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85. 베지톤 백작(4)
“카일!”
절벽을 내려온 카일을 향해 마크가 급히 다가왔다.
“비터는 어떻습니까?”
“난 괜찮다.”
비터가 카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행입니다.”
카일이 동굴 한쪽에 풀어놓은 검을 다시 허리에 차곤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뭘 하는 거냐?”
“아직 한 명이 남았습니다.”
“설마… 오러샷을 날리던 그 보샤트 남작 말이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절벽 아래로 밧줄을 늘어트렸다.
“제가 내려가면 곧장 밧줄을 끌어 올리십시오.”
“어쩌려는 거냐? 오러 샷을 날릴 정도면 상급 엑스퍼트다.”
마크가 카일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질 것 같았으면 붙어볼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위험하다. 대체 상급 엑스퍼트를 어떻게 상대하려고! 차리리 여기서 버티자! 저쪽도 밧줄이 없는 이상 절벽을 오르긴 힘들 거다.”
마크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였지만, 카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보샤트 남작은 지금 상당한 체력과 오러를 소진한 상태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앞으로 막아서는 마크의 행동에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카일의 손에서 청백색 오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응축되더니 어느새 손바닥 위로 하나의 작은 구체가 떠올랐다.
“오, 오러 샷!”
“네, 상급에 오른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너, 넌 정말!”
“여기서 비터와 함께 기다리고 계십시오.”
“흠… 알겠다. 부디 조심해라!”
마크가 결국 물러나자 카일이 밧줄을 타고 천천히 절벽을 아래로 향했다. 카일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자 마크가 재빨리 밧줄을 끌어 올린 뒤 숲속으로 사라져 가는 카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급… 엑스퍼트.”
비터가 힘겹게 마크의 옆으로 다가왔다.
“봤냐?”
“놀라서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눈앞에서 본 난 어떻겠냐? 휴… 대단한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19살에 상급 엑스퍼트라니….”
“조금 전 결심했다. 절대 녀석을 떠나지 않겠다고.”
마크가 비터를 돌아봤다.
“19살에 상급 엑스퍼트, 녀석이라면 분명 소드 마스터가 될 거다. 그리고 이 몸은 소드 마스터의 절친이 되는 거지!”
비터가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환하게 웃었다.
“미친놈!”
“넌 아니냐? 소드 마스터를 절친으로 둔 용병 마크! 어때 너도 좋잖아!”
“그런 생각 전에 소드마스터에 어울리는 사람이 먼저 돼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먼저 아닐까?”
“칫, 엑스퍼트도 겨우 올랐다. 마나 연공법도 없는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올라갈 수 있겠냐?”
“카일이 그냥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것 같냐? 녀석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새벽 훈련을 거른 적이 없다. 도자기와 옹기 제작으로 바쁠 때도 말이다.”
“그건….”
마크의 말에 비터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함께 수련하다 보면 우리도 카일에게서 얻는 것이 있겠지.”
“카일이… 우리에게 비전을 알려줄까?”
“비전까진 필요 없다. 그저 단순한 수련법 하나만 얻어도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될 거다.”
“하긴, 차기 소드마스터의 수련법이면 그 자체가 비전이지!”
비터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흠.”
“뭐냐?”
갑자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진 마크를 향해 비터가 물었다.
“조금 전, 오러 샷 말이다.”
“그게 왜?”
“…오러샷을 맨손으로도 시전 할 수 있냐?”
“그러고 보니….”
비터와 마크가 카일이 사라진 숲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괴물 같은 녀석!”
* * *
“흠….”
절벽 위를 노려보던 백작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공격은 더이상 없었다.
“이제 끝난 건가?”
