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87. 베지톤 백작(6)
“으음….”
옅은 신음과 함께 카일이 눈을 떴다.
“카일, 괜찮은 거냐?”
비터가 카일의 옆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콜록콜록…!”
“잠시만 있어봐라!”
비터가 따뜻한 차를 가져와 카일에게 내밀었다. 찻잔을 받아든 카일이 조심스럽게 마른 목을 축이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큰 충격 때문인지 마나 로드는 물론 마나 플라워까지 크고 작은 타격을 입어 오러 사용에 제한이 있겠지만, 그 이외의 부상만큼은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비터가 중급 포션을 내놓았다.”
때마침 커다란 피풍의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온 마크가 카일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중급 포션요?”
“그래,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제법 도움이 되었을 거다.”
마크의 말에 비터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하하, 별것 아니다. 그저 가지고 있던 포션을 내놓은 것뿐이다.”
“그래도 두 분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
카일의 말에 비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건…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카일이 웃으며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시죠.”
“날이 저물어 간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닙니다. 지금은 최대한 여길 빠져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카일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이들은 에렌 공국 보샤트 상단이 아닙니다. 모두 바런트 왕국의 첩자들입니다. 서남 방면 변경백 아서 드 베지톤 백작과 그 기사들입니다.”
“바런트 왕국의 첩자?”
“설마! 설원을 침입했던….”
“네, 맞습니다.”
“이거… 자칫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겠군.”
“그전에 흔적을 지우고 여길 빠져나가야 겠죠.”
카일의 말에 마크가 피풍의에 넣어 온 물건을 앞으로 내밀었다.
“백작과 기사들의 물건이다. 방어구나 검에 귀족 문장이 새겨져 있긴 하지만, 일단 모두 벗겨왔다. 사체는 대충 감춰 놓았다. 운이 좋으면 발견되기 전 몬스터가 처리해 줄 거다.”
마크가 벗겨온 방어구는 대부분 값비싼 합금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특히 백작이 착용했던 방어구는 모두 미스릴이 합금된 고합금 방어구였다. 하지만 카일의 시선을 끈 건 따로 있었다.
“이건…?”
“백작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다. 아무래도 인장 반지 같았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물건이군요.”
“그렇다면 버리고 가자! 이 넓은 숲에서 반지를 찾는 건 어려울 거다.”
“그랬다가 누가 발견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이걸 누가 발견한다고….”
“그야 모르는 일이지! 반지에 추적 마법이 내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럼 더더욱 가져가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오히려 반지가 여기서 발견된다면 바런트 왕국이 이곳에서 백작이 죽었다는 확신을 가질 겁니다. 그럼 우리가 더욱 의심받을 테지요.”
“우리가 왜?”
“베지톤 백작 일행이 우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그 사실을 안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우릴 가장 의심하겠군.”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쩌려고?”
“일단 이 반지는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안전하게 숨겨둘 곳이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상급 엑스퍼트인 카일의 손에 반지가 있는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일단 여길 벗어나시죠. 왕국에서도 이들을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좋다. 바로 출발하자!”
“그전에 찾을게 있습니다.”
“이거 말이냐?”
비터가 검과 함께 라이플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나무에 기대져 있던 걸 가져왔다. 이게 바로 그 마법 무구냐?”
비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코프를 분리한 후 개머리판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것도 직접 만든 거냐?”
“네! 이번에 세공사 고투 님의 도움으로 완성했습니다. 라이플이라고 하죠.”
“라이플이라… 마법사도 아닌데 마법 무구까지 만들다니, 대단하구나!”
마크와 비터는 베지톤 백작과 두 기사의 몸에서 검으론 도저히 낼 수 없는 독특하고 치명적인 관통상을 확인했었다. 라이플이란 마법 무구에 의해 생긴 상처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고, 그만큼 관심이 깊을 수밖에는 없었다.
“라이플은… 쉽게 만들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걸 완성하는데만 꼬박 5년이 걸렸으니까요.”
“5년이나 말이냐?”
마크가 놀란 눈으로 묻자 카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도 마법 무구를 만들려면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한다. 하물며 마법사가 아닌 카일이니, 5년 만에 마법 무구를 제작한 것만으로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출발하시죠. 여기서 더 지체 하다가는 해가 진 뒤에 산을 내려가야 할 겁니다.”
카일이 가방을 메고 일어나자 마크와 비터 역시 가져온 짐을 챙겨 일어났다.
“사체들이 없다.”
마크가 주변을 살폈지만 옅은 핏자국만 여기저기 남아있을 뿐 사체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사체뿐 아니었다. 용병이 머물렀던 흔적은 물론 백작이 타고 왔던 마차까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말 십 수 마리와 도자기, 옹기를 실었던 짐마차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이야! 이거 준비 하난 철저히 했나 보군.”
짐마차에 올랐던 비터가 낯선 가죽가방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낡은 가죽 갑옷과 용병 패가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한 번 더 신분을 위장하려 했던 것 같군요.”
“우릴 이 판에 끌어들인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여기서 용병과 우릴 처리하고 작은 상단으로 위장할 생각이었던 모양이군.”
“정식 상단도 아니고 영지에 소속된 공방도 아니니, 돌아오지 않아도 신경 쓸 귀족은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용병도 대부분이 하급 용병이니 사라져도 길드에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겁니다.”
“사냥감을 완벽하게 골랐군.”
“문제는 그 사냥감에게 잡아 먹혔다는 거지.”
비터가 웃으며 짐마차 안쪽에 놓여 있는 제법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그건 뭐냐?”
“가죽가방과 같이 있던 건데, 제법 묵직하다.”
