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81. 상행(2)
상단은 결국 에크바 산맥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어때, 놀랍지?”
에바크 산맥 초입, 웅장한 바위지대 사이로 커다란 짐마차 한 대는 충분히 지날 수 있을 정도의 도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걸 정말 상단과 용병들이 만든 길입니까?”
“그래, 수많은 상단과 용병들이 이곳을 지나며 조금씩 바위를 날라 길을 만들었다. 물론 아직 길이 완성된 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상인들과 용병들이 불문율처럼 이곳 바위 지대에서 조금씩 돌과 바위를 실어 나르며 다음에 올 용병과 상단들을 위해 길을 만들고 있지.”
마크가 마차에 크고 작은 돌과 바위를 싣고 있는 던트와 하급 용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도와야죠.”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저 정도면 충분하다.”
마크의 말대로 용병들도 더 이상 돌이나 바위를 마차에 싣지 않았다.
“돌과 바위는 상행에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만 옮기는 게 철칙이다.”
“대단하군요. 저렇게 많지도 않은 돌과 바위를 옮겨 이렇게 길을 만들다니.”
“그만큼 이 길을 이용한 상인들이 많았었단 말이지.”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요?”
“우회 길도 생겼고 안전한 지름길도 찾은 덕분에 이곳을 이용하는 상인들도 많이 줄었다. 아무리 길을 잘 닦아도 에바크 산맥은 위험한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
에바크 산맥에 서식하는 주요 몬스터는 오크들이다. 보통은 덩치가 작은 회색 오크가 주를 이루지만, 가끔 대형 종인 검은 오크나 트롤, 운이 지독히 나쁘면 오우거 같은 중상위 몬스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바위 지대를 지나 숲속으로 진입한 상단은 천천히 이동하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높은 나무와 우거진 수풀로 인해 안으로 갈수록 깊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숲이 대단하군요.”
“샤론 마을의 블루 우드처럼 거대한 나무군락지만큼은 아니지만, 규모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을 정도로 넓고 거대한 숲을 가진 곳이 바로 에바크 산맥이지.”
“그만큼 다양하고 위험한 몬스터가 사는 곳이기도 하고.”
“그렇겠죠.”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나무와 넓은 숲을 바라보며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서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지만 에바크 산맥의 밤은 더욱 빨리 찾아와 어쩔 수 없이 일찍 야영지를 찾았다. 그동안 많은 상단이 사용해서인지 작은 샘까지 만들어 놓을 정도로 야영지가 제법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일단 마차가 멈춰 서며 자리를 잡자 용병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용병대장 던트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다들 능숙하게 화덕을 만들고 불을 피우곤 각자 휴식을 취하며 육포나 딱딱한 보리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흠… 귀족이 포함된 상행인데도 음식을 만들지 않는군.”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마차와 주변을 경계하며 휴식을 취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다, 비터가 말했다.
“음식을 만들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겠죠.”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 동행한 마차다. 적어도 시중들 하녀나 하인 정도는 동행하는 게 일반적인데…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어디 이상한 게 한두 가지입니까?”
고개를 저은 카일이 화덕 위에 올려진 작은 무쇠솥에서 스튜를 가득 담아 비터에게 내밀었다.
이번 야영에서 저녁을 도맡은 건 카일 있었다. 어차피 마크나 비터의 경우 요리에 별 소질이 없었고 카일 역시 육포나 마른 빵으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제 보니 우리가 귀족보다 오히려 낫군.”
스튜를 받아든 비터가 피식 웃었다. 고작해야 마른 야채나 과일을 넣은 스튜에 불과했지만 그것마저도 이곳 야영지에서는 진수성찬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주변을 경계하던 기사들이나 용병들도 카일 쪽을 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카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음식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식사는 각자 해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카일 일행은 식사를 마친 뒤 곧 가죽 피풍의를 쓰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비터만은 잠을 청하듯 누워만 있을 뿐 시선만은 여전히 마차와 기사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미 산맥에 들어오기 전에 불침번을 정해 놓았고 그 첫 번째가 바로 비터였다.
그렇게 모두 잠이 들 무렵 보샤트 상단 마차에서 잔뜩 굳은 얼굴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밖의 상황은?”
마차 안쪽,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입구 쪽에 앉은 사내에게 물었다.
