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88. 백작가의 농간(1)
-말을 풀어줄 생각이면 나에게 다오.-
그때였다. 갑자기 레드 와이번 레토아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올렸다.
“말을 달라니? 무슨 뜻이지?”
-상단이 이동하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상행을 시작한지 벌써 수십 일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아공간 속 와이번은 동면 상태다. 신체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한 달 이상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심력에 타격을 입은 상태라 먹을 것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배고프다는 말이었다.
“먹을 건 어떻게 주는 거지? 아공간 밖으로 나와야 하는 건가?”
-아니다! 그냥 맹약석을 말에게 가져다 대면 된다.-
카일은 방금 전 그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비터와 마크를 보았다.
그들도 각자의 와이번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다행히 용병들이 타고 온 말들은 와이번에게 돌아가기 충분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카일은 목에 걸린 맹약석을 풀어 말에게 가져갔다. 순식간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자리에서 말이 사라져 버렸다.
-말은 오랜만이군.-
레드 와이번 레토아의 음성에 만족감에 묻어났다.
“궁금한게 있는데 말해줄 수 있나?”
-얼마든지 물어도 좋다.-
“와이번은 원래 이렇게 많이 먹는 건가?”
사라져가는 말을 보며 카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벌써 먹어 치운 말이 4마리가 넘었다. 와이번의 거대 동체를 생각하면 이상 할 것 없지만 앞으로 와이번의 먹이를 책임져야 할 카일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평소엔 이 정도로 많이 먹진 않는다. 이전 맹약자인 아서의 경우 3일에 한 번, 소 한 마리를 공급해주었다.-
3~4일에 소 한 마리, 한 달이면 무려 열 마리에 달하는 소가 필요했다. 아무리 공방이 잘 운영 된다고 해도 한 달에 소 열 마리다. 여기에 사실상 비터와 마크의 와이번까지 책임져야 할 상황이니 카일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는 없었다. 만약 공방을 운영하지 않았다면 카일도 어쩔 수 없이 용병 길드나 귀족가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소만 공급받은 건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크나 트롤을 받은 적도 있다.-
“몬스터?”
-인간이 키운 가축보단 오크나 트롤 같은 살아있는 몬스터를 직접 사냥하는 것이 더 좋지만, 아서의 경우엔 직접 사냥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베지톤 백작이 와이번의 사냥을 허락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귀족가에서 와이번은 최고의 전략적인 무기이자 전력이다. 높은 금액의 의뢰를 받아야하는 용병 라이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단 뜻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레토아의 말에 눈을 빛냈다.
“직접 사냥도 한다고?”
-와이번은 몬스터 중 최상위 포식자며 사냥은 우리에게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직접 사냥하게 되면 하루에 한두 마리 이상 오크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몬스터가 풍부한 넓은 사냥터가 필요하단 뜻이었다.
“에바크 산맥!”
보통 영주성이나 귀족 장원의 위치는 몬스터의 침공에 대비해 숲이나 산맥과는 떨어진 평원, 구릉에 짓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카일의 장원은 다르다. 에바크 산맥에서 내려올 오크나 몬스터를 막기 위해 장원 자체를 에바크 산맥지류에 직접 건설해 요새화 한 곳이다. 에바크 산맥이란 넓은 사냥터가 딸린 것은 물론, 피라네시아 장원은 인접한 영지도 없었고 접근성까지 떨어졌다. 와이번을 감추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란 뜻이었다.
* * *
카일 일행이 공방으로 돌아온 건 보름이 지난 후였다.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이동하다 보니 예정보다 일찍 장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원에 도착한 카일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건….”
“우리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니지?”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나도 황당해서 그런다. 갑자기 이게 뭔 일이람.”
비터가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주변에 늘어선 낡은 천막과 빈민들을 살폈다. 새롭게 조성하기로 한 마을 터는 물론 농토를 조성하려 했던 평원 인근 지역까지, 대충 살펴도 천여 채는 넘어 보이는 천막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서둘러 가시죠. 일단 영애부터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카일의 말에 마크가 서둘러 짐마차를 재촉했다.
