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48화 (348/404)

외전 - 82. 베지톤 백작(1)

카일의 뒤를 따라 한참을 달리던 마크가 거친 숨을 토해낼 즈음, 갑자기 카일이 멈춰 섰다. 깜짝 놀란 마크가 몸을 비틀어 카일과 부딪히는 걸 면했지만 바닥을 뒹구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크윽-”

“괜찮습니까?”

놀란 카일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다.”

카일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마크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야 왜 카일이 갑자기 멈춰 섰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절벽!”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절벽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크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시간이 없다. 돌아가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대로 찾아왔으니까요.”

카일은 일단 비터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가방 옆에 매여져 있던 밧줄을 풀어 허리에 묶었다.

“너… 설마 절벽을 올라갈 생각이냐?”

“네! 처음부터 이쪽으로 도주로를 잡았으니까요.”

“그럼 밧줄을 챙겨 온 게….”

“여긴 협곡이 길게 이어진 곳이죠. 도망을 간다고 해도 결국 협곡을 따라 전진하는 것뿐인데, 그래선 저들을 따돌릴 수가 없어요.”

카일이 절벽 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끄러운 절벽 같지만 길게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크랙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카일처럼 오랜 시간 절벽을 타본 경험이 있을 때의 경우다.

“정말 절벽을 오를 생각이냐?”

“먼저 올라가 밧줄을 내려 드릴게요. 처음 4~5M 정도는 수직 절벽이지만, 이후부터는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으니 어렵진 않을 겁니다.”

가볍게 손을 푼 카일이 능숙하게 바위 크랙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굉장… 하군.”

마치 평지를 올라가듯 능숙하게 절벽 위를 오른 카일이 손목에서 단도를 꺼내 밧줄 단단히 묶은 뒤 오러를 이용해 바위 속 깊숙이 박아 넣으며 미끄러지듯 절벽을 내려왔다.

“아주… 능숙하구나!”

“오크 랜드에선 평지보다 절벽이 더 안전하거든요.”

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비터를 업은 뒤 가죽끈으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었다. 그리곤 밧줄 끝에 가방을 단단히 묶었다.

“절벽을 오르면 바로 뒤따라 올라오십시오.”

“괜찮겠냐? 비터까지 업고서?”

“문제없습니다.”

카일이 다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크에게 괜찮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카일이라도 무장한 사내를 업고 절벽을 오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땀을 힘겹게 닦아낸 카일이 겨우 절벽 위를 올랐다.

“헉헉-”

비터를 내려놓은 카일이 거칠 숨을 토하며 절벽 아래를 살폈다. 마크가 겨우겨우 밧줄을 잡고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툴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절벽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바위 절벽 끝, 바위 한쪽이 2~3M 안으로 쑥 말려 들어간 공간이 보였다.

“다행이군.”

비터를 둘러업은 카일은 바위굴 안에 비터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 숨어 있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했다.

“헉헉, 힘들다.”

그때 절벽 위로 올라온 마크가 비터의 옆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어쩔 생각이냐? 절벽을 오르긴 했지만 오히려 고립을 자초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직접 확인하셨잖아요.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고 해도 쉽게 절벽을 오르진 못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막다른 절벽 쪽으로 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겁니다.”

“흠… 확실히 그렇긴 하다만.”

“물론 다른 대안도 있으니 걱정 마시고 좀 쉬세요. 전 밧줄을 걷어 오겠습니다.”

“휴~ 알겠다. 부탁하마. 난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다.”

미크가 고개를 저으며 비터의 옆에 누웠다. 그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카일이 몸을 돌려 절벽으로 다가가 밧줄을 당겼다. 미리 가방을 밧줄에 단단히 묶어둔 덕분에 이런 식으로 가방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카일 일행이 절벽 위 바위굴에서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베지톤 백작 일행 역시 용병들을 정리하고 숲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베지톤 백작으로선 당장이라도 카일 일행을 추적하고 싶었지만 머트로의 잘려나간 손목 부상이 심각했다.

“출혈이 멈추질 않습니다.”

지그토가 가지고 있던 하급 포션을 벌써 두 병이나 머트로의 손목에 쏟아부었지만, 하얀 거품만 일뿐 출혈이 제대로 멈추질 않았다.

“흠….”

죽은 라호크와 손목이 잘려 사실상 기사로서의 생명이 끝난 머트로의 모습을 침울하게 바라보던 베지토 백작이 품 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병을 꺼내 지그토에게 내밀었다.

“이걸 써라!”

“주군! 이건 상급 포션이 아닙니까?”

지그토는 물론 고통 속에서도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머트로마저도 놀란 얼굴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상급 포션은 한 병에 무려 수십 골드나 하는 데다가, 골드가 있다고 해도 쉬이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지금은 머트로를 살리는 게 먼저다.”

“하지만….”

지그토가 잠시 망설였다. 상급 포션은 교단의 고위 성직자가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의 피를 몇 달에 걸쳐 성력으로 정화 시키고 치료의 기운을 극대화한 것으로 죽어가는 생명도 살릴 수 있다는 귀한 것이었다. 위험한 임무를 나서는 베지톤 백작을 걱정한 국왕이 직접 하사한 물건이었다. 오직 백작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용해야 할 물건이었다. 이미 기사로서 생명이 다한 머트로에겐 과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망설이는 지그토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린 백작이 포션을 빼앗듯 받아들더니 머트로의 잘린 손목에 그대로 부어버렸다.