“다들 이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상황을 보니 용병들도 저희를 제법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흥! 그깟 용병들이 경계해 봤자지!”
“머트로! 아무리 실력이 떨어져도 방금은 금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생존자를 남겨 서는 안된다.”
“고작해야 하급 용병들입니다. 녀석들이 제 손에서 달아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쯧, 우리가 고용한 녀석들이야 걱정할 것 없지만 공방에서 합류한 녀석들은 달라! 제법 실력 있는 엑스퍼트들이다.”
머트로의 태연함에 지크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지토 백작이 피식 웃었다.
“좋다. 그럼 공방에서 온 자들은 머트로와 라호크가 가서 처리한다. 나머지 용병들은 나와 지그토가 처리하기로 하지.”
“백작님께서 굳이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별 볼 일 없는 D급 용병 하나에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E급 용병들입니다. 저 혼자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베지토 백작이 버럭 소리를 쳤다.
“에렌 공국 상인을 만난 덕분에 추적대의 의심을 피했지만 죽은 상인들이 언제 발각될지 모를 일이다. 여기서 방심한 나머지 작은 흔적이라도 남겼다간 역추적 당할 수 있음을 정말 모르는 것이냐!”
백작의 말에 지그토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 송구합니다.”
“지금은 작은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알겠나!”
“예! 백작님.”
이들은 바로 몇 달 전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구하기 위해 설원으로 갔다가 실패한 후 크로노스 왕국에서 쫓기던 베지톤 백작 일행이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미 추적을 따돌리고 고국인 바런트 왕국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크로먼 백작가에 도착했을 땐 대부분의 탈출로가 막힌 상황이었다. 다행히 에렌 공국 상인을 죽이고 신분을 위장하긴 했지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탈출로를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크로노스 왕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도자기와 옹기를 보곤 추적자들의 눈을 피할 방법을 떠올렸다. 거금을 들여 항아리와 찻잔을 매입하고, 에런 공국 방면을 돌아 에크바 산맥을 향한 것이다.
현재 이곳은 크로노스 방면의 국경과 가까운 곳으로, 이곳에서 와이번을 꺼냈다간 국경에 주둔한 와이번 나이트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 * *
야심한 시각, 비터가 카일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이봐, 카일!”
“음~ 비… 읍!”
비터가 서둘러 카일의 입을 막았다.
“쉿!”
비터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터가 손가락을 들어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조용히 사람들이 내렸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희미한 음영만으로도 손에 든 기다란 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일이 마차를 살피고 있는 동안 비터가 바닥을 기어 마크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조용히 카일 옆으로 다가온 마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보샤트 상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불침번을 서느라 모닥불 옆에서 졸고 있는 용병에게 다가섰다. 기사는 용병의 뒤로 순식간에 다가가서는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고개를 흔들며 발버둥 치는 용병의 심장에 단검이 박혔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용병을 기사가 살며시 안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깜짝 놀란 마크가 다급히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한발 먼저 용병대장인 던트가 버럭 외쳤다.
“습격이다!”
던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던트의 외침에 용병들이 너도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뽑았지만, 이미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인영이 숲속을 빠져나와 던트를 덮친 후였다.
스각-
“구심점이 있으면 곤란해서 말이야!”
베자토 백작의 검이 던트 대장의 목을 베어 넘겼다.
“이놈! 죽어라!”
“포위해!”
“던트 대장을 죽이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용병 다섯이 베지토 백작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찔러 넣었지만 베지토 백작은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곤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웅-
낮은 진동과 함께 베지토 백작의 검이 분화하며 달려드는 용병들을 단번에 베어 넘겼다.
“으악!”
“커억…!”
“괴… 괴물 같은 놈!”
던트를 비롯한 용병들 다섯이 쓰러지는 순간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용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카일 일행에게 두 명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젠장, 이런 거였어!”
비터가 서둘러 검을 뽑아 들며 마주 달려 나갔다. 마크 역시 비터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런! 비터, 피해!”
기사들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치솟자 마크가 다급히 외쳤지만, 막기에는 늦어 보였다.
“젠장!”
비터는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오러를 검에 집중시켜 다가오는 검을 막았다.
“꽝!”