장원으로 들어서자 이야기를 들었는지 영애를 비롯한 장원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갇혀 있었던 용병들도 모두 풀려나와 장원 수비에 투입되고 있었다.
“도착하셨군요.”
베아트리 영애가 카일에게 먼저 다가왔다.
“아무래도 영애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 영애가 싶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준비했으니 함께 가시겠어요?”
“좋습니다.”
영애의 안내를 받은 카일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실 안에선 이미 찻잔이 가지런히 놓인 채 물이 끓고 있었다. 그녀가 카일의 행동을 예측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애와 마주 앉은 카일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어렸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는 영애의 모습에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결국 참지 못한 카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죄송해요. 저도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베아트리 영애가 카일의 말에 사과했다.
“전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묻는 겁니다.”
카일이 생각했던 마을의 규모는 고작 3~40가구에서 많게는 백여 가구 정도의 규모에 식량을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농토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정도가 카일이 보유한 병력으로 보호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게… 카일이 떠나고 얼마 후 크로먼 상단 부단주인 케프먼이 찾아왔어요.”
“크로먼 상단?”
“네, 백작 가문이 운용하는 상단인데, 제정관인 캐프 남작이 상단주로 있는 곳이죠. 그곳 부단주면 사실상 백작가의 가신이나 다름없죠.
“그런 곳에서 왜 우릴 왜 찾아온 겁니까?”
“백작의 전언을 가지고 왔어요. 비공식적인 내용이라 상단의 부단주인 케프먼을 보낸 거죠.”
베아트리 영애가 카일에게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장문의 서신에는 카일과 공방에 대한 칭찬들이 화려한 미사여구와 함께 적혀있었지만, 결국 결론은 빈민수용을 늘려 달라는 요구였다. 대신 장원에 대한 세금을 경감시켜 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도자기와 옹기 판매가 늘어나며 큰돈을 벌어들이자 백작가에선 갑작스레 장원의 세금 납부를 정식 요청했다. 원칙적으론 장원의 주인인 남작가에서 납부를 해야 하지만, 이미 오래전 남작가는 사라졌고 카일이 사용권을 매입했으니 이제 그가 왕실과 백작가에 세금을 납부하란 뜻이었다.
사실 이 제안은 카일에게 나쁠것이 없었다. 세금을 납부하란 요구는 장원의 소유를 백작과 왕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카일이 그에 따른 권리까지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즉 장원을 지킬 일정한 규모의 정규병도 공식적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뜻과 같았다.
“이것 때문에 빈민을 더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작년 동부는 물론 중부에선 이래적으로 대풍이 들었어요. 덕분에 밀을 비롯한 잡곡 가격이 급락해서 귀족들의 창고엔 팔지 못한 곡식들이 가득 쌓여있어요. 그걸 싼 가격에 들여올 수 있으니 수백명 정도는 더 받을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한겁니까?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원한 마을의 규모는 최대를 잡아도 백여 가구가 안됩니다.”
“하지만 상황이 달려졌잖아요. 이젠 정규병을 육성할 수 있으니 용병보다는 차라리 정규병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베아트리 영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장원의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장원이 가질수 있는 정규병의 규모는 백 명. 병사를 육성하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장원과 카일에 충성하는 정규병을 키우는 게 더 효율적일뿐 아니라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영애의 생각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정기적으론 이익이죠. 하지만 지금 빈민들의 규모는…너무 과합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많은 빈민을 백작이 보낼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제가 알아본 크로먼 백작령의 빈민 숫자도 이렇게 많지 않았고요.”
“그럼…?”
“제가 백작가에 속은 것 같아요.”
“네?”
“크로먼 백작이 백작의 가신가에 속한 빈민들도 이곳으로 보낸 것 같아요.”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장원은 항상 인력이 부족해요. 그런데도 백작은 영지의 빈민들을 장원가에 보내지 않아요. 왜일 것 같나요?”
“글쎄요?”
“장원의 힘이 커지는 걸 경계하니까요. 전 크로먼 백작가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최소한의 빈민만 이주 시킬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군요.”
베아트리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려보낼 방법은 없는 겁니까?”
“유입을 막은 것만으로도 상당히 어려웠어요.”