탄환을 모두 소진한 것인지, 아니면 사용했던 아티팩트의 마나가 고갈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째든 녀석의 무구에 이상이 생긴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건 녀석을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백작 역시 부하들을 죽이고 자신을 괴롭힌 악마 같은 무구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베지톤 백작이 고개를 돌려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던 지그토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일어나더니 곧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맹약석이 부서지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결국 지그토까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끼아악-
비명 같은 울음을 토한 골드 와이번 한 마리가 맹약자와 마지막 인사를 하듯 상공을 맴돌더니 이내 곧장 절벽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 버렸다. 또다시 적이었던 자들에게 부하의 생명뿐 아니라 그들이 목숨만큼이나 아꼈던 와이번까지 빼앗겨 버린 것이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멀어져 가는 골드 와이번을 분노한 얼굴로 바라보던 백작이 절벽을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탕!-
갑자기 들려온 폭음에 백작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탄환을 피했지만, 달리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백작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어깨를 살폈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지만, 미스릴로 만든 어깨 방어구가 심하게 안쪽으로 구겨져 있었다. 만약 방어구가 없었다면 어깨가 날아갔을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었다.
백작은 구겨진 어깨 방어구를 거칠게 뜯어내더니 고개를 돌려 후방을 살폈다.
이번 공격은 백작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냐!”
백작이 천천히 일어나 공격이 날아온 후방을 세심하게 살폈다. 하지만 가는 바람만 맴돌 뿐 숲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탕!
이번엔 측면!
백작의 검이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냈다.
꽝-
주춤 뒤로 밀려났던 백작이 황급히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던 순간, 또다시 측면에서 폭음이 터졌다.
타앙-
꽝앙-
급히 탄환을 막아내느라 충격이 컸지만, 백작의 얼굴엔 오히려 미소가 어려 있었다.
“가깝다.”
백작이 또다시 폭음이 터진 곳을 향해 달렸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백작이 앞을 막아선 나뭇가지를 베어 넘기고 나자,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청년이 볼품없는 긴 금속 막대를 들고 서 있었다.
“헉!”
백작은 본능적으로 지금껏 자신을 괴롭혔던 무구가 바로 저 볼품없는 막대란 걸 인지하고 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때, 갑자기 발목 아래가 쑥 꺼졌다.
“함정!”
깜짝 놀란 백작이 급히 바닥을 살폈다. 함정은 그저 작은 구덩이를 나뭇가지와 풀로 엉성하게 덮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엉성한 함정 하나가 상황을 바꿔 놓았다. 백작은 발목이 빠지며 자세가 무너졌고 카일은 최고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타앙-
근접사격!
고작 20m도 안되는 근거리에서 발사된 탄환이 백작을 향해 정확히 날아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백작은 모든 오러를 가슴 방어구에 집중했다,
꽝-
탄환이 정확히 가슴 방어구에 박히며 백작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카일은 방심하지 않고 무너진 백작을 향해 빠르게 기동하며 연속해서 사격했다.
탕! 탕! 탕!
연달아 날아드는 공격에 가슴에서 올라오는 핏덩이를 꿀꺽 삼키며, 백작이 급히 머리를 보호하고 몸을 피했다.
탕! 탕!
팅-
라이플에서 클립이 팅겨 나가자 카일이 사격을 멈췄다. 탄환을 모두 소진하고 만 것이다.
“완전 괴물이군.”
카일이 검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백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깨는 물론 팔과 허벅지, 옆구리에 심한 관통상을 입었지만, 백작은 여전히 살아있을 뿐 아니라 카일을 향해 당당히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게 나와 부하들을 공격한 무기인가?”
백작이 턱짓으로 카일의 손에 들린 라이플을 가리키며 물었다.
“라이플이라는 겁니다. 마법과 기계학을 좀 섞어서 만든 거죠.”
“직접… 만들었단 말인가?”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라이플을 풀어 나무에 기대어 놓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젠 사용할 수 없나 보군.”
“마법엔 문제가 없는데, 탄환을 모두 소모했거든요.”
“탄환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더 사용할 수 있단 말이군.”
“그렇죠.”
“대단한 물건이군.”
“조작법이 간단해서 조금만 배워도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무기죠.”
“대단… 하군. 그… 라이플이란 무기로 다수를 무장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렇긴 하지만 저 말고는 만들 수 없는 무기라서요. 설령 만든다고 해도 다수를 무장시키기는 힘들 겁니다.”
“그만한 무구라면 다들 얼마든지 만들려 들 텐데?”
“생각해 보십시오. 라이플 전체를 미스릴 고합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가능할 것 같습니까?”
“미스릴 고합금…?”