“크으윽-”

하얀 거품을 내며 잘린 팔목 위로 부글거리는 거품이 끊임없이 일었다. 그러나 곧 반응이 잠잠해지며 새살까지 돋아나 깔끔하게 봉합된 팔목이 드러났다.

“괜찮나, 머트로?”

베지톤 백작이 잘린 팔목을 바라보고 있는 머트로를 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소중한 포션을 저 때문에….”

“아니! 그런 소리 말게. 그대는 나의 기사. 포션 하나로 자넬 살렸으니 전혀 아깝지 않네.”

머트로는 베지톤 백작의 말에 그저 침울하게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중급 엑스퍼드에 와이번 나이트인 머트로이지만, 검을 들 오른손을 잃었으니 그는 더 이상 기사라 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머트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베지톤 백작으로서도 더 이상 머트로를 위로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혼자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 그 용병 녀석을 반드시 잡아 이 손으로 죽여버리겠습니다.”

머트로의 모습을 바라보던 지그토가 벌떡 일어나 분노한 듯 주먹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일행 중 하나가 부상 중이니 분명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자넨 그를 죽일 수 없다. 만약 그 녀석을 발견한다면 내가 직접 나서야 하네”

“그깟 용병 녀석, 백작님께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단번에 목을 날려 버리겠습니다.”

“지크토!”

베지톤 백작이 지그토를 향해 분노한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란 지그토가 주춤 물러나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라! 녀석은 라호크를 단칼에 죽이고 머트로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그뿐인 줄 아느냐! 나의 오러 샷을 수십 번이나 쳐낸 녀석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진정 모른단 말인가!”

“그건….”

“녀석은 중급과 상급의 경계, 아니 이미 상급 엑스퍼드에 오른 녀석이 분명하다. 그런 녀석을, 자네가 정말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베지톤 백작의 날카로운 지적에 지그토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지그토는 머트로와 라호크가 단지 앞선 용병(비터)과의 충돌 후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다고 여겼을 뿐 백작의 오러 샷을 막아낼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 있다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녀석은 이제 20대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런 녀석이 정말 상급 엑스퍼드라면!”

“녀석이 경지를 넘어섰다면 10년 후 우리 바런트 왕국에겐 최악의 재앙이 되겠지! 우리와 크로노스 왕국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질 거다. 그것도 와이번이 아닌 기사단의 전력에서 말이다.”

현 크로노스와 바런트 왕국에는 각각 한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왕실의 근위기사 단장을 맡고 있었고 보유한 기사단의 전력이나 와이번의 숫자 역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 내내 균형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바런트 왕국은 와이번 번식 성공한 것을 계기로 이러한 균형을 깨고자 베지톤 백작을 설원에 파견한 것이다. 설원의 파괴자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적국의 어린 상급 엑스퍼드를 만나고 말았다.

“우린 반드시 녀석을 이곳 에크바 산맥에서 잡는다. 이건 화이트 와이번의 알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베지톤 백작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도주한 방향은 에렌 공국이나 크로노스 방면이 아닌 바런트 왕국 쪽이다. 다행히 머트로가 추적에 능하니 놈을 쫓을 수 있을 것이다.”

베지톤 백작의 말에 기가 죽어 있던 머트로가 살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록 싸울 수는 없지만, 녀석들을 찾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녀석들은 절대 제 눈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훌륭하다.”

백작이 머트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그토의 말대로 녀석들도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일단 날이 밝은 다음 녀석들의 뒤를 쫓는다.”

베지톤 백작은 멀리 동쪽 숲 너머 붉게 달아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카일은 마크와 비터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가방에서 라이플을 꺼냈다.

잠깐이지만 조금 전 마주친 기사의 실력은 분명 자신보다 높은 상급 기사가 분명해 보였다.

특히 오러 샷에 실려 있는 오러의 순도 역시도 상당해서, 직접 검을 맞대고 상대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분명 자신이 패할 것이다.

“놈을 상대하려면….”

카일은 굳은 얼굴로 라이플을 점검했다. 그동안 오크를 상대한 적은 있었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라이플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멀리 남아 있는 불빛은 저들이 자신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란 걸 확신시켜주고 있었다.

“그건 뭐냐?”

어느샌가 깨어난 마크가 카일이 손에 든 물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일와 함께한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저런 물건을 만지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마크의 물음에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 계세요. 추적자가 있는지 살피고 오겠습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과 환도까지 풀어 가방 옆에 세워 둔 카일은 라이플과 가방에서 꺼낸 작은 목함을 들고 절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상자를 열었다.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상자 안에서 꺼낸 물건은 세공사인 코프에게 부탁해 만든 스코프였다.

유리를 가공해 만들 수도 있지만, 유리 공방은 왕도나 공작령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동안은 스코프를 만들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세공사 고투를 만나곤 생각이 바뀌었다. 유리가 아니라도 스코프를 만들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카일은 크고 깨끗한 수정을 구한 뒤 고투에게 부탁해 렌즈를 깎았다.

대륙 곳곳엔 양질의 수정을 채광하는 수정광산 많았고, 또 양질의 수정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렌즈를 가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마나석을 가공해 새롭게 라이플을 완성한 이후 한 번도 연습 사격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코프도 얼마 전에 완성한 것이라 정확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스코프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둠이 점점 밀려나며 더 넓은 곳까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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