이번은 그것들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바닥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레아토! 수고했어.”

-아니다. 나 역시 맹약자와 오랜만에 창공을 누빌 수 있어 즐거웠다. 그럼 난 이만 사냥을 가보겠다. 반나절 뒤 다시 오겠다.-

레드 와이번 레아토가 카일을 향해 짧은 인사만을 남기곤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조금전 도망친 오크들의 뒤를 쫓았다.

“카일!”

멀어져 가는 레아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온 거냐?”

“오늘이 마법 가마를 처음 시 운전하는 날이라 늦었습니다.”

“맞다. 오늘이 그날이었지!”

“네!”

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리 영애의 가신인 마법사 멜번의 도움으로 카일은 이번에 마법 가마를 만들었다. 가마 안에 3서클 파이어 볼 마법을 생성해 고온에서 도자기와 옹기를 굽는 방식이다. 마나를 조절하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 도자기의 실패 확률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대량생산에도 용이한 가마였다. 이번에 베지톤 백작에게서 얻은 마나석을 가공해 만든 마법 가마로, 중급 마나석 6개와 상급 마나석 3개를 이용, 총 세 개가 완성되었다.

“오늘 같은 날은 공방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시운전이라 오늘은 멜번 님께서 끝까지 확인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 다행이지만….”

“그보다 요새는 어떻습니까?”

“오래 비워둔 곳이라 낡고 허물어진 곳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조금만 수리하면 몬스터나 오크 침입 정도는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 일 정말 가능할 거라 생각하느냐?”

“물론입니다. 그러니 그전까지 이 주변 몬스터는 확실히 소탕해야 합니다.”

“그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와이번이 요새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오크나 몬스터의 출몰이 눈에 띄게 줄었으니 말이다.”

와이번은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다. 아무리 호전적인 오크라도 와이번이 머물고 있는 요새로 접근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군요. 그럼 곧 인부들을 산에 올려보낼 수 있겠어요.”

“얼마나 올려보낼 생각이냐?”

“일단 요새 복구에 100여 명 정도 올려보낼 생각입니다. 이후에 차츰 늘려갈 생각입니다.”

“흠… 시간이 제법 걸리겠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나름 방법을 생각 중이거든요. 일단 한번 볼까요?”

“좋다. 일단 먼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카일과 마크는 동쪽 성벽을 벗어나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능선을 따라 아래로 걸음을 옮기자 눈앞에 제법 거친 물살이 흐르는 좁은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시다시피 물살이 거칠다. 여길 틀어막는 건… 쉽지 않다.”

“쉽진 않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장원에 산적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물길을 막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정적으로 물길을 평원까지 끌어야 할 텐데… 과연 가능할지.”

“걱정 마십시오. 제게 방법이 있으니.”

카일이 미소를 띠고 눈을 빛내며 굽이쳐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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