백작이 깜짝 놀란 얼굴로 라이플을 바라보았다. 미스릴 고 합금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싼 금속이다. 라이플이란 물건 전체를 미스릴 고합금으로 만들려면 재료 매입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모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카일이 만들었다는 라이플에 미스릴이 함유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제 라이플에는 미스릴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좀 특별한 금속을 사용했거든요.”
“특별한 금속?”
“네, 제가 만든 금속입니다.”
카일은 백작의 물음에 거짓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대단하군. 금속에서부터 무구까지 전부 직접 만들다니… 놀랍군. 헌데 왜 이런 기밀을 순순히 대답해주는 것인가?”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어야 하고, 그건 당신이 될 테니까요.”
“하하! 솔직하군. 쥐새끼처럼 숨어 암수나 부리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그럼요. 누구처럼 명예도 모르고 비겁하게 암습이나 하는 귀족 나부랭이는 아니거든요.”
카일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 거칠군, 고작 이 정도 상처에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카일이 백작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질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
“허허… 이거 지금까지 너무 쉽게 보였나 보군.”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난 바런트 왕국의 서남 방면 변경백 아서 드 베지톤 백작이다!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알아야겠지.”
“바런트 왕국? 당신이 북방 설원에서 화이트 와이번 알을 훔치러 온 바런트 왕국의 첩자였군요.”
카일의 말에 베지톤 백작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지며 카일을 노려보았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그저 최근에 북부 설원이 봉쇄되었단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화이트 와이번 서식지에 알을 훔치기 위해 난입한 자들이 있다고 말이죠. 어느 왕국 누가 침입한지는 몰랐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백작이 카일의 술수에 놀아나 스스로 밝힌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널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하나든 둘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도 그렇군.”
카일의 말에 베지톤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이미 탄환에 의해 상당히 타격을 입었는지 검신 여기저기에 굵은 탄흔들이 가득했다.
“절 이기긴 쉽지 않을 겁니다.”
“흥! 네놈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날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축 늘어져 있던 베지톤 백작의 검이 푸른 빛으로 물들며 카일을 향해 쾌속으로 찔러 들어왔다. 갑작스런 백작의 공격에 깜짝 놀란 카일이 황급히 뒷걸음치듯 물러나더니 가볍게 몸을 뒤집어 백작의 검을 피했다. 동시에 카일의 허리에서 뻗어나 온 빛살 같은 도격이 그대로 백작의 가슴을 베어 갔다. 백작 역시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 급히 반 바퀴 몸을 회전하며 카일의 환도를 피하더니, 이번엔 카일의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카일은 고개를 트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 손으로 부드럽게 검을 밀어내더니 상처 입은 백작의 어깨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또다시 예기치 못한 공격에 놀란 백작은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카일의 공격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근접 공방!
백작이 즐겨 쓰는 공격법이다.
백작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근접 공방에서 밀려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두 단계 높은 경지의 검사를 상대로도 승리를 쟁취했던 백작이 처음으로 나이 어린 카일에게 근접 공방에서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백작을 더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피스트 워리어!”
카일의 손에 어린 은은한 오러에 놀란 백작이 소리쳤다.
“아깝군요. 팔 하나 정도는 뜯어낼 수 있었는데….”
“넌 분명 검사였는데….”
“이런, 아직 놀라기엔 이른 것 같은데… 어쩌죠.”
이번엔 카일이 백작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 들었다.
발검술로 시작되어 강력한 도격과 함께 이어진 발길질. 백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백작 역시 최상급에 근접한 검사였다. 잠시 생각지도 못한 공격 패턴에 당황하긴 했지만, 곧 안정을 되찾으며 횡으로 베어오는 카일의 환도를 향해 강하게 부딪혔다.
쾅!
백작이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면 카일은 무려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고도 충격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비틀거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카일은 가슴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백작을 노려봤다. 조금 전 충격에 약간의 내상을 입은 것이다.
“검술이 특이하고 뛰어나지만 결국 승부를 결정 짓는 건 강력한 오러다.”
베지톤 백작은 검신에 오러를 더욱 집중시키며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검과 함께 잘라주마!”
베지톤 백작이 일도양단하듯, 오러를 잔뜩 밀어 넣은 검을 카일을 향해 내려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