“불가능하단 말이군요.”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려 천여 가구, 숫자로만 따지면 못해도 5천여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빈민들이었다.
“식량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일단 제가 보유한 장원에서 보리와 잡곡을 조달하고 있어요.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그리미엄 자작가의 직계다. 비록 후계자는 되지 못했지만 소영주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유산으로 받은 농토가 적지 않았다.
“…영애께서 말입니까?”
“이번일은 제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아닙니다. 그럴수는 없죠. 어째든 장원 관리를 맡긴 건 접니다. 실수가 있다고 영애께 책임을 지울 수는 없죠.”
“전 괜찮아요. 어차피 그리미엄 자작이 판로를 막아 당장 팔 수도 없는 곡식인걸요.”
“네?”
“아무래도 자작이 제 돈줄을 막으려는 것 같아요. 그동안 식량을 매입해주던 상단들이 일제히 매입을 거부했거든요. 계속 창고에 쌓아둘 수는 없으니 차라이 잘된 셈이죠.”
“그래도 영지 반출은 막지 않는 모양이군요.”
“상단을 압박해 매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곡식 반출을 막지는 못해요. 그랬다간 오히려 영지의 여론만 악화시킬 뿐이니까요. 그런건 자작으로서도 바라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것만도 제겐 피해가 크죠. 곡물 값이 떨어진 상황에서 운반까지 책임져야 하니….”
“제대로 남는 게 없겠군요.”
“맞아요. 오히려 손해죠.”
영애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곡식을 아무 대가도 없이 받을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저와 기사들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해요. 이번 일은 분명 제 책임도 있고요. 그러니 곡식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요. 그보단 빈민들을 어떻게 할지가 걱정이죠. 다행히 날이 따뜻해지고는 있지만… 저들을 이대로 평원에 방치할 수는 없어요.”
“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적당히 분산해 마을을 조성해야겠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왜 백작이 이런 일을 벌이는가입니다. 고작 작은 공방하나 없애려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네?”
“아직 카일은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군요.”
카일을 보며 오히려 영애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번에 아일론 상회에서 판매 대금이 들어왔어요. 모두 천 골드가 넘죠.”
“처, 천 골드!”
카일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었다.
“수요는 늘고있는데 항상 수급이 따라주지 못하니 가격이 치솟았어요. 옹기도 마찬가지죠. 대형 항아린 없어서 못 팔 정도라 일전에 만들어 놓았던 항아리도 모두 팔았는걸요.”
“…모두 팔았다고요?”
“네!”
“세상에….!”
카일은 상행을 떠나기 전 흙의 정령 놈의 도움으로 충분히 수백 점의 도자기와 옹기를 미리만들어 놓고 떠났다.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만큼 도자기나 옹기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위해서였다. 헌데 그걸 모두 팔았다는 말이었다.
“지금 아일론 상단에선 연일 도자기와 옹기 생산을 독촉하고 있어요.”
“휴… 제가 없는 동안 그런일이 있었군요.”
“백작가에서 빈민들을 장원에 몰아넣은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어요. 감당할 수 없는 빈민을 밀어 넣은 뒤 카일이 항복하길 기다리는 거죠. 백작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말이죠.”
수천의 사람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은 자금이 풍부하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체계적으로 사람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하지만 카일은 이러한 경험이 전무한 어린 용병에 불과 했다. 이런 건 검술이나 공방을 운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하지만 베아트리 영애는 다르다. 그녀는 가신들로부터 영지 운영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후계자로 키워졌다. 이 정도 규모의 빈민을 통제하는건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공방이 목적이란 말이군요.”
“그래요. 당장 빈민들이 장원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곡물 가격부터 올랐어요. 아마도 백작이 의도적으로 올렸겠죠.”
“영애 덕분에 실패했고요.”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물이겠죠?”
“네! 그 문제가 가장 커요.”
“흠… 좋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베아트리 영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카일이 돌아오기 전 수없이 고민했지만 끝내 결론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카일이 자신 있게 대답한 것이다.
“물이 부족하다면 다른 곳에서 끌어 와야죠.”
“다른 곳에서요?”
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