온 힘을 다해 검을 맞댄 비터가 강한 힘에 밀려 2미터가량 날아가선 나무에 부딪히며 기절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검이 잘려나가지 않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는 것뿐. 공격한 마트로 역시 비터가 온 힘을 다해 부딪혀 왔기에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 나갔다. 밀려나는 마트로 옆을 라호크가 스치듯 지나며 뒤를 쫓는 카일을 향해 검을 찔렀다. 카일은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라호크를 향해 뛰어들었다.
“미친!”
설마 검을 향해 스스로 뛰어들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던 라호크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카일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검을 피하더니 라호크를 스치듯 지나 뒤로 물러난 마트로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대경한 마트로는 다급히 검을 들어 카일의 검을 막았다.
차앙-
짧은 충격과 함께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왔다.
푸확-
“크으윽-”
이질적인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몸을 돌려 카일의 뒤를 쫓으려 했던 라호크의 가슴이 쩍 갈라지더니 바닥에 쓰러졌고, 머트로는 잘려나간 오른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때였다. 카일이 다급히 몸을 돌리며 환도를 뽑았다.
꽝-
강렬한 충격에 카일은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공격은 한번이 아니었다.
야구공만 한 푸른 기운이 연달아 카일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법과는 전혀 다른 오러의 결정체!
“오러 샷!”
카일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부드럽게 회전시켜 날아든 오러 샷을 튕겨내고 안정을 되찾았다. 처음이야 갑작스럽게 날아든 오러 샷에 놀라 당황했지만, 공격의 실체를 확인한 이상 막아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보일을 통해 오러 샷 정도는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카일은 오러 샷이 날아온 곳을 노려봤다. 짙은 음영에 가져 있던 상대가 천천히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코트형 가죽 갑옷, 황금빛 미스릴 합금 보호대를 착용한 사내가 카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음….”
카일은 사내를 경계하며 뒤를 힐끔 살폈다. 비터가 정신을 차리고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물러나요.”
카일이 황급히 비터와 마크를 향해 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비록 태극의 원리로 오러 샷을 밀어내긴 했지만, 오러 샷의 위력은 카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오러 샷을 흘려내지 못했다면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쉬익-
또다시 카일을 향해 강력한 기운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카일은 다시금 오러 샷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악!”
“흩어져!”
“우리 상대가 아니다. 도망쳐!”
지그토를 상대로 대항하던 하급 용병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는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이놈들!”
지그토가 깜짝 놀라 황급히 뒤를 쫓았지만 흩어진 용병은 8명, 습격이 던트 대장에게 일찍 발견되면서 생각보다 많은 용병이 살아남은 것이다.
지그토가 뒤를 쫓으며 용병들을 베어 넘기고는 있었지만, 백작이 보기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용병을 지그토 혼자 처리하는 것은 역부족 같았다.
“빌어먹을!”
벌써 수십 번의 오러 샷을 날렸지만 앞의 녀석이 모두 막아냈다. 상대는 적어도 중급이상, 어쩌면 상급에 근접한 용병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녀석에게 발이 묶였다간 용병들을 놓칠 수 있었다.
“네놈들!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백작은 잠시 카일을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사방으로 흩어진 용병의 뒤를 쫓았다. 멀어져가는 베지토 백작을 바라보던 카일이 짐 마차에서 가방과 밧줄을 챙겨 황급히 비터와 마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힘껏 달렸다. 숲 안쪽으로 한참을 달리자 나무 덩굴 속에서 마크가 뛰쳐나왔다.
“카일 무사했구나!”
“네! 비터는요?”
“정신은 차렸는데 아직 움직이긴 힘들다. 오러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려 검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충격 때문에 내상을 입은 상태다. 이대로 멀리 가기는 힘들 것 같다.”
“일단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군요.”
“그래도 여기서 계속 머물 수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카일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더니 비터를 등에 업었다. 건장한 사내와 무거운 가방까지 들었지만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서 걷기 시작했다.
“괜찮으냐?”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일단 이곳에서 멀어지는 게 먼저입니다. 다른 용병들을 쫓긴 했지만, 오러 샷을 날리는 강자입니다. 곧 정리하고 우릴 쫓을 겁니다.”
“아, 알겠다. 서두르자!”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숲이 우거지긴 했지만, 오크 랜드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카일에게 이 정도 숲은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