비터의 말에 마크는 물론 카일까지 바짝 다가왔다. 짐마차에 실려있던 짐은 가죽가방과 상자가 전부다.
“이거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고위 귀족의 물건이니, 아마도 제법 값진 물건일 거다.”
“그럼 일단 열어보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열쇠가 없다.”
“백작의 몸에서 열쇠 같은 건 찾지 못했다.”
“자물쇠 자체도 특별하게 만든거라 쉽게 열긴 힘들 것 같다.”
마크의 말에 카일이 상자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단검을 뽑아 상자 틈으로 밀어 넣었다.
웅-
단검에 옅은 오러가 어리더니 ‘텅’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잘려 나가며 상자가 열렸다.
“우와!”
상자가 열리자 비터가 가장 먼저 비명 같은 탄성을 터트렸다. 상자 안엔 뜻밖에도 가공되지 않은 마나석이 가득 들어있었다.
“크기나 불순물의 함량, 색상까지…. 전문가나 마법사에게 한번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모두 중급이상의 마나석이다.”
“이걸 왜 가지고 있는 걸 까요?”
“그야 당연히 왕국에서 매입했겠지! 북부에 제법 큰 마나 광산이 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니? 무슨 소리야?”
“토샤 자작가에서 생산되는 마나석은 모두 왕실로 들어간다. 외부에선 매입할 수 없다.”
“그래도 뒷구멍으로 구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비터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토샤 자작가에선 왕실에서 요구할 때만 마나석을 체굴 한다. 외부로의 반출량도 정확히 확인하기에 빼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체굴량까지 조절한다고?”
“아무리 큰 광맥이라도 채굴량은 한정적이니까!”
“토샤 자작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카일의 물음에 마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토샤 자작가에 고용된 적이 있었다. 광산 수비대로 있었지.”
“병사가 아닌 용병을 고용했단 말입니까?”
“광산이 설원과 인접해 있다 보니 몬스터의 공격이 잦다. 처음엔 정규병을 동원했지만 피해 규모가 커지자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 토샤 자작가에 고용되었지.”
“마라스 용병대도 그때 알게된 겁니까?”
“맞다. 좀 복잡한 일이 있었지만 마라스 용병대 덕분에 살아난 건 사실이다.”
마크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에든 마나석 하나를 꺼냈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난 걸까요?”
“이런 고품질 마나석은 토샤 자작가가 아니면 서부에나 가야 구할 수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설원에서 출토된 마나석 같다.”
“원석만 보고도 어디서 출토된 건지 알 수 있다는 거냐?”
“설원에서 채굴된 마나석은 기운 자체에 한기가 포함되어 있지.”
마크가 비터에게 마나석을 건 냈다.
“어? 진짜네.”
“이건 설원에서 가져온 거다.”
“그럼… 설마 백작이 새로운 마나 광산을 발견한 건 아니겠죠?”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의 눈이 커졌다.
“새로운… 마나 광산!”
“이거… 좋지 않다.”
마크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마나 광산을 발견했다면 이거야말로 대박이잖아!”
“광산을 채굴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마나 광산이라면, 그것도 중급 이상 마나석이 생산되는 곳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걸 우리 같은 용병들이 찾아낸다고 해서 채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거냐?”
“설원은 주인 없는 땅이다. 일단 찾아만 낸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주인이 없으니 더더욱 큰일이지! 이게 알려지면 북방 영지들이 일제히 달려들 거다.”
마크의 말에 비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마크의 말대로 마나석을 채굴 하려면 인부는 물론 충분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무엇보다 광산을 지킬 충분한 무력이 필요했다.
“그럼 광산을 찾아도 그림의 떡이란 뜻이군.”
“이 상자에 든 마나석의 가치도 적지 않다. 굳이 위치도 모르는 광산을 찾는다고 기력을 소모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카일이 잠시 고민하듯 마나석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설마 광산을 찾아보겠다는 거냐? 앞서도 말했지만 광산을 찾아도 채굴 할 수는 없다. 당장 인부를 구하는 것도….”
“인부가 필요 없다면요.”
“뭐?”
“마나석을 다시 잘 살펴보세요.”
“마나석 말이냐?”
비터가 내려놓았던 마나석을 다시 살폈지만 이렇다 할 특이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크는 달랐다.
“이건….”
“네, 광맥에서 올라온 마나석을 오러로 잘라낸 겁니다.”
“노천광산이란 말이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 안쪽 덮개를 가리켰다. 기괴한 실선들과 알 수 없는 표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나석 원석이 든 상자에 실선과 표식을 새겼습니다. 그것도 최근에….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지도!”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광산의 위치를 알았다고 해도, 설원은 지금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장원과도 너무 멀고….”
마크의 물음에 카일이 피식 웃었다.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냐?”
“우리에겐 와이번이 있습니다. 뭐가 걱정이죠?”
“아!”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동시에 탄성을 터트렸다. 아무리 설원을 통제한다고 해도 하늘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너! 거기까지 생각한 거냐?”
“백작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니 답은 간단하더군요.
“그럼 광산을 찾으러 언제 떠날 생각이냐?”
“일단 지도의 비밀부터 푸는 게 먼저입니다. 마나석의 가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요.”
카일의 말에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와이번을 다시 불러내려면 최소 7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에 대해선 장원에 돌아가 생각해 보자.”
마크의 말에 카일과 비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풀어 놓은 말 네 마리를 마차에 연결했지만, 아직도 수 마리의 말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아깝지만, 말들은 풀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차를 끌었던 말이나 기사가 탔던 말들을 제외한 하급 용병의 말 대부분이 마장에서 대여한 말이다. 이런 말들은 표식이 남아 있어 동부에선 처리하기 쉽지 않았고, 추적을 당하기도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